"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당신의 말이 나의 귀를 놀라게 하고, 또 의심케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가물가물해지면서 바닥 모를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는 듯했다. 술기운이 더해감에 따라 당신은 나의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마누라! 마누라!"

진작부터 자주 불러와서 익숙해진 듯한 말투로 당신은 무슨 애원이라도 하듯 자꾸만 보챘다. 부드럽고도 다정스러운 말소리는 이윽고 나의 뇌리를 찔러서, 허전한 소녀의 텅 빈 가슴에 화살처럼 마구 내려 꽂혔다.


- 김자야 <내 사랑 백석> 41쪽 중에서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백석을 사랑한 자야 기생이었던 자야는 시인 백석을 만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둘이 만주로 도망갔다면 평생 행복할 수 있었을까. 시대가 갈라놓은 이 연인,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영영 이별하고 만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의 관점에서 극을 풀어간다. ⓒ 곽우신


자야 김영한. 천재시인 백석과 애틋한 사랑을 나눴다고 알려진 여인. 뜨겁게 사랑했고, 아프게 이별했고, 평생을 추억 속에 그를 되새기며 살아갔던 사람. 결국, 마지막까지 백석과 재회하지 못했던 그녀는 기생으로서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길상사에 시주한다. 당시 시가 1000억 원가량의 요정 '대원각'을 기증하면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1000억 원을 줘도,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진위 논란이 항상 따라다니지만, 이 이야기가 자아내는 먹먹함이 크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아래 <나나흰>)는 이 먹먹함에 초점을 맞춘다. 지난 11월 5일,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에서 개막한 이 극은 자야의 관점에서 백석과의 추억을 풀어낸다. 피아노 선율 위에 백석의 시가 옮겨붙으며, 관객을 흰 당나귀마냥 '응앙응앙' 울게끔 한다.

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 자야를 연기하는 배우를 만났다. 지난 11월 17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배우 최연우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바꾼 의미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외로운 자야 한 쌍이 짝인 오리. 하나의 오리만이 돌아왔고, 백석은 그 오리를 자야에게 전해준다. 자야는 그 오리를 안고 끊임없이 그를 추억한다. '자야'라는 이름 그대로. 이름은 이처럼, 그 이름을 지닌 이에게 큰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최주리도 최연우로 바꾼 것이 아닐까. ⓒ 곽우신


배우 최연우의 본래 이름은 최주리였다. <나나흰> 직전 작품인 연극 <안녕, 여름> 때만 해도 그녀는 최주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안녕, 여름>이 '최주리'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그녀는 이름을 최연우로 바꿨고, 배우 최연우로서 맡은 첫 작품이 이 <나나흰>이다. 예술인으로 활동하는 이가 이름을 바꾸는 건 종종 있는 일이지만, 실제 본명까지 바꿔버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왜일까.

"저도 사실 주리라는 이름 되게 좋아하거든요. 익숙하잖아요. 일단은 어머니가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하신 지가 너무 오래됐어요. 처음에는 배우 생활해온 지도 꽤 됐고, 조금 있으면 10년 돼가는데, 뭐하러 바꾸나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제 나이쯤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잊고 싶은 것들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온다고. 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살아오면서, 물론 배우라는 직종이 구설수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말도 안 되는 많은 것들이 저를 힘들게 해왔거든요.

특히 <나나흰> 연습 초반, <안녕, 여름> 공연을 하던 중간이었죠.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었어요. 제가 '내가 왜?' 하고 해명하거나 따져 묻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그냥 그렇게 쭉 살았는데, 이번에는 진짜 '내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에 힘들었어요. 제일 결정적이었던 건, <안녕, 여름> 프로그램 북에 들어간다고, '내 생애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였어요. 여기에서 너무 충격을 받았죠. 내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은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라 다 잊고 싶었던 순간이라는 게 너무 아팠어요. 분명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는데, 나는 왜 그런 기억들보다 잊지 못하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더 많을까.

그러다가 엄마의 이야기가 얹혔어요. 이름이라도 바꾸면 좀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엄마한테 이야기했는데, '그래 제발 좀 바꾸자. 어쨌건 간에, 네가 마음이 편해진다면 엄마도 편해질 거야'라고 하셔서 바꿨죠. 배우 활동을 위해 이름을 바꾼다면 그냥 예명을 썼을 텐데…. 내가 힘들었던 것, 내가 아팠던 것 그리고 나 때문에 힘들었던 사람들까지도 따뜻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해서 바꿨어요."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연우가 안고 있는 슬픔 최연우 배우를 인터뷰한 동료 기자들에게 물으면, 그녀가 인터뷰 도중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만큼 안에 서러운 감정을 꽉꽉 안고 있는 배우이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감정들. 이 작품을 만나 조금은 그 해묵은 것들을 풀어냈을까. ⓒ 곽우신


인터뷰 중간중간, 배우는 말을 끊고 잠깐의 침묵을 가지는 때가 많았다. 눈가도 금세 그렁그렁해졌다.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는 그에게 그 힘듦이 무엇인지 자세히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대신 그토록 정리하고 싶었기에 선택한 이름이, 하고 많은 이름 중 '연우'였는지를 물었다.

