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로미오와 줄리엣 지난 9월 13일, 배우 씨릴 니꼴라이와 조이 에스뗄이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커튼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각 연기한 이들은, 순수한 사랑의 대변자이자 기성세대가 초래한 비극의 희생자이다.

▲ 로미오와 줄리엣 지난 9월 13일, 배우 씨릴 니꼴라이와 조이 에스뗄이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커튼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각 연기한 이들은, 순수한 사랑의 대변자이자 기성세대가 초래한 비극의 희생자이다. ⓒ 곽우신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프랑스 오리지널 팀의 내한 공연이 단 한 달의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2009년 7월 국내 라이선스 공연 이후 6년 만의 귀환이었기에, 팬들은 언제일지 모를 재회를 기대하며 이들을 떠나보냈다.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동명 영화로 대중에게 익숙한 이 작품은 <십계>, <노트르담 드 파리>와 함께 프랑스 3대 뮤지컬로 꼽힌다.

관객 대부분이 이미 이 작품의 마무리를 '스포일러' 당한 상태이지만,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 '사랑한다는 것(Aimer)'이나 '세상의 왕들(Les Rois du Monde)' 등 훌륭한 넘버(노래), 무엇보다 만국 공통으로 먹히는 '사랑' 코드까지…. <로미오 앤 줄리엣>은 분명 관람하는 관객을 호강하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국내 관객과 오랜만의 만남, 그것도 내한이었기에 극장을 찾는 관객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2015 <로미오 앤 줄리엣>은 이러한 관객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서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다. 논란이 됐던 두 주연 배우의 연기와 창법은, 관객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영역이니 이를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로미오 역의 주연 배우 씨릴 니꼴라이가 이번 내한 공연 회차를 다 소화하지 못한 채 프랑스로 귀국하고, 얼터너티브(Alternative) 배우 로만 푸르크투오소가 나머지 공연에서 연기하게 된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싱크가 맞지 않는 자막, 잦은 음향 사고 등 완성도를 해치는 자잘한 흠들도 눈에 밟혔다. 라이선스 공연보다도 비싼 돈을 내고 온 관객에게, 2015시즌 공연이 그 보답을 제대로 했는지는 의문이다.

원작보다 풍성해진 인물의 곁가지

신부와 죽음 지난 9월 13일,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의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이 진행되는 가운데 신부와 죽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프레드릭 샤르뜨가 연기한 신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응원하며 계획을 짰으나, 죽음(오렐리 바돌)의 방해로 파국을 맞이한다.

▲ 신부와 죽음 지난 9월 13일,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의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이 진행되는 가운데 신부와 죽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프레드릭 샤르뜨가 연기한 신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응원하며 계획을 짰으나, 죽음(오렐리 바돌)의 방해로 파국을 맞이한다. ⓒ 곽우신


<로미오 앤 줄리엣>의 이야기는 언뜻 단순해 보인다. 예쁘고 잘생긴 10대의 청춘남녀.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이 둘은 뜨겁게 사랑하지만, 앙숙인 양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환경적 요인은 오히려 이들의 사랑을 더욱 애타게 할 뿐, 신부의 도움으로 몰래 결혼한 이 둘은 미래를 약속한다. 행복은 잠깐, 우발적 분노로 살인을 저지른 로미오는 베로나에서 추방당한다.

강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처지에 놓인 줄리엣은 신부의 도움으로 약을 먹고 죽음을 위장하여 로미오와 재회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비극적 운명은 이 계획을 뜻대로 실행되도록 놔두지 않는다. 신부의 편지를 전달받지 못한 로미오는 정말로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줄리엣 앞에서 자살한다. 마침 깨어난 줄리엣은 로미오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며 자신도 로미오를 따라 진짜 죽음을 선택한다. 이 비극이 끝난 후에야 몬테규와 캐플렛 두 가문은 화해를 다짐한다(본래 몬테규는 몬터규, 캐플렛은 캐풀렛으로 적어야 하지만, 뮤지컬 작품 내 표기를 따른다).

언뜻 직선적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에,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은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에 없던 부분들을 추가하여 생동감을 더한다. 일단 주변 인물들에 더 많은 이야기를 부여한다.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대사를 토대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인물들에 더욱 구체적인 설정과 사연이 첨가됐다.

