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정>에서 조선인 일본경찰 이정출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

영화 <밀정>에서 조선인 일본경찰 이정출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 극중 이정출은 항일 무장 혈전을 펼치는 의열단원들을 체포하면서 번민에 휩싸이는 인물이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최근들어 송강호는 꾸준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변호인>(2013)에서 1980년대 초를 경험한 그는 총기 잃은 조선의 왕(<사도>(2015))이었다가 독립 운동가를 잡아들이는 일본인 경찰(<밀정>, 2016)과 광주민주화 항쟁을 온몸으로 겪는 택시운전사(<택시운전사>, 2017 개봉 예정)가 됐다. 우연일까. 29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일부러 시대극만 택한 건 아니"라며 애써 에둘러 답했다.

'애써'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분명 그의 일련의 작품이 우연의 산물이 아닐 거라는 구체적 심증 때문이다. 데뷔 초반인 1990년 말부터 개성 넘치는 캐릭터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산 이후 어느새 송강호는 특정 인물의 내면을 깊이 표현하는 연기 대가로 자리매김 해 왔다. 시대극 속 역사 인물은 그의 행보를 구분 짓는 주요한 분기점이 되기 충분하다.

회색빛 인간

오는 9월 7일 개봉을 앞둔 <밀정> 속 이정출을 두고 송강호는 "회색빛 인간"이라 표현했다. 실제 이중간첩으로 활동했고, 그 역사적 평가가 분명치 않은 황옥이라는 인물을 극화한 캐릭터다. 영화에서 이정출은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이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정채산(이병헌 분), 김우진(공유 분), 연계순(한지민 분) 등을 접하며 마음의 변화를 겪는다. 이쪽도 저쪽도 아님을 강조하며 독립군들을 일갈하는 모습에서 이정출의 외로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연기하는 송강호 입장에서도 이정출의 변화를 표현하는 게 가장 큰 숙제일 법했다.

"이정출의 미세한 변화가 영화의 큰 축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정출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게 아니다. 김지운 감독님은 그 시대의 회색빛 인간을 통해 시대적 암울함과 슬픔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개연성 면에서 이정출의 변화가 자세하게 표현 안 돼 지적받을 수는 있다. 근데 만약 영화가 이정출에 대한 내용이었다면 그 내용이 크게 달랐을 거다. 그의 변화보다는 혼돈의 시기에 어떻게 사람들이 살았나가 더 중요했다.

어디서든 적응하는 미생물처럼 어떤 환경에도 적응하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변절도 쉽게 하는 거지. 그의 변화지점이 자세히 묘사됐다면 오히려 영화가 재미없을 거라 생각한다. 황옥의 행적 역시 모호한데 그가 명확한 독립투사였다면 연기하면서 더 부담스러웠을 거다. 그 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에 내 입장에선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얘기다. 상상의 여지가 생기니까."

 <밀정>은 일제시대 이중 간첩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김지운 감독은 "차가운 스파이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정출은 실존 인물이자 이중간첩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황옥을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앞서 언급한 시대극에 연이어 참여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실제 이야기다 허구다 그런 것보단 이야기가 얼마나 새로운가에 집중한다"며 "그러다보니 역사적 인물을 연기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뼛속까지 그는 배우였다. 다만 "SF보다는 역사물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라며 "삶을 반추하고 지혜를 얻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이정출을 연기하면서 마음의 무게감은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아픈 역사지 않나. 사극이 우리 조상의 모습을 재현하는 거라면 일제시대는 우리에겐 치욕이자 아픈 시기다. 그런 부분에서 독립투사의 삶과 근심, 희생에 대해 경외감이 든다."

이정출의 본질은 곧 마음의 빚

자연인 송강호 본연의 가치관을 묻는 질문엔 돌려 답했지만 영화에 대해선 분명한 생각을 전했다. <밀정>에서 이정출은 두 번 눈물을 흘린다. 재판정에서 한 번, 연계순의 시신을 보는 순간 한 번이다. "조국에 대한 마음의 빚"이 이정출의 본질이라며 송강호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정출이 연계순의 시신을 보고 오열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 속에서 그와 어떤 관계 성립이 없기에 그렇다. 그런 작은 개연성보단 영화는 큰 그림을 그렸다. 독립투사든 일제의 앞잡이든 시대의 아픔에 대한 무게감은 같다는 거다. 연계순이 마치 우리 민족 같았다. 힘없고 작은 존재. 카메라가 그의 작은 손만 보여주잖나. 고통스럽게 죽어간 작은 손을 보고 우는 건 여성 의열단원에 대한 연민보다는 그 작은 손 하나 잡아주지 못하고 구해주지 못했다는 것, 그게 우리 민족의 고통이라 생각했다. 연계순을 고문하던 이정출도 스스로 괴로워하잖나. 나의 동포, 우리 민족을 고통스럽게 해야 하는 게 고통스러운 거지."

 영화 <밀정>에서 조선인 일본경찰 이정출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

시대의 고통과 암울함. 송강호는 <밀정>이 한 개인의 변화를 담은 작품이 아닌 우리 민족이 처한 아픔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이해했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토록 정체성이 불분명한 인물을 송강호는 영화 초반부터 분명하게 관객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김우진과 처음 대면하는 장면이 바로 송강호가 <밀정>에서 가장 신경 써서 준비했던 부분이라니 꼭 기억하자.

시대적 고통을 느끼며 번민한 이정출의 모습을 김지운 감독이 포착했다는 게 놀라웠다. <악마를 보았다> 등에서 차갑고 분명한 캐릭터를 그려온 사람아니던가. 언론 시사 직후 감독에게 물었고, 김지운 감독은 "좀 변화가 있었다. 사람의 선함을 믿게 됐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기도 했다. 송강호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글쎄. 존재론적으로 그걸 생각해보진 않았다. 영화에 국한해서 생각하자면 잘못된 방향으로 살아온 분도 분명 이정출처럼 마음의 빚은 있을 거고, 삶의 태도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황옥이라는 분도 그랬을 거라 본다. 물론 그 시대만의 선은 분명 있을 거다. 사람은 아마 선하겠지? (웃음) 선해야지!

<밀정>의 마지막 대사가 마음에 남는다. 다시 보자고 하잖나. 그만큼 우리 인생은 지금 이 순간도 과정의 점이다. 사람은 바뀌고 변하고 또 채워진다. 그런 인생을 영화가 얘기하는 게 아닐까. 이정출이 다시 보자고 말하는 건 참 희망적이다."

 영화 <밀정>에서 조선인 일본경찰 이정출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

암울한 시대를 살았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분투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송강호는 희망을 쥐고 있었다. 그의 차기작은 광주민주화항쟁을 배경으로 한 <택시운전사>다. 이래저래 어두운 시대는 당분간 그의 배우인생의 화두가 될 전망이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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