"제가 처음 보면 새침데기 같고, 사회에서 말하는 '여자여자'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보니까 이번에는 중성적인 이름을 쓰고 싶었어요. 주리라는 이름도 상당히 여성스럽지 않나요? 깍쟁이 같고, 까다롭고, 손에 물 하나 안 닿을 것 같은 이미지라고들 주변에서 그래서…. 항상 사람을 만나면 듣는 얘기가, '너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많이 다른 것 같아'였어요. 이름이나 외형적인 모습이 만들어내는 선입견 때문에, 오히려 일부러 더 털털하게 말하고 행동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었죠. 그래서 아예 중성적인 이름으로 바꾸고 싶었어요.

연우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라는 뜻이래요. 운명론적 이름인데, 어쩌면 저한테, 제가 살아가는데 이 이름이 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엄마가 많이 고민하고 고생해서 찾아오셨기에, 엄마에게도 고맙다고 말씀드렸어요. 저도 놓고 싶은 게 많았어요. (자야가 백석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네. 그렇게 운명적으로 여러 가지가 맞아 들어갔어요. 이름을 바꾸기에 지금이 딱 좋을 때라고 생각해요. 이런 시기에 이런 공연을 만난 것도 제 인생의, 배우로서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것 같아요."

자야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연우, 행복을 찾다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연우자야와 종혁백석 자야와 백석의 사이가 정말로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만난 3년 그리고 헤어짐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다만 최연우는 "사랑을 누가 말릴 수 있겠어요. 사랑은 두 사람만의 세계잖아요"라고 말했다. ⓒ 곽우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는 뜻의 이름을 선택한 배우. 그래서 그런지, 배우 최연우도 김자야라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그렇게 힘들어하며 방황하던 배우가 한 작품을 만나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하니 말이다.

"사실 근래 한 작품들이 진짜 좋기는 다 좋았어요. <국경의 남쪽> <아랑가> <안녕, 여름> 다 의미 있고, 재미도 있는 작품이었죠. 지금 이 나이에, 배우로서 이 시기에 이런 공연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죠.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작품이 없어요. '이게 팔자인가'할 정도로…. (웃음) 눈물의 농도나 표현의 차이였지, 제 마음은 언제나 일렁거렸어요. 하지만 <나나흰>은 조금 달랐어요. 연기하면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하게 해줬어요. 공연하는 중간에 내가 이 사람(백석)을 사랑할 수 있고, 이 사람의 시를 읽어볼 수 있다는 데 또 다른 행복감이 있더라고요. 이처럼 행복한 공연을 만나기 위해서 앞으로도 이 판을 맴돌겠구나 싶을 정도로요.

마지막 넘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부를 때, 세상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너무 행복해서 내 몸이 산화할 것만 같을 정도예요. 그 전까지 자야는 '마지막 놀이를 끝냈다. 난 잘 살았고, 난 이 사람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 사람의 책 속에 내 젊음이 있잖아'하고 이제 정리하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내 진짜 꿈이었던 게 마지막 장면에서 실현되는 거거든요.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노래하면서, 그 시의 주인공이 되어서, 아…. 내가 가장 꿈꿨던 건 이것이라는 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끼는 순간이거든요. 기쁨과 행복에 가득 찬 눈물. 환희."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자야는 행복했을까 "내가 여태껏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내 마지막 삶이 이렇게 행복하다면 그것 자체로 너무 아름다운 삶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으로 연기하고 있어요. 자야가 고생해왔지만, 삶을 아름답게 생각하고 싶고, 이게 나 자신의 마지막 페이지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하나도 슬프지 않아요. 그 눈물이…. 행복해요." ⓒ 곽우신


최연우는 '행복'이라는 말을 참 자주 썼다. 한참을 앓으며 아파하던 이 배우는, 평생 한 남자를 기다렸지만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는 여자를 연기하며 오히려 치유 받은 듯 보였다. '자야'는 백석이, 이백의 시 '자야오가(자야사시가)'에서 따다가 붙여 준 이름이라고 한다. 전쟁에 나간 지아비를 평생 기다리는.

"저는 자야를 연기하면서 참 행복하거든요. 관객들도 행복한 공연을 봤다는 느낌이 드셨으면 좋겠어요. 아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 여자가 저 남자를 사랑해서 고통스러웠던 시간보다, 저 남자를 사랑했기에 행복했던 시간이 훨씬 길었겠구나'하고 생각해주시면 어떨까.

