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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코사니 농부 지례씨. 오래전 우리의 농가에서 그랬듯이 그에게 소는 가장 큰 재산이다.
 북인도 코사니 농부 지례씨. 오래전 우리의 농가에서 그랬듯이 그에게 소는 가장 큰 재산이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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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탄두리 치킨을 맛있게 먹었던 길거리 움막집 점포에서 '모닝커피'가 아니라 '모닝짜이' 한잔을 하려 했는데 문이 닫혀 있다. 그 앞을 지나치는데 저만치 언덕 위에서 누군가 '미스터 송!" 하며 나를 불렀다. 움막집 점포주인 지례씨가 언덕을 내려서다가 나를 본 것이다. 반가웠다.

"짜이 오케이?"
"오케이! 이리 오세요!"

지례씨가 언덕 위로 올라오라며 손짓한다. 점포에서 짜이를 끓일 만한 재료가 준비되지 않았다며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그의 보금자리에 올라서자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산 능선들이 삼삼하게 펼쳐져 있었다. 저 구름 걷히면 분명 히말라야 설산 난다데비가 훤히 들어날 것이었다.

"저 구름 걷히면 히말라야 난다데비가 보이겠네요"
"예, 아주 잘 보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 만슈는 어디에 갔나요?"

자신의 집에 초대해 '모닝 짜이' 끓여준 지례씨

움박 점포를 꾸려나가는 농부, 지례씨의 아내. 그의 집 앞으로 구름 능선이 삼삼하게 펼쳐져 있다.
 움박 점포를 꾸려나가는 농부, 지례씨의 아내. 그의 집 앞으로 구름 능선이 삼삼하게 펼쳐져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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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두리 치킨을 요리 할 때 언덕을 오락가락하며 군소리 없이 잔심부름을 했던 그의 아들 만슈는 학교에 가고 없었다.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제 갓 태어난 송아지를 끌고 나오는 그의 부인과 마주쳤다. 그가 힌두어로 뭐라고 하자 부인이 버럭 화를 낸다. 송아지 돌보랴 소먹이 주랴 한창 바쁜 일손을 놀리는 그녀에게 느닷없이 짜이를 끓여 내오라는 말에 화가 난 것이 아닌가 싶어 나는 손을 내저어가며 그에게 말했다.

"짜이, 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노 프라블럼! 걱정 마세요."
"당신 아내가 힘들겠습니다."
"우리 마누라 힘이 아주 셉니다. 걱정 없습니다."
"내가 미안해서요."

내가 그의 아내에게 "쏘리 쏘리" 하면서 되돌아나가려 하자 빙그레 웃으면서 짜이를 끓어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다.

"우리 마누라는 당신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제 술을 많이 마셨다고 저러는 겁니다."

그는 어제 결혼 잔치 집에 가서 자정이 늦도록 술을 퍼 마셨다고 한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본래 성품이 그런지 그는 자꾸만 실없이 웃어댔다.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마누라에게 웃고 갓 태어난 송아지를 보며 웃는다.

"송아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모양입니다."
"이틀 지났습니다."

지례씨 부부. 북인도 코사니의 4월~5월은 축제 기간이다. 여기저기서 결혼 잔치가 벌어지고 갓 태어난 송아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례씨 부부. 북인도 코사니의 4월~5월은 축제 기간이다. 여기저기서 결혼 잔치가 벌어지고 갓 태어난 송아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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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태동하는 북인도 코사니의 4월~5월은 축제 기간이다. 여기저기서 결혼 잔치가 벌어지고 갓 태어난 송아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가 갓 태어난 송아지를 끌어안고 말했다.

"우리 집의 큰 재산입니다."
"예전에 한국 농촌에서도 소는 가장 큰 재산이었답니다."

그에게는 갓 태어난 송아지 말고도 태어난 지 보름됐다는 송아지에 암소 두 마리와 수소 한 마리, 그리고 두 마리의 염소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열 댓 마리의 닭들이 한가롭게 흩어져 모이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며칠 전 그가 내게 요리해준 탄두리 치킨은 저 닭들 중에 한 마리였던 것이다.

