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 PD수첩 >. 여성들은 왜 10번 출구 앞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MBC < PD수첩 >. 여성들은 왜 10번 출구 앞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 MBC


내가 사는 집 앞에는 센서가 켜지지만, 그 센서가 켜질 때까지 몇 미터의 거리는 늘 어둡다.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 그날따라 방심했던 나는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남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도 나를 보고 놀란 듯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언제라도 다른 의미로 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후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핸드폰의 손전등을 밝히고 시끄러운 벨소리가 울리는 애플리케이션을 준비한다. '성적 정체성'을 운운하기에 민망한 나이가 된 지금도 여전히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약자의 본능이 드러난다. 지난 세월동안 여성으로서 학습돼 온 본능적 두려움 때문이다.

사건 이후 분출된 여성들의 분노, 이유는?

지난 7일 MBC < PD수첩 >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계기로 수면 위로 올라온 여성 혐오 문제를 다룬다. 사건 이후 강남역에서 벌어진 사태를 조명한 다큐는 강남역 10번 출구를 가득 메운 포스트잇에 드러난 여성들의 공포를 통해, 왜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특정한 반응을 보이는지를 묻는다. 즉, 강남역에서 죽어간 그 여성이 특별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공포와 분노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최근 한국 사회에는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 살해)'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그 예로 부산에서 벌어진 폭행을 제시한다. 장애3급의 한 남성이 부산 거리의 가로수 지지대를 뽑아 여성 둘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하지만 실제 범죄자 분포수를 보면 정신 장애를 가진 범죄자는 2.6%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병으로 인해 자아가 취약하고, 사회적 편견이나 관습에도 취약해 쉽게 사회적 인식을 내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맞을 짓을 했다"는 부산의 폭행범이나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장애가 됐다"는 강남역 여성 살해 가해자의 인식은 한국 사회가 가진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내재화한 전형적인 예시다. 이들의 망상 또한 사회적 맥락을 갖는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치안이 잘 돼 있는 국가에 속한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그 양상은 달라진다.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95% 이상이 남성인 반면, 피해자의 84.7%가 여성이라는 통계는 여성이 얼마나 범죄에 취약한지를 드러낸다. 더구나 해가 거듭할수록 여성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 늘어나고 그 불안감은 일상적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 범죄는 해마다 늘어나고, 수락산 등산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처럼 범죄가 발생하는 장소가 길거리나 일상적으로 방문하는 장소이기에 여성들의 공포는 더 커진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남성들이 공감할 수 없는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의 근원은 남성과 여성이 일대일로 맞섰을 때 여성이 느끼는 신체적 불리함에서 온다고 말한다. 또한 성폭행 가능성이 여성들을 수세적으로 만든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 불리함을 넘어,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이수정 경기대 범죄 심리학과 교수)" 문화라고 다큐는 짚는다. 즉,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단편 <체체파리의 비법> 중)"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표현처럼 말이다.

여기에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사회적 약자가 더한 약자에게 불안을 투사하는 사회적 심리가 범죄로 나타난다고 덧붙인다. 즉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별이 불평등하고 인종 차별적이며 성소수자에게 관용이라고는 없는 차별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여성 혐오 범죄? 테러로 간주해야

 여성혐오 범죄는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테러로 간주해야 한다.

여성혐오 범죄는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테러로 간주해야 한다. ⓒ MBC


이에 범죄학자들은 여성을 대상으로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일련의 혐오성 범죄들을 그저 우발적인, 특수 범죄로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테러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강력하게 일벌백계해야 할 뿐 아니라 사회로부터 완전 격리를 시키는 등 범죄에 대한 경고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실제 같은 성범죄임에도 미국에 비해 한국의 처벌은 너무 가볍다.

이는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다큐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훈방 등으로 풀려난 경범죄자에 사회 복귀, 융화 프로그램도 철저히 시행해 재범을 방지해야 한다. 최근 벌어진 신안군 성폭력 사건의 범인이 대전에서도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었듯이, 사후 약방문식 현 범죄 예방 프로그램의 허상을 놓치지 않는다.

수요자 중심의 치안 활동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된다. 2013년부터 실시된 여성 안심 귀가길 프로젝트는 실제 위기 대응에서 취약하고, 그저 CCTV 설치나 남녀 화장실 분리 등 물리적 해결만으로는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이 해결될 수 없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다큐의 결론은 차별금지법으로 나아간다.

이미 선진국들에서 통과된 이 차별금지법이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보수 기독교 단체의 반대에 따라 또 다시 철회된 현실은 한국 사회의 차별적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성폭력으로 죽은 여성을 위해 이탈리아 사람들은 붉은 천 달기 운동을 벌였지만, 자신들이 느끼는 공포를 드러낸 한국의 강남역 추모 물결은 '여혐'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 괴리는 곧 한국 양성 평등의 현위치를 드러낸다.

그래서 여성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인 이 법안은 한국 사회 양성평등 문화의 제도적 안착을 위한 첫 삽이 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또한 스토킹 방지법 역시 서둘러 통과돼야 한다고 덧붙인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이후 미디어는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이 사건과 관련된 입장을 밝히고 그 맥락을 분석했다. 지난 7일 < PD수첩 >은 이 일련의 흐름을 시의적절하게 반영하고, 사회에 잠재된 불평등 문화라는 관점까지 끌어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또한 차별금지법과 스토킹방지법이라는 제도적으로 불평등을 보완할 수 있는 법으로 결론을 냈다는 점은 백가쟁명식 토론에서 한 발 앞선 모습으로 보인다. 한편, < PD수첩 >은 사건이 일어나면 '만취녀', '부킹녀' 등으로 설정하는 언론들의 피해자 귀책 프레임에 대한 자기 반성도 놓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피디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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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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