제가 자야 여사를 경애하는 이유가, 사랑은 사실 노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녀도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이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해가며 그를 사랑했기에,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죠. 그 사랑이 실제로 존재했느냐 안 했느냐 같은 유무를 판단할 게 아니에요. 사실은 그를 사랑했다고 믿는 순간, 그 순간 자체가 행복하다는 걸 관객분들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실제로 자야가 백석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백석은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 역시 명을 다한 지 오래다. 남은 기록은 자야의 에세이이지만, 문학계 일각에서는 자야 개인의 일방적인 기록이며, 거짓말이 많이 섞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만들고 연기하는 이들은 그 기록의 진위를 파헤치지 않는다. 이토록 마음이 저린 사람을 연기하지만, 환희에 가득 찬 슬픔을 통해 백석을 사랑하는 자야처럼, 연우 역시 배우라는 직업을 아파하면서 사랑한다. 그래서 행복하다. 객석에 앉은 관객을 눈물짓게 하는 건, 실제 자야와 백석의 사랑이 실존했는지가 아니다. 저 무대에서 그토록 애잔하게 웃고 우는, 이 배우의 감정 때문이다. 진짜로 백석을 사랑하게 된 '연우자야' 때문에.

"자야의 사랑 방식이 제 사랑 방식과 비슷해요. 연습하면서 제가 정말로 백석을 사랑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극 안에서 사랑하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백석이라는 존재를, 이 사람을, 그의 시를 정말로 사랑해야만 될 것 같았죠. 그리고 '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면,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안에 큰 아픔을 지닌 사람을 사랑하려면, 옭아매지 않아야겠구나'하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나(자야)조차도 누군가에게 온전히 정착할 수 없는 이이기에, 붙잡을 수 없기에, 언제든지 그가 나를 찾아올 때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죠."

배우로서의 길, 함께 걷고 있는 그녀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억지로 만들지 않는 캐릭터 "<여신님이 보고 계셔> 때도 70세 어머니를 연기했는데, 당시에도 많은 것을 바꿔가며 캐릭터를 만들었거든요. 처음에는 자야의 나이 변화도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탓에 연습이 너무 힘들었고요. 하지만…." ⓒ 곽우신


"자야는 제가 연기하면서 캐릭터를 입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드리고 있어요. 다른 작품들 때는 그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어떻게 바꿀지, 대사 톤은 어떤 식으로 할지 많은 고민을 필요로 했거든요. 사실 <나나흰>도 연습할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젊음과 늙음 그리고 그 인생의 끝자락까지 오가며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나이 듦을 어떻게 드러낼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목소리 톤이라든가, 신체의 변화라든가….

그런데 이 사람이 극 중에서 만나는 백석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내 판타지, 내 꿈, 내 생각이잖아요. 내 판타지 속에서 만나는 남자 앞에서 늙어 보이고 싶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필석 오빠가 많은 도움을 줬어요. '극 전체가 판타지인데 너무 리얼리티를 추구하면, 그게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방향으로 잡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조언해줬어요. 그 후로도 사내들, 백석들과 얘기를 진짜 많이 했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줘도 될까. 자신도 없고, 걱정도 됐고…. 연습 때 음악감독께서 '이렇게 갈피를 못 잡는 너는 처음 본다'고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본 공연 들어가기 전날 마지막 런 스루(Run Through, 마지막 예행연습) 때에야 내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섰죠. 이렇게 해도 되겠구나. 그러고 나서 관객들이 좋아해 주시니까 너무 감사해요. 시선을 다르게 보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인정받은 것 같아서…."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연우자야와 재영사내 "상대 배우가 내 눈을 바라봐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눈으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눈으로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나누고…. 그게 너무 좋아요. 너무 중요하기도 하고.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 그리고 바라보는 배우들은 알아요. '저 두 배우가 지금 정말 소통을 하고 있구나'라고. 사실 소통하는 것처럼도 연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관객들을 속이는 거죠." ⓒ 곽우신


자야와 백석 그리고 사내까지 총 세 사람이 등장하는 극이지만, <나나흰>에서 실질적으로 드라마를 끌고 가는 건 자야이다. 자야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회상되고, 풀어지기에 극을 책임져야 하는 무게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여배우가 드라마를 끌고 가는 극이 많지 않잖아요. 저는 처음이었고, 그래서 부담이 컸죠. 주변 동료들의 조언에 '나도 아는데, 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투정부렸어요. 사실 조언을 하면 받아들이는 배우가 있고, 기분 나빠하는 배우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서로 조심스러워하거든요. 이건 나의 예술이고, 나의 일이고, 나의 영역이기 때문에…. 저도 배우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고요. 그런데 사실 다들 각자 자기 것 하기 바쁜데도, 나한테 어떤 조언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이 공연을 함께하고 싶다는 의도잖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그 조언들이 너무 고맙더라고요.

