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 팰리스 트위터 상단에 걸려있는 이청용 사진

크리스탈 팰리스 트위터 상단에 걸려있는 이청용 사진 ⓒ 크리스탈 팰리스 트위터 갈무리


수정궁에서 미로에 갇혔던 푸른 용이 오랜만에 다시 날아올랐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었기에 누구도 예상치못한 1716일만의 프리미어리그 복귀골은 더 짜릿했고 극적이이었다.

이청용은 20일(아래 한국시각) 열린 스토크시티와의 2015~2016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17라운드에서 1-1로 맞선 후반 36분 교체투입되어 7분 만에 중거리슛으로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렸다. 이청용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을 올린 건 볼턴 시절이던 2011년 4월 10일 이후 무려 4년 8개월만이었다. 날짜로는 1716일만이다. 팰리스 유니폼을 입고서는 지난 8월 26일 캐피털원컵 슈루즈버리(3부리그)전에서 골을 넣은 뒤 약 4개월 만에 맛본 2호골이다.

오랜만의 EPL에서 올린 득점이자 결승골이라는 점에서도 뜻깊지만 그동안 이청용에게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유형의 골이라는 점도 색다르다. 이청용은 그동안 완전한 찬스가 아니면 지나칠 정도로 슛을 아끼는 습관이 약점으로 지적받아왔다. 어쩌다 슈팅 기회가 와도 동료에게 양보하거나 소극적인 슈팅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빗대어 '소녀슛'(소녀가 차는 것처럼 슛이 약하다는 의미) '접기중독'(공을 끌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것)같은 비아냥이 따라붙기도 했다.

하지만 이청용은 이날 모처럼 과감하고 호쾌한 중거리 슛으로 골문을 갈랐다. 평소 이청용은 문전 근처이거나 완벽한 노마크 찬스가 아니면 그 정도 먼 거리에서 슛을 거의 시도하지않는 선수다. 바람의 영향으로 약간의 굴절과 구속이 더해진 것을 감안해도 좀처럼 쉽게 보기 어려운 멋진 골이었다. 이청용의 축구인생을 통틀어서도 최고의 골로 회자되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이청용 본인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팬들도 이 한 골에 그동안의 막힌 체증이 쑥 뜷리는 느낌이었다. 이청용이 결승골 이후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 달리 역동적인 세리머니로 기쁨을 표시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마음의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를 보여주기에 더욱 짠한 감동을 줬다.

이청용은 2011년까지만 해도 축구인생이 탄탄대로를 달렸다. 2009년 FC서울을 떠나 프리미어리그 볼턴으로 이적하며 유럽파의 반열에 합류한 이청용은 첫 시즌부터 '볼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프리미어리그에 연착륙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출전하여 팀내 최다인 2골을 넣으며 한국의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끌었다. 당시만 해도 이청용은 '포스트 박지성'의 선두주자로 거론되며 한국축구의 명실상부한 차세대 에이스였다. 주가가 오르면서 유럽 빅클럽들의 관심이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 7월 31일 잉글랜드 5부리그 뉴포티카운티와 연습경기 도중 당한 불의의 부상은 이청용의 축구인생에 큰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무명의 잉글랜드 수비수 톰 밀러에게 당한 살인태클로 오른쪽 정강이뼈가 이중골절되는 중상을 입은 이청용은 약 1년을 수술과 재활로 보내야했다. 공교롭게도 볼턴은 그해 2부리그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었다.

피나는 재활훈련 끝에 그라운드로 복귀한 이청용은 볼턴과 함께 재기를 노렸지만 상황은 계속해서 순탄치않았다. 볼턴은 3년 연속 연속 1부리그 승격에 실패했다. 오랜 기간 2부리그에 머물며 팬들의 시야에서도 많이 멀어졌고 이청용의 주가도 떨어졌다.

지난해 브라질월드컵에도 이청용은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지만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4년 전과 달리 날카롭고 창조적인 움직임이 실종된 이청용의 부진도 한국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치며 팬들에게 큰 실망과 안타까움을 줬다.

이청용은 올해초 볼턴과의 계약만료를 앞두고 크리스탈팰리스로 전격 이적하며 4년 만에 EPL 무대에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운은 좀처럼 따르지 않았다. 호주 아시안컵에서 또다시 정강이 부상을 당한 이청용은 이적 초기에 소속팀에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할 기회를 놓쳤다.

더구나 올시즌에는 한층 높아진 주전경쟁의 벽이 이청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청용은 팀이 치른 프리미어리그 17경기 중 단 5경기에만 나섰고 선발출전은 컵대회를 제외하면 한 차례도 없었다.

리그에서 총 출전시간을 모두 합쳐도 약 50여분 정도로 선발출전하여 풀타임 한경기를 뛴 것에도 못미친다. 야닉 볼라시에, 윌프레드 자하, 제이슨 펀천 등 이청용의 포지션에 쟁쟁한 선수들이 워낙 많은데다 활약까지 좋아서 좀처럼 파고들 틈이 없었다. 울리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까지 이청용의 상황에 우려를 표시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청용은 자신에게 돌아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토크시티전 역시 만일 1-0으로 경기가 끝났더라면 어쩌면 이청용에게 돌아올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얀의 페널티킥 동점골이 터지며 상황은 반전됐고 앨런 파듀 팰리스 감독은 승부를 걸기 위하여 이청용에게 눈길을 돌렸다.

포지션 경쟁자인 자하를 대신하여 투입된 이청용은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교체 선수가 결승골까지 터뜨렸다는 것은 곧 감독의 용병술 변화가 성공했다는 의미이기에 감독의 공이기도 하다. 이는 앞으로도 파듀 감독이 이청용의 활용도를 한번이라도 더 고민할수 있는 계기가 된다.

파듀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청용의 골이 아시아를 놀라게 했을 것"이라며 극찬했다. 결승골을 넣은 선수에게 의례적인 헌사일 수도 있지만 파듀 감독은 자신이 직접 이청용을 팰리스에 데려왔음을 설명하며, 그가 현재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포지션에서 볼라시에와 자하 같은 선수들이 있기 때문이지 이청용의 재능과 실력이 모자란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감독이 충분히 이청용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시즌 구상에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했음은 긍정적인 장면이다.

물론 이 한 골로 이청용의 팀내 입지가 단숨에 반전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중요한 시기에 감독과 동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는데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현재 EPL에서 가장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박싱 데이'를 치르고 있으며 1월에는 겨울 이적시장도 다가온다.

한 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이청용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출전시간을 늘려갈 수 있는 기회가 돌아올 것이며,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이다 보면 이적 시장에서 다른 팀들의 관심을 받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이청용의 12월은 더 바빠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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