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 은퇴보도자료 사진 - 인천유나이티드 제공

이천수 은퇴보도자료 사진 - 인천유나이티드 제공 ⓒ 인천유나이티드


풍운아 이천수(인천 유나이티드)의 깜짝 은퇴 소식이 많은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다. 이천수는 지난 5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직접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이천수는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은퇴에 대해 생각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아니겠느냐"고 담담히 입장을 밝혔다.

이천수의 은퇴는 축구팬들에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사건이다. 200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축구 천재이자 그라운드의 풍운아로서 항상 찬사와 논란의 경계선에 있던 이천수다. 더구나 최근 차두리(FC서울)가 이천수보다 먼저 은퇴를 선언하면서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이글었던 황금세대의 막내급이자 마지막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를 떠나게 됐다. 축구팬들로서는 그야말로 한 시대의 황혼을 마주하게되는 순간이다.

이천수의 화려했던 시절, 2002~2008년

쟁쟁한 스타들이 넘쳐났던 2002 세대 중에서도 이천수는 특별했다. 재능만으로 놓고 보면 유럽 무대에서도 인정받은 박지성이나 이영표 같은 선배들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들었던 이천수다. '앙팡테리블' '천재' '야생마' '사기 유닛'같은 수식어에서 보듯이 이천수에게는 동시대는 물론이고 기존의 어떤 한국 선수들과 비교해도 보기 힘든 특별한 재능과 개성이 있었고 훨씬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부평고 시절부터 전천후 득점 기계로 명성을 떨쳤던 이천수는 축구선수로서 최고의 엘리트코스만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연령대별 대표팀을 거쳐 두 번의 월드컵과 올림픽 본선에 출전했고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빠르게 성장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2002 한일월드컵에 최연소로 발탁되어 조커로서 4강신화에 기여했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는 주전으로 활약하며 원정 첫 승리를 따낸 토고전에서 환상적인 프리킥 득점을 올리며 주목받았다. K리그에서도 이천수의 활약은 거침이 없었다.

2005년에는 울산 소속으로 팀의 K리그 우승을 이끌며 MVP에도 선정되는 등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사람들에 따라 평가는 엇갈리지만 대략 2002년부터 2008년까지가 이천수 축구인생의 전성기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천수는 축구선수로서는 비교적 왜소한 체구(174cm·63kg)에도 불구하고, 지기 싫어하는 악착같은 승부근성과 뛰어난 돌파력, 정교한 프리킥 능력 등을 두루 겸비해 축구선수로서의 모든 장점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언변도 있고 쇼맨십도 갖춰서 여러 방송에 출연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도 주저하지 않는 등 스포테이너로서의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선수, 한때는 '공공의 적'

그러나 재능과 열정에 비하여 자기 관리는 부족했다는 평가다. 이천수는 한국축구 사상 가장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린 선수이기도 하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경박한 언행으로 논란을 자초하기 일쑤였다. 2002 월드컵 직후에는 자서전에 대표팀 선배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실어 논란에 휩싸였다. K리그 경기 도중 상대 서포터즈와 신경전을 펼치다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려 징계를 받았고, 거친 플레이로 퇴장을 당하자 심판에게 욕설을 퍼부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심지어 상대 팀의 외국인 감독과 팬들을 깎아내리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등, 단순히 패기나 승부욕만으로 미화하기에는 과했던 장면들이 많았다.

이천수의 축구인생이 본격적인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다. 이천수는 축구인생 동안 두 번의 유럽 무대에 도전했으나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 각각 리그 적응에 실패하며 초라하게 귀환해야했다. 특히 2008년 7월 네덜란드 페예노르트 시절 부상과 개인 금전 문제를 둘러싸고 축구에 집중하지 못하며 다시 K리그로 돌아올 때부터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이천수는 수원 시절에도 팀에 적응하지 못하여 다시 임의탈퇴를 당했고 2009년 1월 전남에 입단한 뒤에도 '주먹감자' 세리머니로 징계를 받는가 하면, 구단 동의 없이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 알 나스르 이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거짓말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두 번째로 임의탈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때의 파장은 그야말로 치명적이어서 이천수는 그야말로 축구계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더 이상 한국에서 축구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논란을 무릅쓰고 진출했던 중동에서도 임금 체불 사태에 시달리는 등 평탄하지 못했다.