그 덕분에 저도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먼저 많이 물어봤죠. 그랬더니 먼저 손 내밀어줘서 고맙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안)재영 오빠가 연습 중간에 저에게 그랬어요. '네가 너무 배려하는 것 같다'라고.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저는 제가 끌고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계속 배려하는 연기를 했어요. 그런데 가장 연습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게 사내들인데, 그 과정을 보면서 오빠가 '배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제는 네가 네 욕심을 부려도 돼. 욕심이 과하면 추하지만, 너무 배려하는 것도 좋지 않아'라고 했어요. 제 지금까지 필모그래피가 머릿속으로 그 순간 슉 지나가는데, 저는 항상 배려만 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엄청 이기적으로 하고 있어요."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외로운 자야, 외롭지 않은 연우 배우 최연우에게 <나나흰>은 여러모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이름을 바꾼 첫 작품이고, 자신이 드라마를 끌고 가야 하는 첫 작품이고, 캐릭터를 만들어 입지 않고 스스로를 많이 드러내는 첫 작품이다. 그리고, 배우 최연우가 '이기적'으로 연기하는 첫 작품이다. 그리고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준 건 주변의 동료들이었다. 백석을 기다리던 자야는 평생 외로웠지만, 배우로서의 길을 걷는 연우는 외롭지 않을 터이다. ⓒ 곽우신


그렇게 어렵게 선택한 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이기적인 선택은 주변으로부터 인정 받았다. 관객 반응도 호평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눈빛을 마주보고 대화하며 연기하는 배우도 마찬가지이다.

"제가 (강)필석 오빠랑 작업을 해보면서 한 번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인간적으로는 따뜻하지만 일에 대해서는 냉정하거든요. 전에 <아랑가>를 할 때도 한 번도 '잘한다'고 해준 적이 없어요. 그저 '오늘 보러온 누가 너 잘했다더라'고 전해주기만 했지, 자기 생각으로 칭찬해준 적은 없죠. 너무 좋아하는 선배이자 오빠이지만, 이런 부분을 저는 굉장히 존경해요. 애정이 없으면 저에 대해 아예 얘기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제가 또 잘 아니까.

그런데 이번에 공연하면서, '잘했어. 너 오늘 너무 잘했어, 주리야. 정말 잘했어'라고 뜬금없이 밤에 문자가 온 거에요. 그 문자를 보고 한참 눈물이 났어요. 지금도 눈물 날 것 같네…. 내가 너무 존경하는 선배에게 칭찬을 받으니까, 제가 성장한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한 고민, 내가 한 선택들이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소수라도 좋게 봐줬다면…. 그 선택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잖아요. 그에 대한 응원의 박수를 받은 것 같아서,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고마워요, 오빠들."

많은 성장통을 겪은 배우, 어쩌면 그녀도 배우로서의 사춘기를 이제야 통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길을, 주변 동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서로 믿고, 함께 의지하며 걸어가고 있다. 백석 없는 자야를, 자야 없는 백석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그녀가 흘린 눈물이 배우로서 그녀가 지닌 토양을 더욱 넉넉하게 할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바다에 가자던 백석의 손을 잡고 그 해변에 닿는 자야.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없다. 언제나 일렁이던 그녀의 가슴 속 파장도 멈추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바닷가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기쁨의 눈물을 지었던 자야처럼, 그녀의 일렁이는 마음에서 시작된 파도가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또 다른 일렁임을 낳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는 배우니까.

백석의 영원한 나타샤, 자야. 배우 최연우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투영하며 표현하는 자야는 오는 2017년 1월 22일까지 만날 수 있다.

최연우가 연기하는 자야 뮤지컬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서 '자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최연우. 지난 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최연우 배우가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로 분하여 열연하고 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천재시인 백석과, 백석이 사랑한 여자 '자야' 김영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만날 수밖에 없었던 연우자야 "정말 하길 잘한 것 같아요. <아랑가> 때부터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에서 계속 얘기가 왔거든요. 당시는 전혀 정보가 없었죠. 대체 무슨 작품이길래…. 그런데 거의 7~8개월을 거의 계속 이야기를 하시길래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작품이 얼마나 좋으면, 나를 얼마나 좋게 생각해줬으면 이렇게까지 나에게 권할까'해서. 장난스레 튕기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너무 고마워요. 나에게 이 공연을 만나게 해줘서." ⓒ 곽우신



덧붙이는 글 <내 사랑 백석>(김자야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63쪽 / 1996년 5월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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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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