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승부의 세계에서 매년 새롭게 뜨는 별이 있으면 지는 별도 있기 마련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정든 팬들과 이별을 고해야 할 순간이 다가온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지만 그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막상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바쳐온 인생의 한 페이지를 마감해야하는 순간이기에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이기도 하다. 때로는 개인의 입장과 조직의 이해가 충돌하며 갈등의 빌미가 되기도한다.

최근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두 명의 전설, 홍성흔과 이병규의 잇단 은퇴는 야구팬들에게 묘한 여운을 남겼다. 두 선수 모두 90년대에 데뷔하여 소속팀의 간판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하며 2000·2010년대까지 한국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이끌었다.

이병규는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시절, 홍성흔은 첫 FA 자격을 얻어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몇 년을 제외하면 내내 잠실구장을 대표하는 서울팀의 간판스타로서 활약했다. 이들은 평생을 바쳐온 소속팀에서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명예로운 은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하지만 이들의 은퇴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팬들의 입장에서는 내심 불편했다. 조금 냉정히 말하면 이들은 사실상 구단에 등떠밀려 은퇴를 당한 것에 불과하다. 홍성흔과 이병규 모두 현역 생활 연장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구단은 베테랑들에게 기회를 더 주기보다는 은퇴와 타 구단 이적 사이의 양자택일을 요구했고 선수는 고심 끝에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마지막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은퇴라는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말이 좋아 아름다운 은퇴이지, 실제로는 '아름답게 포장된 강제 은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가 쉽지 않았던 슈퍼스타들

 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적토마' 이병규(9번)가 은퇴한다. (LG트윈스 제공)

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적토마' 이병규(9번)가 은퇴한다. (LG트윈스 제공) ⓒ 연합뉴스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보다 어쩌면 멋지게 내려오는 게 더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들조차 마무리까지 아름다웠던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출범 35년을 넘긴 한국야구의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전설들의 퇴장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문화다.

바로 양준혁(전 삼성)이나 이종범(전 기아)이 바로 지금의 이병규-홍성흔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들도 각각 소속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으로서 선수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한 팀에서 마무리를 장식하여 멋진 은퇴식까지 치렀다. 하지만 팀 전력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사실상 은퇴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양준혁-이종범을 모두 은퇴로 몰아간 선동열 감독은 한때 '레전드 킬러', '강제 은퇴 플래너'같은 오명에 시달리기도 했다.

보통 베테랑들이 은퇴로 내몰리는 과정은 비슷하다. 선수는 현역 생활을 최대한 오래 지속하고 싶어하고, 팀은 일정한 시기마다 세대교체와 리빌딩을 통하여 인적 쇄신을 추구할수밖에 없다. 실제로 삼성이나 올해의 두산-LG 등은 이러한 과감한 세대교체를 바탕으로 젊은 선수들을 발굴해내며 팀 재건의 초석을 닦았다. 아무리 예전에 공로가 큰 베테랑이라고 해도 팀의 미래를 위하여 희생양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사실 양준혁이나 이종범처럼 팬들의 아쉬움과 박수 속에 퇴장하는 경우는 그나마 복받은 케이스다. 삼성의 또다른 레전드로 꼽히는 이만수나 감시진, 롯데의 고 최동원, LG의 이상훈 같은 선수들처럼 구단과의 갈등으로 쫓겨나다시피하여 허무하게 현역생활을 마무리하거나 다른 팀에서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은퇴해야 했던 경우도 많다. 심지어 언제 은퇴했는지도 모르게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선수들은 매년 부지기수로 나온다.

선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마무리는 최고의 정점에서 자신이 떠날 자리와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은퇴일 것이다. 송진우(전 한화)는 한국프로야구의 투수부문 역대 기록을 대부분 갈아치우고도 무려 44세의 나이까지 '원클럽맨'으로 명예롭게 은퇴했다. 김재현(전 SK)은 LG에서 데뷔했지만 고관절 부상으로 선수생활의 위기를 극복하고 SK에서 재기하며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끝으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들은 현역 생활 거의 막바지에도 실력이나 성적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로 은퇴 시기를 결정하며 말 그대로 박수칠 때 떠난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한국프로야구에 절실한 '리스펙트' 문화

 두산 베어스는 홍성흔이 고심 끝에 은퇴를 선택했다고 22일 밝혔다. 홍성흔은 1999년 입단한 뒤 통산 1957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1, 2046안타, 208홈런, 1120타점을 기록했다. 사진은 지난 2015년 6월 14일 2천 안타를 친 뒤 인사하는 홍성흔.

두산 베어스는 홍성흔이 고심 끝에 은퇴를 선택했다고 22일 밝혔다. 홍성흔은 1999년 입단한 뒤 통산 1957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1, 2046안타, 208홈런, 1120타점을 기록했다. 사진은 지난 2015년 6월 14일 2천 안타를 친 뒤 인사하는 홍성흔. ⓒ 연합뉴스


이처럼 은퇴의 가장 좋은 모양새는 선수 스스로 자신의 현재 실력과 팀 상황을 냉철하게 돌아보고 합리적으로 은퇴 시기를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이 제 머리를 못깎는다는 말처럼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단순히 선수생활에 대한 개인적 욕심만이 아니라 은퇴 후의 인생이나 처우 같은 현실적인 문제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레전드나 프랜차이즈 스타의 상징적 가치를 무시하고 나이먹고 기량이 떨어진 선수는 그저 소모품이나 애물단지 취급하는 한국야구계의 풍토다. 은퇴를 단순히 선수 개인의 결단이나 희생의 영역으로만 치부하고, 이미 결론을 정한 채 너는 대답만 하라는 '답정너' 식으로 몰아가는 관행은 한국야구에서 아름다운 은퇴 문화가 정착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프로스포츠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시대를 풍미한 대스타들의 말년을 예우하는 '리스펙트'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다. 위대한 스포츠 선수들이 단순히 한때 운동 잘해서 인기를 누렸던 스타 정도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거장'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의 뉴욕 양키스의 데릭 지터와 마리아노 리베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치퍼 존스, 보스턴 레드삭스의 데이빗 오티즈, 프로농구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선수들은 일찌감치 은퇴 시기를 공언하고 자신의 마지막 시즌을 '은퇴 투어'로 멋지게 장식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프로농구의 서장훈이 2012-2013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으며 유일하게 사전예고와 은퇴 투어 형식으로 선수생활을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선수들에게는 마지막 불꽃을 태울 기회를, 팬들에게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들과 마지막 추억을 남기고 작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구단 입장에서도 선수와 은퇴 시기를 놓고 옥신각신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하나의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베테랑 선수들을 일일이 예우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구단과 한국야구에 오랫동안 공헌하며 큰 족적을 남긴 선수라면 어느 정도의 존중과 배려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병규나 양준혁, 이종범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만 해도 이들을 은퇴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존중이나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병규는 올 시즌 퓨처스리그에서 꽤 좋은 성적을 올렸음에도 1군에서는 내내 전력외로 외면받다가 최종전에서야 고작 1경기, 1타석을 나서는 데 그쳤다. 세대교체라는 명분이나 성과는 인정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헌신한 한 레전드의 선수경력을 강제로 끝장내는 순간이 이렇게까지 가혹할 필요가 있었나하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선수는 단지 구단이 쓰고 버리는 소유물이 아니라 프로야구 전체의 귀중한 자산이며 역사이기도 하다. 구단이 원하는 방식대로 유니폼을 벗기고 포장만 그럴듯하게 한다고 해서 모두 명예로운 은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야구도 이제는 대선수들에 대한 존중, 그리고 품위 있는 마무리에 대한 전통을 문화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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