티볼트의 톰 로스 지난 9월 13일,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커튼콜 현장.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배우 톰 로스가 인사하고 있다. 그가 연기한 티볼트는 캐플렛 가의 아웃사이더이자 줄리엣을 사모하는 인물이다. 머큐시오를 살해하는 그는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 티볼트의 톰 로스 지난 9월 13일,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커튼콜 현장.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배우 톰 로스가 인사하고 있다. 그가 연기한 티볼트는 캐플렛 가의 아웃사이더이자 줄리엣을 사모하는 인물이다. 머큐시오를 살해하는 그는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 곽우신


캐플렛 가의 인물들은 줄리엣을 중심으로 뻗어 나와 캐릭터를 구축한다. 사랑보다 현실을 택하고 자리에 오른 레이디 캐플렛은 줄리엣에게 로미오 대신 사랑 없는 결혼을 종용한다. 유모는 어렸을 때부터 줄리엣을 봐오며 '키운 정'을 갖춘 인물이다. 레이디 캐플렛과 달리 로미오와의 사랑을 응원하며 줄리엣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한다. 그리고 집안의 문제아이자 아웃사이더인 티볼트는 줄리엣을 원하지만, 끊임없이 소외·배척받으며 증오를 키운다.

몬테규 가의 인물 중에서는 역시 벤볼리오와 머큐시오가 가장 눈에 띈다. <노틀담 드 파리>의 그랭구와르처럼 극을 설명하는 벤볼리오는, 로미오의 절친한 벗이자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인물이다. 우정을 신뢰하는 그는 마지막까지 로미오를 위해 헌신하지만, 그의 노력은 운명의 개입으로 헛되고 만다.

철저한 자유주의자 머큐시오는 베로나의 통치자인 영주의 친척이지만 몬테규 가의 일원들과 어울려 지낸다. 그러나 파란색도 빨간색도 아닌 보라색 옷을 입은 그는, 엄밀히 말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똑같은 소외자에 광기 어린 눈을 하고 있지만, 머큐시오가 스스로 삶을 예찬하며 꿈을 꾸지만, "내 잘못이 아니야"라던 티볼트는 결국 증오를 주체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원작에 없던 죽음의 등장은 극 전체에 묘한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인간의 의지대로 만은 변하지 않는 세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형상화했다. <엘리자벳>의 토드처럼 극 중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로미오에게 전달되어야 할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며 이 비극의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죽음의 개입으로 완성된 비극이, 베로나 공동체 전체에 평화와 화합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단순히 '악역'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사랑 타령 이면에 감춰진 역사적 배경

머큐시오의 존 아이젠 지난 9월 13일, 서울 삼성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커튼콜 현장. 머큐시오 역을 맡은 배우 존 아이젠. 머큐시오는 몬테규 가의 인물이지만, 파란색이 아닌 보라색 옷을 입고 등장한다. 티볼트와 함께 아웃사이더적인 인물이지만, 비뚤어진 티볼트에 비해 순수하게 자유를 추구한 인물이다.

▲ 머큐시오의 존 아이젠 지난 9월 13일, 서울 삼성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커튼콜 현장. 머큐시오 역을 맡은 배우 존 아이젠. 머큐시오는 몬테규 가의 인물이지만, 파란색이 아닌 보라색 옷을 입고 등장한다. 티볼트와 함께 아웃사이더적인 인물이지만, 비뚤어진 티볼트에 비해 순수하게 자유를 추구한 인물이다. ⓒ 곽우신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은 마치 꽃다발 같은 작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그 주위를 풍성한 안개꽃으로 치장했다. 그러나 꽃들의 뿌리를 내려다보면 역사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속 몬테규와 캐플렛 가문의 갈등은, 이탈리아 제후 도시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13~14세기 기벨린당과 겔프당 간에 벌어진 싸움을 배경으로 한다. 때는 중세 후기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던 때. 로마 가톨릭이 유럽을 지배하던 중세가 저물고, 자유의지와 이성을 중시하는 첫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자유 무역이 발달하면서 지중해를 끼고 있던 이탈리아 도시들의 상공업이 발달한다.

