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은 늘 어렵다. 내가 A라는 선택지를 선택했을 때 잃어버리는 B·C·D의 기회비용이 크다거나, 선택에 투자할 시간이 부족해 촌각을 다퉈야 한다면 더 그렇다. 물론, 일반적인 삶에선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릴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전쟁터·분쟁지역은 다르다. 매 순간 자신의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이 크다. 자신 혹은 타인의 목숨이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혹은 평화 등 관념적인 것들이 기회비용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분쟁 시절(넬슨 만델라가 이끌던 ANC와 잉카타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다.)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뱅뱅클럽>은 엄청난 것들을 포기하며 '순간·현장'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통해 전쟁을 멈추고 기아를 해결하는 포토저널리스트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상실하고 싶지만 상실할 수 없는 것

 영화 <뱅뱅클럽>의 한 장면.

포토저널리스트의 사명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도 셔터를 누르는 걸까. ⓒ (주)에스와이코마드


108분의 런닝타임 동안 포토저널리스트 케빈 카터, 그렉 마리노비치, 켄 오스터브룩, 주앙 실바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있다. 영화 포스터에 새겨진 '기록의 순간' '순간의 기록'이라는 문구처럼, 발생하는 사실을 매 순간 기록하기 위함이다. 사진을 통해 현장과 순간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통해 평화 혹은 기근의 종말 등을 추구하는 것이 포토저널리스트의 사명이자 목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그들의 '사진찍기'는 냉정해 보였다. '사람'이 죽는 현장을 보고 감정의 미동도 없었다. 길거리에 방치된 시체 사진을 찍으면서 "그림자 진다 비켜"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듣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비켰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총격전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총소리에 고개 숙이며 뛰어다니면서도, 찰나의 사진을 찍을 땐 미소 지으며 찍는 장면도 나온다.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 생각은 바뀌었다.

공감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상실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감추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항상 밝은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던 케빈 카터는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에 떤다. '자기 자신이 죽는 꿈' '누군가 내가 죽는 순간에 카메라를 줌인하는 꿈'을 꾼다고 두렵다고 한다. 두려움에 못 이겨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한다. 피사체를 찍었던 기억들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찰나에 무의식에 잠재된 기억들이 케빈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렉 마리노비치 역시 마찬가지다. 한밤중 전화를 받고 달려간 현장에서 사망한 어린 흑인 아이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셔터를 누른다. 같이 달려간 여자친구 로빈에게 퉁명스럽게 전등을 쥐여주며 "잘 보이게 들고 있어 봐" "자꾸 흔들지 마"라는 말을 한다. 로빈은 냉정하게 사진을 찍는 그렉을 향해 울먹이며 "같은 인간(人間)으로 안 보는 거 같아"라고 말한다.

그렉은 거기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사진 찍는 거 말고 아무것도 없다고"라고 한다. 그리고 역시 괴로워한다. 영화는 케빈과 그렉을 비롯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이야기를 통해 태어날 때부터 내재하여 있는 '공감능력'이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를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노출해준다. 자신의 공감능력을 포기하고 얻은 대가가 포토저널리스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관객이 스스로 생각게 하는 것이다.

눈앞의 생명, 그리고 사진의 파급효과

 영화 <뱅뱅클럽>의 한 장면.

영화 <뱅뱅클럽>의 한 장면. 그들은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 (주)에스와이코마드


영화에선 퓰리처상을 받은 두 장의 사진이 찍히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렉 마리노비치가 찍은 <횃불이 되어버린 사람>(1991)과 케빈 카터가 찍음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1994)이다. 두 사진 모두 찍는 이들의 고뇌가 담겨 있는 사진이다.

그렉 마리노비치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걸고 <횃불이 되어버린 사람>을 찍었다. 그렉은 남아프리카 스웨토에서 ANC 지지자들의 폭력에 노출된 흑인 린제이 차발랄라를 보게 된다. ANC 지지자들은 큰 칼과 돌, 자신의 육체를 통해 무자비하게 린제이 차발랄라를 공격한다. 그렉은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폭력을 휘두르나"라고 한다.

폭력을 휘두르던 ANC 지지자 중 한 명이 그렉에게 "사진이나 찍어"라고 한다. 그렉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렉은 "폭력을 멈추면 그때 사진을 찍겠소"라고 한다. 하지만 폭력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린제이 차발라라 몸에 불이 붙는 지경까지 이른다. 급기야 한 ANC 지지자가 불붙은 린제이 차발랄라 머리에 칼을 꽂는다. 이 장면이 그렉의 카메라에 담겼다. 먼발치에서 카메라 줌인을 하며 지켜보던 다른 기자와 달리 그렉은 살인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현장을 찍었다. 자신의 사진을 통해 분쟁에서 배태되는 잔인한 폭력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쓰러져있고, 그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가 담긴 사진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은 수단에 전 지구적인 기아해결 지원이 쏟아지게 한 사진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왜 독수리를 내쫓지 않았느냐?' '왜 그 아이를 돌보지 않았느냐'라는 손가락질이 쏟아져 케빈 카터를 괴롭게 했다. 케빈은, 아이가 죽기 기다리는 독수리를 내쫓지 않고 기다리다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물론, 사진을 찍은 후에 독수리를 멀리 내쫓았다고 했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케빈 카터는 소녀를 곧바로 돌보지 않은, 자신이 포기한 기회비용 때문에 괴로워한다. 자신의 사진이 끌어낸 전 지구적 지원과 기아에 대한 인류의 인식 재고는 그의 심적 안정에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영화도 현실도 그는 괴로워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후회할 걸 알고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뒤늦게 말하지만, 영화 <뱅뱅클럽>은 한 여성 진행자가 케빈 카터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나요"라고 질문하며 시작한다. 케빈 카터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영화는 페이드 아웃 되고, 남아공의 현장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질문을 받던 케빈 카터가 다시 나와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한다.

"좋은 사진이라 함은 논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단순한 풍경 사진이 아니니까요. 분쟁지역에 나가서 온갖 악한 것들을 보다 보면 사명감이 생깁니다. 사진으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 하지만 되려 소식을 전하는 것에 비난을 받을 수도 있죠."

영화를 보는 내내 만큼은 그들이 관객의 피사체가 된다. <뱅뱅클럽>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사명감 하나로 셔터를 누르는, 인간으로서의 원초적 공감 능력을 억제하고 자신의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셔터를 누르는 포토저널리스트들을 생각게 한다.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게 한다.

 영화 <뱅뱅클럽> 포스터. 그들은 오늘도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

영화 <뱅뱅클럽> 포스터. 그들은 오늘도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 ⓒ (주)에스와이코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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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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