그는 만슈 말고도 대학에 다니는 큰 아들이 있다고 한다.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 주인 비노트씨의 장남처럼 알모라에 자리한 대학에서 컴퓨터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갑에서 큰 아들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갓 태어난 송아지를 쓰다듬고 있을 때처럼 환하게 웃는다. 대처에 나가 대학을 다니는 큰아들은 그가 농사를 지어가며 움박 점포를 꾸려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의 아내가 짜이를 내왔다. 우리는 짜이를 마시며 서로 알고 있는 영어를 총 동원해 몸짓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그는 민박집 비노트씨처럼 젊었을 때 5년 동안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군 생활을 하면서 익힌 영어 덕분에 어쩌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길거리 움막 점포를 꾸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인도의 군대는 모병제이다. 모병제라 하여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군대는 아니지만 가난한 집안의 시골 청년들은 결혼 자금이나 집 장만을 위해 군대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 또한 군인이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성인이 되면 무조건 군대에 가야 합니다. 내게 두 아들이 있는데 녀석들도 모두 군대에 가야 합니다."
"정말로요?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그렇죠?"
"분단국가라서 그렇답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파키스탄과 갈라선 분단국가입니다. 가끔씩 파키스탄과 분쟁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월급을 받고 원하는 사람만 군대에 갑니다. 한국 군인도 월급을 받습니까?"
"월급이 있지만 보통 월급쟁이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한국은 모바일을 만드는 삼성기업이 있는 나라 아닙니까? 잘 사는 나라에서 그렇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난방 장치 없어도 겨울 나는 데 문제 없습니다"

부엌이 딸린 부식창고와 작은 생활 공간으로 꾸며진 지례씨네 보금자리.
 부엌이 딸린 부식창고와 작은 생활 공간으로 꾸며진 지례씨네 보금자리.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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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과 부모님 그리고 작은 아버지와 사촌들이 생활하고 있는 지례씨네 본가.
 큰형과 부모님 그리고 작은 아버지와 사촌들이 생활하고 있는 지례씨네 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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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보금자리는 여느 인도의 시골 농가처럼 황토와 콘크리트를 혼합하여 지은 집이다. 두 채의 건물 중에 한 채는 부엌이 딸린 부식창고로 사용하고 있고 다른 한 채는 잠자는 공간이었다. 또한 그의 집 저만치에 여러 식구가 살 만한 제법 큰 본가가 있다. 그 집에는 큰형과 부모님 그리고 작은 아버지와 사촌들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서 대가족이 대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본가를 중심으로 지례씨의 보금자리와 더불어 여러 채의 농가들이 보이는데 결혼해서 분가한 그의 형제와 사촌들의 집이라고 한다.

그 또한 결혼과 함께 본가에서 나와 작은 집을 마련해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생활공간은 곡식 창고보다 작다. 부부의 침대가 놓여진 조금 너른 공간 안쪽에는 작은 방이 하나 더 딸려 있다. 작은 아들 만슈의 방이라고 한다.

거실이 따로 없는 그의 생활공간은 단지 잠자는 방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부엌이 딸려 있는 부식 창고 건물이 더 넓어 보인다. 그는 농자재들과 먹거리들을 보관해 놓은 부식창고를 개집, '마이 독스 홈'이라 불렀다. 아주 말끔하게 정리된 황토바닥의 부식창고에서 두 마리의 개가 잠을 잔다는 것이다. 이 두 마리의 개들은 하루 종일 떠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온다는 것이다.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부식창고일 것이다. 그 공간에 개를 재우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개들이 부식창고를 노리는 쥐들을 막아 주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락시미 아쉬람의 부럼 선생 집에서 거대한 쥐를 본 적이 있다. 한국의 쥐들보다 몸집이 서너 배나 더 큰 놈이었다. 쥐들은 그 큰 덩치만큼 먹는 양도 많을 것이었다.

지례씨 부부 침실과 작은 아들의 방이 들어서 있는 생활공간.
 지례씨 부부 침실과 작은 아들의 방이 들어서 있는 생활공간.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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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한 황토 바닥에 얇은 천이 깔려 있는 그의 방안에는 아궁이 지피는 온돌은 말할 것도 없이 아무런 난방장치도 없다. 흙벽과 흙바닥은 분명 여름에는 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2천 고지에 가까운 북인도 코사니의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 싶어 그에게 물었다.

"난방장치도 없이 겨울에는 춥지 않습니까?"
"노 프라블럼!"

그의 생활공간을 세세하게 둘러보면서 고산지대에서 난방장치도 없이 겨울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약간은 풀렸다. 외벽이 보통 벽보다 두 배 이상으로 두터운 흙벽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층은 소와 양이 머무는 가축들의 공간이었다. 축사의 천장은 그의 가족이 잠자는 방바닥이었으니 가축들에게서 나오는 열기가 전달될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추운 겨울을 난방장치 없이 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난방장치가 있을 것이었지만 서로 영어가 짧아 더 이상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고산지대에서 자연에 순응해 가며 온몸으로 습득한 수 천 년의 지혜가 함축되어 있는 어떤 생활 방식이 있을 것이었다. 저 생활공간에 갑작스럽게 자본이 들어와 안락한 현대식 공간으로 바뀐다면 분명 어떤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 갑작스런 변화는 이렇다 할 난방장치 없이 겨울을 보내고 있는 몸의 균형을 뒤흔들어 놓게 될 것이었다.

