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두잉에서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이 열렸다.

▲ 침묵하는 배우들 지난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두잉에서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이 열렸다. 배우는 남자 배우 둘과 여자 배우 하나, 총 셋이 전부이다. 왼쪽부터 배우 김중엽, 조수연, 조만근. ⓒ 곽우신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다. '죽은 사회의 시인'이다.

세월호 참사 610일째이자 세월호 청문회 마지막 날인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두잉에서는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이 열렸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아직 무대가 들어서지 않은 좁은 공간에서 수차례 대사를 읊조리며 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두 남자 배우와 단정한 옷차림의 여배우 한 명. 이들은 동선을 계속 다시 체크하고, 연기의 방향에 대해 연출과 끊임없이 논의한다. 무대 위에 올라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여느 극단이나 마찬가지 풍경일 터다. 하지만 유독 이들의 상기된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벌겋게 충혈돼 있고, 예사로 눈물을 흘린다.

극단 극것의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이 실험적 문제작이 18일부터 23일까지 성수동 두잉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교실 붕괴 현장에서 세월호 참사의 현장으로

 지난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두잉에서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이 열렸다.

▲ 교실 붕괴 지난 16일,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 교사가 등장을 하든 말든, 두 학생은 각자의 할 일에만 집중해 있다. 그런 그들에게 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 곽우신


객석과 무대가 크게 구분되지 않은 공간. 음소거된 영상 속 교실에서 두 학생과 한 선생님이 싸우고 있다.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인 몰아붙임에 더 가깝다. 격앙된 표정의 두 학생은 격정적으로 내뱉고 있고, 당황한 듯 슬픈 듯한 표정의 교사는 수세에 몰려 있다.

대사인지 해설인지 모를 연출의 짧은 변이 등장한 후, 영상은 다음 컷으로 넘어간다. 교실 안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며 서로 장난을 하는 두 학생. 이들의 길지 않은 대화 이후, 영상의 공간은 무대 위 공간으로 이어진다. 같은 교실, 같은 학생. 그러나 두 학생의 표정도, 교실의 공기도 다르다.

침묵으로 가득 찬 교실에 긴장한 표정의 한 교사가 들어온다. 임용고시를 마치고 처음 학교에 부임한 교사. 갓 선생이 되어 열정이 넘치는 그는 학생들에게 적극적인 스킨쉽을 시도한다. 그러나 선생님이 들어오든 말든, 한 학생은 잠을 잘 뿐이고, 다른 학생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기에 바쁘다.

이 붕괴한 교육 현장의 모습은 더는 새로울 것이 없다. 영화 그리고 동명의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이미 고발하지 않았는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뜬 <죽은 사회의 시인> 속 교실도 마찬가지이다. 교실의 선생님은 본인이 '존 키팅'이 되고 싶겠지만, 이 교실에는 토드도 없고, 찰리도 없고, 문학 클럽도 없다.

오, 나여! 오, 삶이여!
오, 나여! 오, 삶이여!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질문들
믿음 없는 자들의 끝없는 행렬에 대해
어리석은 자들로 가득 찬 도시들에 대해
나 자신을 영원히 자책하는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어리석고, 나보다 더 믿음 없는 자 누구인가?)
헛되이 빛을 갈망하는 눈들에 대해
사물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투쟁에 대해
형편없는 모든 결말들에 대해
발을 끌며 걷는 내 주위의 추한 군중에 대해
공허하고 쓸모없는 남은 생에 대해
나를 얽어매는 그 남은 시간들에 대해
오, 나여! 반복되는 너무 슬픈 질문
이것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오, 나여, 오, 삶이여!
답은 바로 이것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
삶이 존재하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장엄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도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는 것.
- 월터 휘트먼, '오, 나여! 오, 삶이여!'
그러나 그런 현실이 이 선생님의 '존 키팅'이 되고 싶은 바람을 꺾지는 못한다. 그는 어설프고 숙련되지 않았지만, 그 마음만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명대사를 읊는다. "오, 캡틴, 마이 캡틴!" 그리고 선언한다. 자신도 캡틴이, 선장이 되겠다고. 학생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둠 속에서 따라갈 수 있는 빛이 되겠다고.

그는 기존 기성세대의 허황한 약속을 되풀이하거나 '꼰대질'로 자기 위안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시를 그럴듯한 말들의 포장 정도로 여기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학생들에게 그녀는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월터 휘트먼의 시는 현재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 삶의 위대함을 예찬한다. <죽은 사회의 시인>에도 시가 등장한다.

여전히 매몰차게 그녀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노란 꽃을 전해주며 월터 휘트먼 대신 김수영의 시를 속삭인다. 고민하라고, 고뇌하라고. 아무도 시를 읽지 않고, 낭만과 열정이 사라져버린 이 시대에서 서정의 가치가 무엇인지 외친다.

 지난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두잉에서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이 열렸다.

