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의 포스터

영화 <동주>의 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 이 글에는 영화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동주>는 우정에 대한 작품이다. 우정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원초적 모습을 형상화 하는 영화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인 <사도>가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적 관계를 보여줬다면, <동주>는 두 청년의 숙명을 드러낸다. 시대적 배경을 벗어날 수 없는 건 두 영화 다 마찬가지다.

<동주>엔 조선어 사용 금지와 창씨개명, 학도지원병제도가 주요 사건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키고(1938년), 창씨개명(1939년)을 단행하면서 점차 확대된다. 작가들에겐 치욕적인 만행이었다. 이 당시 전 국민의 약 14%는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또한 일본은 군대보충을 위해 지원병제도(1938년), 징병제도(1943년), 학도지원병제도(1943년)를 실시한다. 학도병지원제도로 인해 약 4500명의 학생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일제말기까지 모두 합하면 1백만 명 이상이 전쟁을 위한 노역을 명목으로 끌려갔다.(도서 <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영우, 경세원, 2007. 참조) 

이러한 시대 조류 속에서 윤동주는 송몽규를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했고, 송몽규는 순수한 윤동주가 그 자체로 남기를 원했다. 서로에 대한 결핍은 우정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하나로 동화한다. 동주는 몽규를, 몽규는 동주를 사랑한 게 아니던가. 우정의 속성은 사랑과 중첩된다. 

일란성 쌍둥이 같은 동주와 몽규

 영화 <동주>의 한 장면.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아가며 우정의 원형을 그려냈다.

영화 <동주>의 한 장면.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아가며 우정의 원형을 그려냈다. ⓒ 루스이소니도스


소크라테스는 <뤼시스>에서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한다. 책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혜로움과 좋음이었다. 동주에게 몽규는 지혜로움의 전형이었다. 몽규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교토제대에 합격한다. 동주는 그러지 못했다. 반면, 몽규에게 동주는 순수함이다. 동주에게 던진 "니는 계속 씨를 쓰라"는 말은 동주가 순수한 문학 영역에 계속 남아 성장하길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라는 영역에서 동주는 지혜롭다. 능력이 있고 탁월한 것이다.

몽규는 저항하는 운동가의 삶을 산다. 매우 적극적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몽규의 행동은 좋음으로 나타난다. 나라가 있어야 문학이 있고, "문학의 좋음은 나라를 되찾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몽규는 말한다. 문학의 유용성이다. 그런데 동주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한다. 다만, 동주의 고뇌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저항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주 역시 좋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좋음은 순수함에 기반 한다.

결국 몽규와 동주는 서로의 부족함을 반추하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 만약 서로가 비슷한 기질을 가졌거나 완벽히 반대되었다면 우정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둘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지혜로움과 좋음을 서로 조금씩 나눠 가진 것이다. 한 마디로 '일란성 쌍둥이' 같다. 외면적 성격은 매우 다르지만 두 사람이 지향했던 점은 흡사했다. 마지막에 이 두 명을 교차 편집하는 장면은 마치 두 개의 강줄기가 바다에서 하나가 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작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시를 쓰는 동주

시를 쓰는 동주 ⓒ (주)루스이소니도스


영화가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저항과 순수라는 화법은 과연 작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이러한 논쟁은 1960년대 순수참여논쟁으로 이어진다. 아마 이 논의는 여전히 수많은 작가들을 괴롭히는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단,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윤동주 시인이 저항 시인이냐 아니냐를 따져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분명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투명한 인식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개인의 성찰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무기다.

장석주 시인은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중앙북스, 2015)에서 "무엇보다도 글쓰기란 제가 지핀 불에 스스로 몸을 태우는 다비식"이라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따져 묻고, 자의식에 대한 투명한 인식에 이른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고 적었다. 글쓰기는 엄청 힘들 일이라는 것을 적시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1940∼)를 인용해 글쓰기는 결국 궁극적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일임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측면에서 국민 시인으로 각광 받고 있는 윤동주 시인이야말로 역사적 다비식을 거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몽규와 동주를 대비시킬 필요는 없다. 몽규는 행동하는 작가였고, 동주는 성찰하는 작가였다. 영화 말미에 몽규의 시도가 실패하고 동주에게 고향으로 같이 떠나자고 했을 때, 상황은 역전된다. 동주는 잠시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행동에는 응당 성찰이 필요하고, 성찰을 하다보면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둘은 모두 성찰하고 행동하는 작가였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다. 

두 남성성에 기댄 점 아쉬워

영화 <동주>는 수채화 같은 촬영과 한 편의 수필 같은 시나리오로 인해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발걸음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동주의 시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은밀한 일기와 같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내야 했던 수많은 청년들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리 멀지 않은 관계 속에 있다. 

하지만 영화는 동주와 몽규를 부각시키면서 주변 인물을 소홀히 했다. 특히 여진과 쿠미라는 여자들은 영화 전체 얼개 속에서 어정쩡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대게 두 인물, 특히 두 인물의 남성성에 기댄 영화가 많다.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와 박중훈, <사도>의 송강호와 유아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황정민과 차승원, <왕의 남자>의 감우성과 이준기까지. 최근 한국 영화가 유명한 두 남성 배우 중심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두 배우의 카리스마 대결만으로 관객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기엔 불충분하다.


덧붙이는 글 리뷰입니다.
동주 박정민 윤동주 송몽규 이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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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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