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전드>의 포스터.

영화 <레전드>의 포스터. ⓒ 이수 C&E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문장이 좋은 여기자'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용감했던 여기자'를 꼽으라면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가 바로 그 자리를 점한 사람이란 걸.

레지스탕스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뿐이랴. 베트남 전쟁의 포화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었고, 민중항쟁이 한창이었던 멕시코에서 총에 맞기도 했다. 세상 대부분의 사내가 두려워하던 이란의 아야툴라 호메이니,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이 주도해 인터뷰를 이어가던 무시무시한 여자. 이제는 전설로 남았다.

바로 이 오리아나 팔라치는 살아생전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이 만난 권력의 최정점에 섰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다.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똑똑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았어요. 좋은 가정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상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게다가 배려와 연민에서는 아주 먼 사람들이었죠. 그들이 가진 능력이라곤,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 했으며,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몹시 악랄한 수단도 마다치 않았다는 것이죠."

영국의 '유명했던 조직폭력배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레전드>를 보면서, 왜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여기자 오리아나의 진술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재미없고 심상한 조폭의 생몰연대기 <레전드>

 결국 조폭과 타락한 정치인은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다.

결국 조폭과 타락한 정치인은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다. ⓒ 이수 C&E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20여 년 전쯤 <L.A 컨피덴셜>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치고 빠지는 능수능란한 할리우드적 영화 전술로 자국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성공을 거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브라이언 헬겔랜드. 그해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은 그가 만들었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영화 <레전드>를 봤다.

그런데 미리 결론을 내놓는다면 이건…. '유치하고 조악하며 드라마적 흥미로움까지 빠진 영국 조직폭력배 형제의 생몰연대기'에 불과하다.

연출에선 힘이 빠졌고, 주연 톰 하디를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의 캐릭터는 이전 이탈리아 마피아를 소재로 한 영화나, 1930년대 금주법 시대를 그린 미국 갱스터영화의 복사판이다. 식상하고, 고루하다는 이야기. '머신 건(Machine Gun) 켈리'와도 닮았고, '매드 독(Mad Dog) 로이 얼'과도 닮았다. 여기에 알 카포네의 흉내를 내는 수많은 조연까지.

배우들의 연기만이 아니다. 조폭들의 배역 설정은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에 여자에겐 한없이 친절하면서도 상대편 조직의 똘마니들에겐 냉혹하기 짝이 없는 행태를 보이는 식이다. 이전 마피아 영화와 판박이이다. 얼핏얼핏 비치는 '깡패도 휴머니티가 있다'는 식의 '짜 맞추기식 화면구성'의 동어반복도 갱스터영화 팬이라면 참고 봐주기가 힘든 수준이다.

점수를 줄만한 건 '톰 하디'의 걸출한 연기와 영화 속 우의(寓意)

 톰 하디는 <레전드>에서 1인2역을 맡아 빼어난 연기를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톰 하디는 <레전드>에서 1인2역을 맡아 빼어난 연기를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 이수 C&E


그런데도 <레전드>의 러닝타임 2시간 12분을 지겹지 않게 만드는 게 있다면, 그건 1인 2역을 맡아 빼어난 연기력으로 이를 소화한 톰 하디(레지 크레이/로니 크레이 분)이다. 어린 시절 나치의 폭격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동생 로니와 그에 비해 훨씬 이성적인 쌍둥이 형 레지의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하긴 어려웠을 게 명약관화한 일. 이 대목에선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고 말해도 좋다.

그리고 <레전드>의 미덕을 하나만 더 꼽으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조직폭력배와 부패한 정치인은 결국 동질이형(同質異形)의 인간이란 걸 재치 있게 보여 준다"고.

영화에서 묘사되는 런던의 고위직 경찰 간부와 영국의 상원의원은 그 추악하고, 위선적인 정도가 깡패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더하다. 앞서 언급한 오리아나 팔라치의 진술과 유사하게. 다행히 '우의'를 통한 에두른 세상의 비판이 <레전드> 속엔 눈곱만치라도 담겼다. 이것이 난파 직전의 영화를 구하는 주요한 키워드로 역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엔딩 자막이 올라올 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답게 <레전드>는 형제 조직폭력배 레지 크레이와 로니 크레이가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알려준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사실을.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소설가 성석제의 단편 중 <조동관 약전>이란 게 있다. 이 역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깡패의 생몰연대기'다. 이걸 깔깔거리며 즐겁게 읽은 필자는 동시에 이런 궁금증을 감출 수 없었다.

수백억 원 혹은, 수천억 원을 들여 만든 할리우드 영화보다 원고료 80만 원을 받고 3일 만에 쓴(성석제는 청탁받은 단편을 쓰는데 2박 3일이면 된다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소설이 더 재밌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건 성석제가 천재라는 이야긴가, 그게 아니면 <레전드>의 감독이 바보라는 이야긴가?

만약 '독설가' 오리아나 팔라치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말을 브라이언 헬겔랜드 감독에게 하지 않았을까.

"어이, 너는 조폭과 부패한 정치인이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애들이었다는 걸 여태 몰랐던 거야? 그런 거야?"

○ 편집ㅣ곽우신 기자


레전드 톰 하디 오리아나 팔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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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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