▲ 갈등 지난 16일,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 무대. 두 학생은 선생에게 묻는다. 아이들이 죽어갈 때 당신들은 뭘하고 있었는지, 이 버티는 게 전부인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선생은 답한다. 그 답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관객에게 넘어간다. ⓒ 곽우신


꽃잎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 김수영, '꽃잎2'
그러나 여전히, 학생들은 그녀를 믿을 수 없다. 선장도 빛도 믿을 수 없다. 그녀가 믿을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신뢰 체계 자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배신으로 무너져 내렸고, 마음속 상처는 덮는다고 그저 아물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반전. 흑백의 단체 사진은 다른 시점의 컬러사진으로 바뀐다. 직전까지 교차했던 무수한 복선이 갑작스레 폭발한다.

이렇게 무대는, 단순한 교실 붕괴의 현장을 벗어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죽어버린 세계를 대변하는 단편이 된다. 32명의 학생 중 30명이 죽고, 단 두 명만이 살아남은 이 반의 학생들.

그들이 어떻게 '선장'을 '믿을' 수 있겠는가. 적당히 비위만 맞추며 비웃거나, 아예 교사의 말을 무시하던 학생들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무음으로 등장했던 영상 속 장면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살아남은 건 정말 강한 걸까. 우리는 노예의 삶을 사는 걸까. 고뇌란 무엇인가. 지옥은 또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믿고 뭐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속사포 같은 질문들이 쏟아진다. 선생에게, 학생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죽어버린 사회에 아직 시인이 없다

 지난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두잉에서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이 열렸다.

▲ 트라우마 지난 16일, 서울 복합문화공간 두잉의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 무대. 겉으로 발현되는 상처의 결과물은 달랐어도, 그 내면에 안고 있는 각자의 끔찍한 경험은 동일했다. 이들은 모두 피해자였고,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한다. ⓒ 곽우신


<죽은 사회의 시인>의 분명 깔끔한 맛의 작품은 아니다. 단점을 열거하자면 여러가지다. 1신과 2신까지의 흐름이 3신에서 급변하면서 매끄럽지 않다. 두 학생의 다소 달랐던 캐릭터가 선생님과의 논쟁에서는 어느새 유사한 인물(그마저 다소 작위적)로 바뀌어 버린다. '관념의 물화'가 심한 작품이며, 대개의 이런 실험적 작품이 그렇듯 상당히 불친절하다. 관람하는 관객이 적극적으로 해석할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의미가 불분명하게 다가오는 장면들도 있다. 좀 더 세련되어질 필요가 있는, 약간은 설익은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죽은 사회의 시인>은 꽤 괜찮은 아니 좋은 작품이다. 누차 말하지만, 좋은 의미를 가진 작품이 반드시 좋은 작품은 아니다. 그 좋은 메시지가 관객에게 설득적으로 전달이 되어야만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에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메시지에 치중하다가 오히려 메시지에 짓눌리는 작품이 허다하다. 예술이라는 그릇을 고수하지 못한 채, 정치적 혹은 사회적 사명감이 그 그릇을 박살 내 버리는 극도 여럿이다. <죽은 사회의 시인>은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지난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두잉에서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이 열렸다.

▲ 노란 꽃 지난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두잉에서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리허설이 열렸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노란 꽃을 한다발씩 전달해주고, 김수영의 시를 읊는다. 그 시의 구절을 학생들도 따라서 읊조린다. 꽃은 고뇌를 준다. 이미 충분히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고뇌가 필요한 걸까. 고뇌 없는 노예의 삶과 고뇌하는 지옥 같은 삶.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 알 수 없다. ⓒ 곽우신


이 작품은 교사와 학생 중 어느 한쪽의 손을 섣불리 들어주지 않는 데서 빛을 발한다. 학생들의 질문은 당연하다. 그들의 경험과 처지를 돌아봤을 때, 그들의 절규에 정면으로 응시하기란 쉽지 않다. 선장은 도망갔고,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전염병처럼 떠돈다. 그러나 단순하게 학생들의 질타에 교사가 고개 숙이고 패배하는 극이 아니다. 상기했듯, 교사가 상징하는 건 기성세대가 아니다.

그는 도망가지 않는다. 그는 이 배에 남아 있는 선장이고, 죽든 살든 끝까지 이 배에 남겠다고 한다. 어차피 이 배 밖의 현실은 지옥이니까.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든, 수세에 놓여 있든, 그녀는 학생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말하고, 듣고, 반박하며, 포기하지 않는다.

극단 극것의 첫 프로 데뷔작이 눈에 띄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세월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14년 4월 16일에 죽은 대한민국 사회에는, 아직 시인이 없다.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포스터 극단 극것의 첫 프로 데뷔작,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이 오는 18일부터 23일까지 관객을 만난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복함문화공간 두잉에서 진행되는 이번 작품은, 길지 않은 런닝타임임에도 보고 나면 '지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불편한 극이다. 그리고 그 이유 있는 불편함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 포스터 극단 극것의 첫 프로 데뷔작, 연극 <죽은 사회의 시인>이 오는 18일부터 23일까지 관객을 만난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복함문화공간 두잉에서 진행되는 이번 작품은, 길지 않은 런닝타임임에도 보고 나면 '지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불편한 극이다. 그리고 그 이유 있는 불편함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 극단 극것



○ 편집ㅣ이병한 기자


죽은사회의시인 연극 세월호 단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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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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