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최악의 하루> 포스터. 이 영화는 '나'에 집중하여 관계를 성찰하는 작품이다.

영화 <최악의 하루> 포스터. 이 영화는 '나'에 집중하여 관계를 성찰하는 작품이다. ⓒ CGV아트하우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가 바라보는 나가 과연 '나'일까? 나의 취향, 지식, 인격, 기억 등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진정한 '나'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가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말이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진짜 자기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연애를 해봐야 한다고. 연애란 두 사람만의 내밀한 관계로 자기의 욕망과 민낯을 고스란히 내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한데 그 과정이 그리 녹록지 않다. 관계에서 비롯되는 크고 작은 갈등과 고통을 감당하기 두려운 우리는 관계에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이를 피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관계를 배제한 자아의 고립을 통해서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에리히 프롬은 저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 사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집착하는 인격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진정한 자아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역시 <데미안>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고로 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거짓말'이 갖는 의미

   은희의 남자 친구 현오는 선글라스와 마스크 등으로 자신을 감추고 나아가 은희와의 관계를 은폐하려고 한다.

은희의 남자 친구 현오는 선글라스와 마스크 등으로 자신을 감추고 나아가 은희와의 관계를 은폐하려고 한다. ⓒ CGV아트하우스


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는 한정된 공간인 남산과 서촌을 배경으로 주인공 은희(한예리)와 관련된 세 남자를 통해 관계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그런데 영화의 형식이 좀 특이하다. 마치 액자소설처럼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할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일본인 소설가 우헤다 료헤이(이와세 료)가 구상한 소설 이야기는 영화를 여닫는 문이자 영화 속 이야기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연극배우인 은희의 연기 역시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그녀의 연기와 현실 속의 '거짓말'이 기묘하게 겹쳐지면서 관객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무엇이 그녀의 진실인지 궁금증을 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은희의 '거짓말' 때문에 불거진 '관계의 파국'이라는 영화 속 주요 사건은 은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애초에 영화는 은희의 진실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은희의 거짓말이 왜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까? 은희가 거짓말을 하긴 한 걸까? 관객은 은희의 거짓말의 사실 여부를 파악할 수가 없다. (두 남자에게 한 이야기가 다르다는 사실에서 은희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저 은희를 알고 있는 두 남자가 입버릇처럼 은희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의심하기 때문에 관객 역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혐의를 두는 것이다.

은희의 거짓말에 대한 관객의 최초 의심은 그녀가 료혜이에게 한 말 때문이다. 료헤이는 무슨 일을 하느냐는 은희의 질문에 소설가인 자신을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은희는 이 낯선 일본인 소설가를 배려하기 위해 배우인 자신 역시 '(거짓말을 하는) 같은 직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간혹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혹은 친밀감을 공유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상대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상대와의 대화 및 관계를 좀 더 편안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은희가 료헤이에게 한 말은 두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선입견으로 작용한다.

관계에서 주도적이지 못한 그녀

  은희는 운철의 마음을 매몰차게 뿌리치지도 못하고 자꾸 자신을 만나려 되돌아오는 운철을 막지도 못한다.

은희는 운철의 마음을 매몰차게 뿌리치지도 못하고 자꾸 자신을 만나려 되돌아오는 운철을 막지도 못한다. ⓒ CGV아트하우스


그렇다면 은희는 현재 남자친구인 현오(권율)와 지금은 헤어진, 옛 연인이자 유부남인 운철(이희준)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 일견 두 남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단호함을 내보이는 은희가 수동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희가 관계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닌다는 인상을 준다.

현오가 바라보는 은희는 매번 거짓말을 하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아닌 다른 남자를 유혹하는 행실이 나쁜 여자다. 현오의 오해와 비난에 대해 은희는 해명하려 애쓰지만,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현오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은희의 욕망은 자신을 감추려는, 나아가 은희와 자신의 관계를 은폐하려는 현오로 인해 억압된다. 또한 현오는 은희를 엉겁결에 "유경아!"라고 잘못 호명함으로써 연인인 은희의 존재를 직접 부인하기까지 한다. 헌데 은희는 그런 현오에게 화를 내고 관계의 끝을 이야기하면서도 그의 변명에 귀를 기울이고 또다시 남산을 오른다. 은희는 현오를 통해 '어떤 사람'인가로 규정될 뿐만 아니라 관계를 주도하는 주체 역시 은희가 아닌 현오인 것이다.

