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또 하나의 알츠하이머 이야기인 줄 알았다.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망연자실한 주인공 박태석 변호사 역 이성민의 표정에 "사라질수록 소중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라는 대사가 더해지니, 잘 나가던 변호사가 기억을 잃는 불행에 빠지는 이야기인가 보다 했다.

최근 SBS <리멤버-아들의 전쟁> 유승호와 tvN <풍선껌> 배종옥이 알츠하이머를 연기했기에, 후발주자 <기억>은 소재의 신선함을 주지 못했다. 더구나 대뜸 극 초반부터 주인공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자, 무거운 드라마를 즐기지 않는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전작 <시그널>이 큰 화제를 모았기에, 후속작 <기억>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에 <기억>의 시작은 신선하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알츠하이머가 다 아니었다

 <기억>에서 박태석 변호사를 연기한 이성민. <기억>은 그렇고 그런 알츠하이머 드라마가 아니었다.

<기억>에서 박태석 변호사를 연기한 이성민. <기억>은 그렇고 그런 알츠하이머 드라마가 아니었다. ⓒ tvN


하지만 오판이었다. <시그널>이 2016년의 역작이었다면, 그 후속작 <기억>은 걸작이라 할만했다. 다만 그 진가를 풀어헤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처음엔 그저 블록의 조합이다가 어느 틈에 빈틈없는 구조물이 되는 블록 집짓기처럼, <기억>은 어느 틈에 비집고 들어갈 빈틈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작품의 실체를 드러냈다. 마치 안갯속을 헤매다가 드러난 거대한 성채처럼.

2014년 세월호 참사 이래, 많은 드라마가 이 사건을 복기해 왔다. 벌건 대낮, 모두가 손 놓고 숱한 생명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그 참사가 그저 우연히 벌어진 사고가 아니라 그간 대한민국이라는 급행열차가 가져온 필연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고 작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이야기했다.

로맨틱 코미디 속 군인조차 국가의 의무를 훈계하는 세상. 드라마 속 영웅적 주인공들은 저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제도에 대항하여 자신을 던졌다. 그를 통해 드라마들은 우리 사회의 구조화된 정치와 법률, 그리고 자본의 부적절한 관계를 고발했다.

저마다의 목소리는 높았고 문제의식은 분명했지만, 그 해법은 오리무중이었다. 악이 전횡을 펼치는 '고구마' 전개를 반복하다, 어설프게 '사이다' 한 잔을 제시하는 식이었다. <용팔이> <리멤버-아들의 전쟁>이 그랬다. 하지만 그 시원한 사이다의 뒷맛은 짧았고, 뭔가 쳇바퀴를 돌 듯, 정의와 악에 대한 응징 자체가 클리셰가 되어 갔다.

클리셰 된 정의의 승리, <기억>의 조금은 다른 이야기

 <기억>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속물 변호사 박태석을 통해, 그다지 새롭지 않은 '정의의 승리'라는 결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기억>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속물 변호사 박태석을 통해, 그다지 새롭지 않은 '정의의 승리'라는 결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 tvN


그저 잘 나가던 변호사의 알츠하이머로 시작된 <기억>. 태석의 아들 동우의 미제 뺑소니 사건을 풀어나가며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권력 카르텔을 드러내는 방식은 이미 앞선 드라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법조계 3세의 교통사고, 그리고 재벌 3세의 살인 사건까지 이어지는 부도덕한 상류층의 민낯 역시 익숙했다.

하지만 <기억>은 변호사 박태석을 통해, 그다지 새롭지 않은 이 담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상처 입고 트라우마에 갇힌 자가, 그 상처를 극복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시작과 희망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속물 변호사 박태석이라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우리 자신을 위해 싸워야 한다

TV에도 출연하는 대한민국 최고 로펌 태선의 파트너 변호사 박태석. 그는 재벌인 한국그룹의 뒷배를 봐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처 나은선(박진희 분)은 그를 사람 취급도 안 하지만, '성공적'인 삶에 신바람이 나 있던 그에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청천벽력이다. 하지만 그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만난다.

이제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지난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했다. 병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동안,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비겁하게 잊으려고만 했던 과거의 아픈 기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제대로 된 아버지로, 변호사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서울 것 없는 그의 싸움은 오랫동안 그가 반목해 왔던 자신의 삶을 비로소 제대로 보고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네 자의 사자성어로 귀결될, 16부에 이르는 박태석의 싸움은 그저 아들의 죽음을 밝히는 묵은 해원, 복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병을 '축복'이라고 말하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지난 잘못을 바로잡는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기억>은 단지 부조리와 부도덕을 대상화해 싸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범인으로 추정된 인물의 자살 앞에 분노하던 박태석과 전처 나은선은, 15년간 한시도 잊을 수 없던 아들 동우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진 순간, 범인 이승호(여회현 분)를 보내준다. 자신들의 사랑하는 아들 동우가, 누군가의 짐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밝혀줄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두 부부의 의지는, 아직도 진실을 향해 목놓아 소리치는 거리의 부모들의 진짜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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