부의 축적은 시민 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귀족 계급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무역으로 쌓은 부를 등에 업고, 새롭게 위세를 떨치는 신흥 가문은 귀족들에게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이는 중세를 지배하던 교권이 몰락하고, 왕권이 점차 고개를 드는 '파워 게임'과도 맞물렸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로마 교황이 이탈리아 북부의 실질적 지배력을 두고 다툴 때, 황제를 지지한 이들을 기벨린당, 교황을 지지한 이들을 겔프당으로 불렀다. 교회에 바칠 세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신흥 자본가 세력은 황제를 지지했고, 전통적으로 도시 내 기득권을 행사하던 귀족을 교황을 밀었다.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의 각 가문의 의상을 살펴보면, 가문의 차이를 색깔뿐만 아니라 복식으로도 독특하게 표현됐다. 프로그램 북은 캐플릿 경에 대해 "갑자기 출세해 벼락부자가 된 졸부"라고 설명한다. 신흥 상인 가문이자 기벨린 당 소속임을 암시하는 이들은, 신흥 가문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권위에 훨씬 더 집착한다. 여러 겹의 조끼, 꽉 조이는 코르셋 등 노출도 적고 더욱 엄격한 모양이다. 반면 몬테규 가문은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간결한 양식이다.

벤볼리오의 스테판 네빌 지난 9월 13일,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의 커튼콜. 벤볼리오 역의 스테판 네빌이 관객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 몬테규 가의 인물이자 로미오의 절친한 벗인 그는, 이 작품의 해설자이자 끝까지 살아남는 인물이다.

▲ 벤볼리오의 스테판 네빌 지난 9월 13일,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의 커튼콜. 벤볼리오 역의 스테판 네빌이 관객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 몬테규 가의 인물이자 로미오의 절친한 벗인 그는, 이 작품의 해설자이자 끝까지 살아남는 인물이다. ⓒ 곽우신


결론적으로, <로미오 앤 줄리엣> 내의 갈등은 당시 정치·사회적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새로운 시대정신이 태어났고, 그 과도기적 혼란기에서 발생한 권력 투쟁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은 신흥 상인과 전통 귀족 사이의 계급적 갈등에, <로미오 앤 줄리엣>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와의 다툼을 추가한다. 관습에 의한 결혼을 전통으로 여기는 기성세대와 이에 저항하며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 사이의 싸움이다.

'자유연애'는 인류 전체 역사에서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비교적 '최근' 트렌드이다. 국가와 사회가 성립한 이후, 꽤 오랫동안 결혼은 부의 대물림과 가문의 영향력 확대라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성립됐다. 캐플렛 경이 줄리엣을 파리스에게 결혼시키려 하는 이유도, 레이디 캐플렛이 줄리엣에게 이 결혼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모습도 이런 맥락이다. 기성세대에게 여전히 '사랑'은 요즘 젊은이들의 일시적 격정에 불과했다.

인간의 정신이 종교에 의해 지배받던 중세에는 이런 식의 통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중세가 끝나면서 종교는 정치적 영토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생활양식 전반에 대한 영향력 자체가 감소한다. 젊은 남녀 간의 연애를 터부시하고, 부모에게 순종해야 했던 관습이 옅어졌다. 상공업의 발달로 활력을 얻은 도시, 점차 퍼져가는 자유주의와 인간 본성에 대한 예찬은 연애의 개념조차 바꾸기 시작했다. 근대에 이르러 열매를 맺고 보급되는 자유연애 개념은, 르네상스 때부터 파종 되기 시작한 인식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런 농부 중 하나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거대한 다툼 속에 소외되고 버림받은 '인간'의 비극이자, 기득권에 의해 억압받은 당시 젊은 세대의 표상이다. 자유로운 사랑을 욕망한 이들의 정신은, 엄격한 기독교식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능을 긍정하고 낭만을 꿈꿨던 신사조의 탄생을 의미했다. 베로나의 젊은이들은 '세상의 왕들'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당당하게 쾌락을 추구하고 권력을 비웃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베로나, '안 고치는' 대한민국

줄리엣의 하트 지난 9월 13일,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의 커튼콜 현장. 로미오(씨릴 니꼴라이) 옆에서 줄리엣을 연기한 배우 조이 에스뗄이 관객에게 하트를 그리고 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씨릴 니꼴라이와 조이 에스뗄 모두 프렌치 오리지널에 걸맞은 연기와 노래를 선보인다.