운철과의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운철은 은희에게 유부남인 자신의 처지를 속이고 그녀를 만났음에도 그녀에 대한 미안함보다 자신의 괴로움을 우선한다. 자신을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그에게 은희의 마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과 이루어질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은희가 필요할 뿐이다. 해서 은희는 운철이 바라는 대로 사랑에 상처받고 아파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끈질기게 자신을 붙드는 그에게, 친구를 만나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거짓이라 의심하는 그에게, 그녀가 하는 말이란 고작 제발 좀 가달라고, 자신을 혼자 있게 해달라는 안타까운 호소일 따름이다. 이미 끝난 관계에서조차 은희는 주도적이지 못하다. 운철의 마음을 매몰차게 뿌리치지도 못하고 자신을 만나려 자꾸 되돌아오는 운철을 막지도 못한다.

  삼자대면 이후 엇갈리는 관계의 중심에 은희가 있음에도 두 남자는 더 이상 은희를 상관하지 않고 가버린다.

삼자대면 이후 엇갈리는 관계의 중심에 은희가 있음에도 두 남자는 더 이상 은희를 상관하지 않고 가버린다. ⓒ CGV아트하우스


은희가 두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삼자대면 이후의 상황을 통해 더 직접 드러난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현오와 운철에게 은희는 아무런 해명도, 변명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운철과는 이미 끝난 사이임에도 두 남자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던 그녀는 자신을 배제하고 함께 내려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다.

엇갈리는 관계의 중심에 은희가 있음에도 두 남자는 더는 은희를 상관하지 않고 버려둔다. 마치 관계의 파국을 초래한 것의 책임이 모두 은희에게 떠넘겨진 듯하다. 솔직하지 못했다는 거짓말의 혐의가 은희에게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현오는 유경이라는 여자와 바람을 피운 전적이 있고, 운철은 유부남이면서 이를 속이고 은희를 만났다. 거짓말의 혐의는 모두에게 있지만 유독 은희에게 비난이 쏠리는 것은 두 남자가 은희를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은희는 두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획득하기는커녕 연애의 대상이자 관계에 수동적인 객체로서의 자신을 확인했을 뿐이다. 어쩌면 은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이 관계에 이처럼 수동적일지도 모른다. 본래의 자아가 아닌, 상대가 기대하고 원하는 가짜 자아를 연출함으로써 상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이는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관계의 모순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

  료헤이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은희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료헤이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은희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 CGV아트하우스


이로써 영화의 무게 중심이 단순히 거짓말과 진실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 관계의 파국을 맞은 것은 은희의 거짓말이 아니라 관계에 내재하는 모순에 있었을 따름이다. 어찌 보면 은희의 거짓말은 이러한 관계의 모순을 표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소설가 료헤이가 구상한 이야기대로 곤경에 처한 한 여자가 결국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연기가 어색한 은희가 일상의 연기를 통해 '최악의 하루'를 보냄으로써 캐릭터의 대사에 감정 이입하여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일까? 물론 둘 다 다르다고 할 수 없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은희가 관계의 모순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는 게 아닐까?
이는 료헤이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드러난다. 은희는 료헤이와의 첫 만남에서 적극적으로 길을 안내하는 듯했지만 사실 길을 헤매는 료헤이의 처지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의 요구에 응했을 따름이다. 커피를 사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보이는 과도한 제스처는 오직 상대방인 료헤이를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관계의 파국을 맞은 후 어둠이 내려앉은 남산 위의 두 번째 만남에서 은희는 료헤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번도 끝까지 가본 적 없는 저기 언덕 너머로 같이 가보자고 말하는가 하면, 일본어를 들려달라고 하는 등 솔직하고 거침없는 욕망을 드러낸다. 그녀가 몸으로 말하는 거라며 추는 자유로운 춤사위는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이다. 그런 그녀에게 료헤이는 자신이 구상한 소설의 해피엔딩을 들려준다. 마치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은희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것 마냥.

  은희가 몸으로 말하는 거라며 추는 자유로운 춤사위는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이다.

은희가 몸으로 말하는 거라며 추는 자유로운 춤사위는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이다. ⓒ CGV아트하우스


영화는 은희의 거짓말과 연기를 교묘하게 배치하여 관객의 눈을 속이고자 했지만, 결국 은희의 자기모순이 아닌, 은희와 두 남자의 관계에 내재하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 은희에게 있어 두 남자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최악의 하루'는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최고의 하루'였던 셈이다. 은희가 한 거짓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단지 연기를 위함이었는지 혹은 영화 속 이야기가 소설의 내용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영화를 본 관객이 해석하기 나름일 테니. 중요한 것은 은희가 관계를 통해(정확히는 관계의 모순을 벗어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관계가 불가피할지 모른다. 하지만 타인의 기대와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없다. 자기의 진짜 생각과 감정, 의지가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이를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러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영화 속 은희처럼 말이다.

  은희는 료헤이가 이야기한 소설의 해피엔딩을 들으며 더이상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대상을 바라본다.

은희는 료헤이가 이야기한 소설의 해피엔딩을 들으며 더이상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대상을 바라본다. ⓒ CGV아트하우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진주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chongah7)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하루 김종관 한예리 권율 이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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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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