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반공주의는 역대 보수 정권이 반대파를 찍어 누르기 위해 사용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참혹했던 기억은 전국민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 전쟁을 일으킨 것이 바로 공산주의 체제의 북한이었으니까요.

제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는 한국 전쟁이 끝난 지 30년 안팎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라, 반공주의가 여전히 잘 먹히던 때였죠.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 있는 광주민주화운동이 36년 전의 일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전쟁의 참화를 이용해 사회를 겁주고 억압했던 정권의 전략이 잘 통했던 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에 나왔던 반공 드라마 중에 인상깊었던 것은 KBS의 드라마 <전우>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국군 수색부대의 활약상을 극화한 드라마였는데, 황당무계한 설정도 많았지만, 이야기 자체는 꽤 재미가 있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물론 극 중 주인공인 선임하사는 절대 죽지 않는 만능 슈퍼맨 같은 존재였고, 북한군들은 모두 여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고 달려드는 수캐들로 그려지곤 했지만요.

반공 콘텐츠 이상의 무엇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한 장면. 장학수(이정재)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북한군에 잠입하여 인천 앞바다의 기뢰 배치도를 확보하려 한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한 장면. 장학수(이정재)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북한군에 잠입하여 인천 앞바다의 기뢰 배치도를 확보하려 한다.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드라마 <전우>처럼 선명한 흑백 논리에 기반을 둔 반공 콘텐츠로서, 1980년대 할리우드 싸구려 액션 영화 식의 재미는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초중반까지 액션 장면들만 놓고 보면 속도감이나 스릴이 괜찮은 편입니다. 여름 시즌 경쟁작인 <부산행>의 전반적으로 엉성한 액션 연출에 비하면 확실히 나은 편이지요.

그러나 150억이 투입된 장편 극영화라고 하기에는 전체적인 구성이 너무 헐겁고, 캐릭터들은 종잇장처럼 얄팍하게 느껴지며, 전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합니다. 감독의 전작 <포화 속으로>도 비슷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초반부에 보여준 열차 장면의 박진감이나, 림계진(이범수)이 장학수(이정재)의 정체를 의심하는 시퀀스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서스펜스는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중간 과정을 무모하게 생략하고 징검다리 건너뛰듯 하는 구성입니다. 마치 6부작쯤 되는 드라마의 스페셜 하이라이트 편집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렇게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스파이물과 전기 영화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장르를 화학적 결합 없이 그냥 섞어 놓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앞뒤의 짜임새가 중요한 스파이물의 호흡을 맥아더(리암 니슨)가 등장하면서 뚝뚝 끊어 놓습니다. 한 마리 토끼도 잡기 힘든 사냥꾼이 두 마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못 잡는다는 얘기는 이 영화에 아주 딱 들어맞습니다.

게다가 중반부 이후부터 뜬금없이 등장하는 억지 감동을 위한 장면들은, 극의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시켜 완결성을 크게 해칩니다. 그 순간부터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감동을 유발하려는 감독의 뻔한 연출을 지켜봐야 하는데, 그게 참 고통스러워요. <내 머릿속의 지우개>나 <포화 속으로>에서도 그랬지만, 확실히 이재한 감독은 인간의 진실한 감정을 다루는 장면보다 냉정한 계산이 필요한 장면들을 더 잘 찍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한 장면. 리암 니슨이 맡은 맥아더 장군은 그나마 이 영화에서 제일 잘 구축된 캐릭터이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한 장면. 리암 니슨이 맡은 맥아더 장군은 그나마 이 영화에서 제일 잘 구축된 캐릭터이다. ⓒ CJ엔터테인먼트


이 영화의 주요 인물인 맥아더. 장학수, 림계진은 모두 꽤 드라마틱한 설정을 지닌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선악 구도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주어진 역할만 기계적으로 수행할 뿐 도무지 인간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나마 맥아더는 속내를 밝힐 기회라도 있기 때문에 나은 편이지만, 장학수의 과거 이야기는 지나치게 드라마틱해서 리얼함이 떨어지고, 림계진의 내면은 가끔 등장하는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통해 어림짐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이런데 나머지 인물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한두 문장으로 설명되는 존재 이상으로 묘사되질 않습니다. 그저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사용될 뿐이죠. 각각의 캐릭터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싸움을 붙이고, 죽어 나가게 합니다. 모든 배우가 고생하고 열연했음에도, 이 영화의 후반부가 주려고 했던 감동이 전혀 와 닿지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통 전쟁 영화라고 하면, 누구나 생생한 전투 장면을 맨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 영화의 핵심은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행위가 바꿔 놓은 인간의 운명을 고찰하는 데 있습니다. 전투 장면의 물량 공세 이면에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다면, 그런 영화는 빈 껍데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후반부의 감동 유발을 위한 가족 - 혹은 유사 가족 - 관계 이외의 다른 인간관계들은 전혀 다루지 않지요. 그 흔한 전우애도, 자기와 비슷한 존재에 대한 애증 같은 것도 없어요. 이런 면에서는 1980년대 드라마인 <전우>가 오히려 이 영화보다 낫습니다. 병사들의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 감정인지 알려 주었고, 덧없는 죽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전쟁의 허망함을 느끼게 해 줬으니까요.

결국 <인천상륙작전>이 가진 모든 문제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이념 - 그것도 단순무식한 1970~80년대식의 반공주의 - 에 사로잡혀 있는 데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의의와 성공 과정을 요약하고 맥아더 영웅 만들기에 골몰하면서, 나머지 모든 요소는 값싼 재미와 감동으로 치장하기 위해 동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려고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극장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TV에서 해줄 때, 밀린 집안일이나 하면서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아마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건성으로 보는 것이 이 영화를 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인천상륙작전>의 포스터. 인간의 진실한 감정이나 운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낡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인천상륙작전을 설명하는 데에만 열중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극장에서 보기에는 시간과 돈이 아깝다.

<인천상륙작전>의 포스터. 인간의 진실한 감정이나 운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낡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인천상륙작전을 설명하는 데에만 열중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극장에서 보기에는 시간과 돈이 아깝다. ⓒ CJ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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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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