중동과 J리그를 거치며 방황을 거듭하던 이천수는 2013년 달라진 모습으로 K리그에 돌아와서 팬들과 구단에게 용서를 구했다. K리그에 돌아오고 싶다는 일념으로 장기간 무적 신분까지도 감수했다. 이천수의 진정성에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지켜보던 팬들과 관계자들도 거듭되는 사과와 반성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이천수는 임의탈퇴가 해제된 이후 고향팀 인천에 터를 잡으며 마지막 축구인생의 불꽃을 태웠다.

물론 복귀 후에도 2013년 폭행 시비에 한 차례 연루되는 등 구설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천에서 보낸 마지막 세 시즌동안 이천수는 과거에 비하면 많이 성숙해진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 전성기만큼의 화려한 기량은 없었어도 막판까지 임금체불과 주력 선수 이탈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인천의 든든한 맏형으로 끝까지 제 몫을 다했다.

지난 FA컵 결승전은 이천수가 인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들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우승은 서울의 몫이었고 이천수는 예전의 대표팀 동료이자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한 차두리가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했다.

이천수의 행보는 젊은 시절에는 박지성, 말년에는 차두리의 행보와 종종 비교된다. 박지성은 초창기만 해도 프로 구단 지명도 받지못했던 무명 선수였으나 특유의 성실성과 축구센스, 철저한 자기관리로 한국축구의 전설로 거듭났다. 차두리는 또래 세대들에 비하여 축구인생의 굴곡이 많았으나 말년에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모두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며 한일월드컵 세대 중 가장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 선수로 남았다. 공통점은 두 선수 모두 경기장밖에서는 모범적인 사생활로 이렇다 할 구설수가 없었고 축구선수들의 롤모델이 될만한 리더십을 갖췄다는 점이다.

이천수는 박지성만큼 그 재능을 다 꽃피우지 못했고 차두리처럼 말년이 순탄했던 것도 아니다. 재능만으로는 한국 축구사에 역대 최고급으로 꼽히는 이천수였기에, 그 재능을 온전히 축구에만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천수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한다

그러나 이천수를 싫어하던 이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천수의 남다른 승부욕과 축구에 대한 진정성이다. 이천수는 은퇴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가장 아쉬운 선입견으로 "노력없는 천재" 이미지를 꼽았다.

경기외적인 구설수가 많았던 이천수였지만 막상 훈련과 경기중에 임하는 집중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특히 대표팀에서 여러 차례 보여준 투지 넘치는 모습 중 인상적인 장면이 많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전에서 거친 플레이를 일삼던 상대 선수들에 격분하여 이탈리아의 상징적인 선수인 말디니의 뒤통수를 걷어찬(훗날 이천수는 고의적으로 찼다고 고백했다)장면이나, 2006년 독일월드컵 스위스전에서 16강 탈락이 확정되고 그라운드에 쏟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 2007년 아시안컵에서 주축 선수들이 대거 빠져 어려운 상황에 놓인 대표팀 공격진을, 부상에도 불구하고 혼자 이끌어 가다시피 했던 모습들은 지금도 종종 인구에 회자된다.

인천에서는 팀 전력 자체도 다소 약했고 이천수의 기량도 예전처럼 주목받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변함없는 승부욕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박수를 받았다.인천 유나이티드를 주제로 제작된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에서 약 10년 전만 해도 상대 팀의 에이스 신분으로 인천을 무너뜨리던 악역을 담당하던 이천수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는 약체 인천을 떠받치는 외로운 노장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마저 느끼게 한다. 한편으로 어느덧 악동에서 성숙한 베테랑으로 거듭난 이천수의 새로운 일면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선수로서 다사다난했던 축구인생의 1막을 마친 이천수는 이제 또 다른 2막을 준비하고 있다. 화려함과 그늘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굴곡진 커리어를 보냈지만 다행히 마지막 떠나는 순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할만하다. 앞으로도 이천수라는 축구인이 남긴 경력과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적어도 2000년대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에 그의 이름이 두고두고 남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현역 신분을 벗어나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이천수가 선수 시절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발판삼아 미래에 더 훌륭한 축구인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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