나는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충남 공주 시골 마을에서 10여 년을 생활하면서 '이제 겨우 살만 하니 병들어 돌아가신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그 노인들은 대부분 허름한 흙집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오다가 번듯한 콘크리트 양옥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 잘 둔 덕분에 먹고 살 걱정 없이 평생 해왔던 농사일에서 손을 놓았다. 도시 사람들처럼 기름보일러 팡팡 돌려가며 웃풍 없는 안락한 방안에서 하루 종일 방영하는 위성 텔레비전을 친구삼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그 갑작스럽게 바뀐 안락한 환경은 오히려 독이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내 병원신세를 지게했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밭일을 하는 걸 보았는데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는 부고장이 날아오곤 했다. 하지만 생활공간과 환경이 바뀌면서 '이제 겨우 살만하니까 고생고생 병원 신세를 지다가 돌아가셨다'는 부고장이 더 많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허름하고 비좁은 생활공간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내내 웃고 있는 인도의 농부 지례씨, 그를 보면서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돈과 명예 따위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 않고 자연에 순응해 살다가 큰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야 말로 한평생 잘 살다가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촌 동생 아이도 자기 자식처럼 돌보는 사람들

비좁은 부엌에서 짜파티를 굽고 있는 지례씨 부부. 이들 부부는 사촌 동생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보고 있었다.
 비좁은 부엌에서 짜파티를 굽고 있는 지례씨 부부. 이들 부부는 사촌 동생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보고 있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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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이를 다 마실 무렵 아랫집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지례씨가 곧장 아랫집으로 내려가 아이를 끌어안고 돌아왔다. 아이가 이제 마악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그는 울음이 뚝 그친 아이를 데리고 비좁은 부엌을 비집고 들어섰다. 아이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지례씨의 아내 품에 안긴다. 늦둥이 아들인가 싶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아들입니까?"
"아니요, 내 동생의 아들입니다."
"아, 당신의 친동생?"
"아니요. 사촌 동생의 아들입니다."

자신의 아들도 아니고 그것도 동생의 아들도 아닌, 사촌 동생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아이의 당숙이 되는 셈이었다. 그는 한 다리 건너 조카인 당조카를 친자식 돌보듯 하고 있었다. 울고 있던 아들이 사라졌는데도 아랫집에서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다. 형제나 사촌지간으로 구성된 씨족 마을이다 보니 니 아이 내 아이 할 것 없이 서로 돌보고 있는 것이었다. 부모가 농사일로 집을 비우면 당연히 다른 형제들이 알아서 돌보는 것이었다. 사촌들과 친형제처럼 지냈던 나의 어린 시절에도 그랬었다.

아내를 도와 밀가루 반죽을 준비하고 있던 그가 내게 밀가루에 계란을 넣을 것인지 우유를 넣을 것인지를 묻는다. 나는 그냥 우유를 넣어달라고 했다. 그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짜파티를 구워가며 싱글벙글 콧노래까지 부른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과 대화할 때 여전히 목소리의 톤이 높다. 살림하는 여자들은 지례씨처럼 느려터지고 허허 실실한 남자와 살다 보면 속 터질 일이 많을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와 나는 닮아 있었다.

내가 아침 식사로 먹은 짜파티와 라씨는 하늘과 땅을 의지해 농사짓고 살아가는 지례씨 부부의 수없이 많은 손을 거쳐 나온 신성한 음식이다.
 내가 아침 식사로 먹은 짜파티와 라씨는 하늘과 땅을 의지해 농사짓고 살아가는 지례씨 부부의 수없이 많은 손을 거쳐 나온 신성한 음식이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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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씨가 고소하게 구워 낸 밀가루 빵, 짜파티와 나뭇잎을 먹여 기르는 소의 젖, 유기농 우유를 발효시켜 만들었다는 시큼한 라씨를 내왔다. 그와 함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식사를 하면서 새삼스럽게 사람과 나무와 짜파티와 라씨는 서로 밀접한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무의 잎은 소를 먹이고 소는 우유를 통해 사람을 먹인다. 또한 나뭇잎은 소똥 거름이 되어 밀을 키워내 밀가루 빵, 짜파티를 내준다. 사람은 우유와 짜파티의 힘으로 하늘과 땅에 의지해 밀을 재배하고 나뭇잎을 수확해 소를 키운다. 사람과 동물과 자연은 하나로 엮여 있다. 그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예정에 없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머뭇거렸다. 지례씨가 친구처럼 나를 집안으로 초대 했는데 돈을 건네자니 친절을 무시하는 것 같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그의 움막 점포를 생각하며 돈을 내밀었다. 코사니 식당에서의 식사 값보다 조금 많은 백 루피를 내밀었더니 그가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다. 다시 그의 아내에게 건네 줬더니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받는다. 딱히 뭐라 꼭 집어 말 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자 지례씨 부부는 나보다 더 공손히 인사를 한다.

