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귀향>의 포스터.

영화 <귀향>의 포스터. ⓒ 와우픽쳐스


십여 년 전, 일본을 방문하고 와서 쓴 글이 있다. 이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올해 1월, 며칠간의 일본 여행 중에 일본의 A급 전범 위패 안치와 총리의 참배로 뜨거운 정치적 논란이 그치지 않는 야스쿠니 신사 등을 처음 찾아가 보았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그곳에서는 조선과 중국의 희생자를 일본의 군견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일본 극우들의 사고가 짙게 반영된 동상과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 주변에는 거의 매일 재일 조선인을 배격하는 극우 단체들의 시위 차량이 조선인들 물러가라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때 총독부를 설치해 우리의 심장을 내려다보던 일제가 자신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신사를 내려다보는 건물을 조선 민족이 차지하여 굽어보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중략)

재일 조선인 학교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는 여학생들을 보았다. 야스쿠니가 뿜어내는 제국주의의 기운과 치마저고리를 입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여학생을 겹쳐서 생각하다 보니 일제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특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박완서 소설 <그 여자네 집>의 주인공 만득이와 곱단이의 인생사가 차례로 스쳐가더니 그 가운데서도 한민족의 고통에 여성으로서 고통을 더하여 겪었을 곱단이가 내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소설에서 만득이의 입을 빌려 분단의 슬픔을 일깨우고 반성 없는 일제의 현재를 비판하는 작가의 의도도 생각났지만, 그 속에서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연인 만득이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 여인이 돼 버린 곱단이의 삶의 행방이 더 궁금해진 까닭이다.

평소 민족 문제에 관심이 많던 나는 그 단원을 가르칠 때만다 민족의 현실과 가치만을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올해는 민족 학교에서 보았던 여학생들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으면서 민족의 아픔 속에 잊힌 여성의 아픔을 더해 생각해 보았다. 그 <여자네 집>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그 여자들의 생애를 더듬어보면서...

혼이 돌아오다

<그 여자네 집>이라는 소설을 가르치던 당시 쓴 글의 일부다. 이 소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삶을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징용으로 끌려간 만득이와 곱단이의 사연이 순애라는 여자를 매개로 슬프게 어우러진 소설이었다.

당시 이 소설을 가르치면서 난 일본의 역사적 사죄를 요구하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이용수 할머니 영상을 보여주거나 강산에의 <라구요>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실향민의 아픔을 나누곤 했다.

박완서 소설 <그 여자네 집>의 결말은 반성 없는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끝난다. 작가 박완서의 역사의식을 돌아볼 수 있는 글인데 검인정 제도 시행 이후 오히려 이런 글들을 교과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민족이란 화두 자체가 약화된 시대에 사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우리 역사에서 해결되지 않은 민족의 의미가 사라질까? 일제와 그 앞잡이들에게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의 문제를 감히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15년 연말과 2016년 벽두를 뜨겁게 달군 위안부 합의와 소녀상 지키기, 영화 <귀향>을 보면 결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처음 <귀향>이란 제목을 접했을 때, 귀향(歸鄕), 즉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인 줄만 알았다. 어디에선가 한자를 보니 귀향(鬼鄕)이었다. 그랬다. 귀향은 혼이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감독은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한 분, 한 분의 넋이 돌아온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 중간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비는 소리 없이 아프게 죽어간 넋들의 귀혼(歸魂)을 간절히 바라는 감독의 염원이 읽힌다.

 영화 <귀향>의 한 장면.

영화 <귀향>의 한 장면. ⓒ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주인공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고통의 연대기를 구축한다. 그 매개가 바로 굿과 무녀다. 영매(靈媒)로 등장하는 여성도 강간의 고통을 당한 상태에서 신 내림을 받은 여성이고, 그 영매를 돌보는 무녀와 친한 언니가 일제 강점기 강제로 끌려간 주인공 정민을 두고 온 노년의 영희다. 영화는 이들의 한을 맺고 푸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노년의 영희는 정민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마음의 고통을 영매의 도움으로 풀어낸다. 비록 몸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마음은 늘 거기에 있었다는 영희의 절규처럼 혼은 끝내 이곳에서의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혼이 돌아와 현재와 만나는 지난한 사연이 바로 <귀향>이다.

혼의 비정상, 비정상의 혼

구천을 떠도는 혼들이 많은 시대다.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억압 아래 안타깝게 숨을 거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우리 한국인에게 혼이란 그리고 귀나 신, 즉 '귀신'(鬼神)이란 어떤 존재인가? 때로 영화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구의 유령처럼, 혹은 동양적으로 현존하는 인연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 된 존재다.

우리는 혼이나 귀와 신에 대해서 꺼리고 멀리 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의 의지와 달리 그들은 우리 곁에 있는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그들 곁을 떠나려고 몸부림치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는 핏줄과 인연이 그들과 어우러져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매그놀리아>의 대사가 떠올랐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과거를 우리를 기억한다"

아베 총리와 박근혜는 이 말을 알고 있을까? 혹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불교의 연기설을 떠올리는 이 말은 지금 내가 한 말과 행동이 언젠가는 다시 내게 돌아온다는 말이다. 박근혜가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사람은 '혼이 비정상'이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영매의 신통함을 지닌 무속인도 함부로 남의 영혼에 대해서 평하기 어려울진대 일국의 대통령이 어찌 자신과 함께 살아갈 주권국의 국민, 그 국민의 절반이 넘는 사람에게 이런 망언을 뱉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분명 혼이 비정상인 사람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를 비판하고 단죄한 권한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인간에게 혼이 있는 한, 역사에 불가역이란 없다. 구천을 떠도는 혼의 돌아옴을 간절히 기도한다. 아니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 영면의 안식을 누리기를 더욱 간절히 기도한다. 살아 고통 받는 영혼의 아픔을 감싸지 못하고 합의니 불가역이니 하는 말로 두 번 못을 박는 행위는 진정한 안식을 꿈꾸는 영혼들의 '귀향'(鬼鄕)을 막는 비정상적인 만행이다.


귀향 위안부 국정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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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국어교사로 토론교육 운동을 통해 토론의 전사를 키워내왔다. 오랜 세월 토론 공부의 성과를 모아 토론의 전사1~10 시리즈를 기획 집필하고 공부를 사랑하라. 강자들은 토론하지 않는다. 질문이 있는 교실(한결하늘) 등을 출간하며 교육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가고 있다. 서울의 고등학교 명퇴 후 현재 산청의 지리산고등학교에서 기간제로 근무중이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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