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한부인가. 지난 9월 JTBC 드라마 <판타스틱>(16부작)이 처음 시작할 때, 이소혜 역을 연기한 김현주가 암에 걸린 시한부 역할을 맡았다는 걸 알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시한부 드라마를 떠 올리면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자신의 운명을 알았을 때의 충격, 그래도 살아가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감정 변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 들이 비밀을 알게 됐을 때의 신파, 그리고 주인공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결말. 아무리 신선한 시한부 드라마라도 이 공식을 탈피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은 <판타스틱>에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히 말할 수 있다. <판타스틱>은 달랐다고.

 <판타스틱>, 제목만큼 판타스틱한 시한부 드라마

<판타스틱>, 제목만큼 판타스틱한 시한부 드라마 ⓒ JTBC


대부분의 시한부 드라마가 죽음이라는 문턱에 들어선 주인공의 슬픔과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면, <판타스틱>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절망하고 분노하다가 결국은 체념에 이르는 통념을 뒤집어 죽음을 선고 받았지만 그 죽음에 끌려다니기 보다는, 그 죽음과 친구가 되는 법을 이야기 하는 <판타스틱>의 내러티브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따듯한 터치로 표현이 된다. 시한부 드라마에서 신파가 아닌 유쾌함을 발견하다니. 이것이야말로 반전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이소혜와 괴짜 의사 홍준기(김태훈 분)는 이 드라마가 던지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표현한다. 특히 홍준기는 이 드라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유일한 인물로서, 이 메시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 홍준기는 물론 암과 싸우면서 절망하고 분노하다 결국 좌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투지를 불태우지 않았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죽음의 과정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한부 드라마의 유쾌한 반전

 잘 사는 법이 아니라 잘 죽는 법, <판타스틱>은 신파가 아니었다

잘 사는 법이 아니라 잘 죽는 법, <판타스틱>은 신파가 아니었다 ⓒ jtbc


극중에서 홍준기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그 리스트를 하나하나 수행해 가며 다가올 죽음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모습은 죽음을 외면하려 애쓰는 마지막 몸부림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모습은 죽음이라는 목표로 향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죽음과의 전쟁을 그만두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그가 버킷리스트를 수행해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아듀 파티까지 계획하는 그의 모습은 '웰빙'이 아니라 '웰다잉'에 대한 깊은 메시지를 던졌다. 누구나 잘 사는 것을 꿈꾸지만 잘 죽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된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만큼 함부로 생각조차 하기 힘든 슬프고 절망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아무리 죽음을 피해 달아나도 언젠가 우리 삶에는 끝이 존재한다. 그 끝을 맞이하는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가져 보았을까.

<판타스틱>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당신이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어떻게 잘 준비할 수 있을것인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판타스틱>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홍준기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살고자 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행복해지는 것. 그 전에 그는 그렇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그 역시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았을 테고,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만큼은 가능하다. 그가 사는 것처럼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을 마주했을 때라니. 그 사실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살아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살지 못하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살 수가 있다는 것. 우리는 살아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홍준기가 죽는 장면은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만큼 슬프다. 그러나 그 슬픔은 신파가 아니다. 오히려 살고자 했던 누군가의 죽음에 보내는 찬사에 가깝다. 이것이 시한부 드라마라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섬세한 터치로 시한부의 삶을 표현해 낸 김현주

섬세한 터치로 시한부의 삶을 표현해 낸 김현주 ⓒ jtbc


주인공 이소혜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에도 "충분히 행복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버텨낸다. 왜 살아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살았고 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며 또 하루를 산다. 산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 깨닫고 지금 이순간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는 것. 어쩌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보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일이 아닐까.

<판타스틱>을 선택한 김현주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인을 더없이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김현주의 연기의 결은 시청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강력한 축이었다. 발연기가 주특기인 톱스타 역할을 맡은 주상욱 역시, 이 드라마를 지나치게 무겁게 만들지 않으며 코믹과 진지를 넘나드는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극본과 연기, 연출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 새로운 방식의 시한부 드라마를 탄생시킨 것이다. 편견을 가졌던 것이 미안해 질 만큼, 색다른 시한부 드라마였던 <판타스틱>. 비록 3%를 넘기지 못할 만큼 아쉬운 성적표로 종료했지만, 단순히 시청률만으로 이런 드라마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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