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지금보다 나이가 어릴 때는 명동 같은 곳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을 만나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치기 어리게 합장을 하고 "옴~마니밧메훔! 사바하사바하! 훠이훠이~!"라고 장난을 걸었다. 그것도 재미가 없어지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오심즉여심! 곧 있으면 후천개벽!"이라고 소리쳐 전도하던 아저씨에 맞섰다. 아저씨가 화가 나서 커다란 십자가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쫓아오면 "폭력지옥! 평화천국!"이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힘껏 내뺐다.

세상은 언뜻 보아도 절대 조화로워 보이지 않았다. 신이 계신다면 세상을 이런 형태로 둘 리 만무했다. 종교에 묘한 반발심 같은 게 자리했다. 특히 유일신을 내세우는 종교에 대한 감정이 더 그랬다. 아무래도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감독 자코 반 도마엘은 그 정도가 나 같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심했나 보다.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한(국내개봉일 선정은 신의 한 수!) 이 영화에는 발칙하고 위태로운 설정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처럼 풍성하다.

영화는 "태초에? 태초라는 시간은 없다. 시작은 없다"라는 도발적인 내레이션으로 출발한다. 초장부터 기독교의 시간관에 역행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가족에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부장이 신이란다. 늘 술과 담배에 절어있고 아내와 딸에게 호통을 치거나 매를 들기 일쑤다. 요즘 유행하는 말인 '개저씨' 그 이상이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 신의 딸로 등장하는 에와. 아버지 신의 방을 엿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한 탈출을 결심하고 있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 신의 딸로 등장하는 에와. 아버지 신의 방을 엿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한 탈출을 결심하고 있다. ⓒ (주)엣나인필름


이 고약한 아저씨, 신(브누와 뽀엘부르드 분)의 유일한 낙은 자신이 만든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다. 폭군 아버지의 패악에 반기를 든 아들 JC(Jesus Christ의 약자)는 집을 나갔다가 작은 조각상이 되었다. 오빠를 따라 세상을 구원하려는 딸 에와(필리 그로인 분)는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남은 수명을 휴대전화 메시지로 전송하고는 집을 나선다. 그렇게 이 전복적인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인간을 괴롭히는 신과 인간을 구원하려는 신의 딸

에와가 보낸 '남은 수명 문자'에 세상은 발칵 뒤집힌다. 자기가 죽을 날을 알게 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남은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지금 여기'를 산다. 개인만 변한 것이 아니다. 국가 간 전쟁의 포화도 멈춘다. 신은 진노한다. "사람들이 죽을 날을 몰라 우리말을 듣는 것!"이라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에와는 조각상이 된 오빠 JC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신약성서(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The Brand New Testament')를 쓰려고 여섯 명의 사도를 찾아 나선다. 여섯 명의 사도는 사회의 소수자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한쪽 팔이 없는 여성, 진짜 꿈과는 무관한 "알량한" 사회생활에 인생을 저당 잡힌 채 사는 중년의 회사원, 포르노에 미친 성도착증 청년, 남편과 사랑 없는 일상을 사는 늙은 여자, 킬러,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린 소년이다.

여섯 명의 사도는 신의 딸 에와의 도움으로 자기만의 음악을 듣게 된다. 에와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자기만의 음악을 가지고 태어난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소명이다. 소명을 알게 된 이들은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팔이 잘린 여자가 자신의 잘린 손과 악수하거나 킬러가 거울 속의 자기 자신과 뜨겁게 포옹하는 식이다.

사도들과 고릴라의 모습 네 명의 사도와 성도칙증 사도의 여자친구 그리고 고릴라가 여섯 번째 꼬마 사도와 신의 딸 에와를 바라보고 있다

▲ 사도들과 고릴라의 모습 네 명의 사도와 성도칙증 사도의 여자친구 그리고 고릴라가 여섯 번째 꼬마 사도와 신의 딸 에와를 바라보고 있다 ⓒ (주)엣나인필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 심오하다. 감독은 신의 딸 에와의 입을 빌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천국은 여기예요"라고 말한다. 내세는 없다. 니체가 말했듯 저 세계를 위해 이 세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밤하늘의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빛나듯 죽음에 대한 엄정한 응시가 우리 삶을 선명하게 한다. 죽음과 진짜로 직면해야 마침내 인간은 오늘을 산다. 지금 여기를 살 때 기만적인 윤리나 이데올로기도 비로소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천국은 여기예요"

영화는 가부장으로 상징되는 남성적, 수직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한다. 영화에서 세상의 대혼란을 구원하는 이는 남신에게 주눅이 들어 쥐죽은 듯 조용히 지내던 아내 여신(욜랜드 모로 분)이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지구에 내려와 여섯 사도에게 소소한 기적을 행하는 이는 딸 에와다. 에와와 꼬마 사도가 빌딩을 수직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습은 중력이 수평으로 작용한다는 설정이다. 수직적 세계관에 대한 수평적 세계관의 승리로 보인다.

그 외에도 여러 도발적인 상상이 영화 곳곳에 수놓아져 있다. 꼬마 소년 사도는 죽기 전에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 늙은 부인 사도는 고릴라와 사랑에 빠져 동거한다. 남성인 킬러 사도는 사랑에 빠진 후 임신하여 만삭이 된다. 에와가 꼬마 사도와 놀이터에서 회전 기구에 올라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나 여신이 턴테이블에 LP판을 돌리며 손쉽게 세상을 구원하는 장면에선 니체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인생은 스케이트장이야. 수많은 사람이 넘어지거든" "그의 목소리는 30명이 동시에 호두를 까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대리석에 흩뿌려지는 진주 같은 웃음이 필요했다" "엄마의 시선은 쏟아진 압정 상자를 보는 듯 난감했다" 등의 영화 속 비유적 대사는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청신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OST로 흐르는 헨델과 슈베르트 등의 음악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공식 포스터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공식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반면 발칙한 도입부에 비해 뒤로 갈수록 유머가 약해지고 식상해지는 점은 다소 아쉽다. 신의 딸 에와가 여섯 사도와 만나 차례로 벌이는 에피소드도 지루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작품에 '전체적으로 보이는 기운'이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불편했을 것 같다.

하지만 IS의 폭탄테러 등 잘못된 믿음이 낳은 비극이 세상을 떨게 하고, 내일의 불확실한 보상을 위해 확실한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일상화된 시대를 사는 오늘날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 의미가 있다.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미래도 없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이다. 우리는 사실 모두 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셈이다. 살아있는 동안 다른 누구의 인생도 아닌 자신의 삶을 힘껏 살아야 한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천국은 여기예요." 영화가 전하는 한마디 아포리즘이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 자코 반 도마엘 크리스마스 필리 그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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