내가 아침 식사로 먹었던 짜파티와 라씨는 하늘과 땅을 의지해 농사짓고 살아가는 지례씨 부부의 수많은 손을 거쳐 나온 신성한 음식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나뭇잎을 구해 키운 소에게서 얻은 젖을 발효시켜 짜이를 만들고 거기다가 힘들게 땅을 일궈 재배한 밀로 짜파티를 만들어 내놓기 까지 수없이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 입에 들어간 그 신성한 한 끼의 식사에 얼마나 많은 손을 거치게 되는지 알면 알수록 사람과 자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

북인도 코사니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성소.
 북인도 코사니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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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잠시 멈춰 섰다. 늘 지나치는 작은 성소 앞이다. 올드 코사니 시골 길 곳곳에 힌두교인들이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작은 성소가 있다. 성소 주변에는 고목이 있다. 그 고목은 성소를 꾸미기 위해 부러 심은 것이 아니라 그곳을 신성시 여기고 있기에 함부로 베지 않은 것이다. 성소가 나무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어디 나무만 살리겠는가. 사람의 마음도 살린다.

사람들은 성소 앞에서 신에게 마음을 내놓는 순간만큼은 나쁜 마음을 먹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마음자리를 내려놓고 신성한 마음을 얻어가는 곳이다. 보잘 것 없는 길거리의 작은 성소지만 타락한 사원이나 타락한 교회에서처럼 돈을 요구하거나 천당과 지옥을 내세워 겁박하는 사람도 없다. 허울 좋은 설교조차 들을 필요도 없이 마음 깊숙한 곳에 깃들어 있는 신성한 내 자신과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 작은 성소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성황당을 떠올리곤 했다. 우리 마을 앞에는 큼직한 소나무 아래 성황당이 있었다. 매년 대보름이 돌아오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빌며 제를 올렸다. 제를 올리고 나서 소지를 태우면서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다. 평소에는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돌을 던져 놓거나 돌탑을 쌓아가며 공손히 두 손 모아 생각없이 인사를 올리거나 소원을 빌었다.

그 성황당에서 제를 올릴 때까지만 해도 집안 곳곳을 신성시 여겼다. 부엌에도 장독대에도 곡간에도 신이 깃들여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과 함께 마을에서 신성시 여겼던 모든 것들이 미신으로 전락해 버렸다. 새마을 운동의 노래 소리와 함께 성황당은 허물어지고 고목들은 잘려 나갔다. 둑방에 삼삼하게 늘어서 있던 키 큰 미루나무가 베어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동산은 남포 터지는 소리와 육중한 블도저의 굉음과 함께 허물어져 갔다.

그 자리에 어느 날 갑자기 인사말도 없이 낯선 건물, 낯선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고 하늘과 땅에 의지해 농사짓던 마을 사람들은 농기구 대신 술잔을 들었다. 그렇게 마을이 도시화가 되어 가면서 농토며 신성시 여겼던 모든 것들은 돈으로 환산되었다. 하루 두세 끼 먹는 것으로도 만족하며 살았던 이전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먹고 살면서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끝없는 만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기에 이제 사람들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것은 돈이 되었다.

무엇인가를 신성시 여긴다는 것은 먹거리를 내주는 하늘과 땅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자연에 순응해 가며 하늘과 땅에 의지해 농사짓는 농부들의 마음자리이기도 했다. 북인도 코사니의 농촌마을에서 만난 성소는 오늘 아침 신성한 먹거리를 내준 농부, 지례씨 부부의 마음자리이기도 했고 오래전 우리 마을의 성소였던 성황당에서 제를 올리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마음자리였다. 그렇게 북인도 코사니 시골 마을에는 낙후된 문명이 아니라 오래된 우리의 신성한 과거가 있었다.


태그:#북인도 코사니, #인도 시골 농가 살림, #길거리 성소, #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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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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