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향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라는 동명의 장편소설을 2006년, 톰 튀크베어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개봉 당시에도 영화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 지난 5월 중순에 재개봉했다.

이번에 특별히 영화를 다시 보며 느낀 것은, 작가 혹은 감독이 주인공의 행적을 다루면서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행적을 상정하여 그에 대비되는 방식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다. 몇 가지 심리학적, 종교적 상징 코드로 풀어보자.

주인공 이름의 비밀

 예수는 세상의 대속을 위해 죽었지만, 그르누이는 자신을 위해 죽는다.

예수는 세상의 대속을 위해 죽었지만, 그르누이는 자신을 위해 죽는다. ⓒ (주)누리픽쳐스


<향수>의 주인공 이름은 장 밥티시트 그르누이(벤 위쇼 분)다. 불어 이름 그루누이(Grenouille)는 개구리라는 뜻이다. 개구리는 성체가 될 때까지 알에서 올챙이로, 그리고 개구리로 계속하여 변신을 거듭한다. 이 때문에 고대 신화에서는 탄생과 재생, 부활의 상징을 갖는다. 고대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들고 있는 개구리 형상이 바로 이런 상징성 때문이다.

밥티스트는 'Baptist' 즉 '세례(洗禮)를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Christ)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장(Jean) 또한 영어로는 존(John), 즉 세례 요한을 상징한다.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이 성경에 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자신에게 자신이 만든 향수로 스스로에게 세례를 주는 주인공 그루누이의 모습을 연상하면 왜 이름을 세례 요한과 똑같이 장 밥티스트라고 지었는지 알 수 있다.

주인공의 출생 장소와 신분의 비밀

 이 영화는 향수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매우 신선한 방식으로, 그러나 다소 끔찍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향수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매우 신선한 방식으로, 그러나 다소 끔찍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다. ⓒ (주)누리픽쳐스


그르누이가 태어난 곳은 파리의 음습하고 악취나는 생선 좌판대 밑이다. 그루누이는 매독에 걸린 젊은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나는데, 태어나자마자 생선 내장과 함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게 된다. 이 역시 예수의 탄생과 대비된다. 예수는 예수살렘의 누추한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역시 마리아라는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난다(필자 역시 크리스천이나, 논지 전개상 객관적인 문체를 유지하는 것이므로 신성모독 등의 오해는 없기 바란다).

물론 그르누이의 친모는 그를 생선쓰레기 더미위에 버렸다가 영아유기죄로 교수형에 처해지는 데 반해서, 예수의 생모 마리아는 성모(聖母) 마리아로 추앙받으며 승천(昇天)한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루누이와 예수의 출생지가 비천한 곳이었다는 것은 통상의 영웅신화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비천한 곳에서 아버지 없이 태어난 영웅이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찾고 세상을 구원하는 전개로, 초기 설정을 닮았다.

다만 그르누이는 그 아버지가 향수로 대체되었고, 예수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에 의해 그 자신이 아버지이므로 예수의 일생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르누이와 예수의 지향점, 스타일의 차이

그르누이는 향수라는 유형의 물질에 집착한다. 자신을 구원할 도구로 유형의 물질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세상을 구원할 도구로 '사랑'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사람들이 가질 것을 설파한다.

특별히 차이가 나는 것은 집착의 문제이다.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예수는 집착이 아니라 '내려놓는' 삶을 중시하는 일생을 살다 갔다. 한편 그르누이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겠다는 엄청난 집착(執着)을 갖고 살인도 마다않는, 고행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집착의 일생을 산다.

죽는 장소와 죽음의 의미

예수는 자신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세상 모든 죄를 덮어쓰고(?)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贖罪)하면서 위대한 대속자(代贖者)로서의 일생을 마친다.

그르누이 역시 고향 오를레앙으로 돌아온다. 오를레앙은 주지하다시피 프랑스의 성처녀 잔다르크의 고향이다. 프랑스를 구원한 잔다르크의 고향을 주인공 그르누이의 고향으로 설정한 것은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다.

물론 예수는 세상의 대속을 위해 죽고, 그 이름은 만세에 길이 전해져 오지만, 그르누이는 자신을 위해 죽고, 사람들에게 먹혀 죽는 기괴한 방식의 죽음을 택한다. 물론 자신이 만든 향수가 사람들에게 먹혀서 유전될 거라는 상징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예수와 그루누이의 구원의 대상도 다르다. 구원의 대상 역시 예수는 착한 백성, 즉 고통받는 어린 양이다. 예수는 이들을 푸른 초장(草場)과 시원한 물가로 인도하겠다는 선한 목자(牧者)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르누이는 사탄같은 존재인 자기 자신의 구원이라는 것에 집착하여 자신의 몸에 기름이 아닌, 자신이 만든 향수로 자기세례를 한다. 특히 예수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보편적인 사랑을 지향했다면, 그르누이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선한 이웃까지 무차별 살인하는 야만을 보인다.

숫자 13의 의미

 불멸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그르누이는 13명의 처녀들을 죽인다.

불멸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그르누이는 13명의 처녀들을 죽인다. ⓒ (주)누리픽쳐스


영화에서 그르누이는 불멸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13명의 무고한 처녀들을 살해한다. 이 13이라는 숫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다. 특히 서양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숫자로써,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르누이의 행동을 선한 의도로 포장하고 싶었다면 럭키 세븐의 7로 설정하였을 것이다(당연히 궁극적으로는 살인도 하지 않은 것으로 설정했을 것이지만).

이 영화는 향수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매우 신선한 방식으로, 그러나 다소 끔찍하고 그로테스크한 배경을 채택하며 몰입도 있게 그려낸다. 

보이지 않는 향수의 향기, 즉 후각적 요소를 시각적으로 영상화해내는 감독의 연출방식도 탁월하지만 주인공을 비롯한 출연자들의 연기도 일품이다. 여기에 더하여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상징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영화를 본다면 흥미진진하게 더욱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진국 기자의 페이스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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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심리학자. 의학자) 고려대 인문 예술과정 주임교수 역임. 융합심리학연구소장(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현)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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