▲ 줄리엣의 하트 지난 9월 13일,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의 커튼콜 현장. 로미오(씨릴 니꼴라이) 옆에서 줄리엣을 연기한 배우 조이 에스뗄이 관객에게 하트를 그리고 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씨릴 니꼴라이와 조이 에스뗄 모두 프렌치 오리지널에 걸맞은 연기와 노래를 선보인다. ⓒ 곽우신


<로미오 앤 줄리엣>의 비극이 더 안타까운 이유는, 이를 막을 수 있는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영주가 로미오를 강제로 추방하지 않았다면, 캐플렛 경이 줄리엣을 억지로 결혼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 둘은 다른 방식의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두 가문이 만들어 놓은, 서로를 증오하는 감정의 세습이다. 두 가문이 왜 사이가 좋지 않은 지에 대해서는 극 중 어디에도 제대로 서술되지 않는다. 어쩌면 몬테규 경과 캐플렛 경조차 둘 사이 증오의 명확한 시작을 모를지 누가 알랴. 그러나 이 '이유 없는' 증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두 가문 소속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한다. 색깔이 다른 옷을 입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젊은이들, 그들 역시 서로를 왜 미워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따라 그렇게 학습했고, 배운 대로 행동할 뿐이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적으로 규정한다. 둘 사이에 대화는 없고, 상대가 한 행동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다. 서로를 조롱하고 헐뜯기에 여념이 없는 두 집단의 모습은 그저 그 옛날 베로나의 모습에 불과할까.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북한과 남한, 보수와 진보, 호남과 영남의 갈등에서 이러한 '증오'의 비극은 반복되고 있다. 단순히 집단 간의 갈등을 넘어, 싸움의 원인이 기억나지 않음에도 확대·재생산된다. 기성세대가 만들고 방치한 갈등 속에서, 정작 피해를 당하는 건 젊은 세대이다. 기성세대의 대리전 양상으로 치달은 싸움은, 젊은 세대를 그저 '동원'의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결국, 쌓인 고름은 임계점을 넘어 터져 버린다. 그 과정에서 피를 흘리는 건 고름이 커질 때까지 방기한 어른이 아니라, 애꿎은 아이들이다. <로미오 앤 줄리엣> 속 몬테규와 캐플렛의 갈등에서 목숨을 잃은 건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티볼트, 머큐시오, 로미오, 줄리엣... 이들의 죽음 앞에서야 눈물 흘리며 손잡는 이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쳐' 봐야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계층·지역·이념·세대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때, 우리는 누군가의 피를 봐야만 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증오의 사슬을 끊을 것인가. 그나마 베로나가 대한민국보다 훨씬 나은 이유는, 피를 부른 후에라도 반성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화합하는 어른들의 태도에 있다. 아이들이 죽어도 서로 '네 탓' 공방만 하며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대한민국보다는, <로미오 앤 줄리엣> 속 수백 년 전 이탈리아 베로나가 훨씬 열려 있는 공동체였다.

"Aimer c`est ce qu`y a d`plus beau(사랑한다는 것, 그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네)
Aimer c`est monter si haut(사랑한다는 건, 저 높은 곳에 올라)
Et toucher les ailes des oiseaux(새들의 날개에 닿는 것)

Aimer c`est rester vivant(사랑한다는 건 살아 숨 쉬는 것)
Et bruler au coeur d`un volcan(화산처럼 불타오르는 것이지)
Aimer c`est plus fort que tout(사랑한다는 건, 그 무엇보다 강한 것)
Donner le meilleur de nous(서로의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

Aimer c`est bruler ses nuits(사랑한다는 건, 서로 밤을 불태우는 것)
Aimer c`est payer le prix(사랑한다는 건, 희생하는 것)
Donner unsens a sa vie(그리고 삶에 의미를 주는 것)."

사랑 그 이상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 하는 <로미오 앤 줄리엣>은 이처럼 사회적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쇳말로 다시 '사랑'을 제시한다. 우리는 두 갈등 집단 사이에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상상력 자체를 잃어버렸다. 몬테규와 캐플렛 가 사이에 사랑이 싹 텄듯이, 화해할 수 없다고 믿는 두 주체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 그 근저에 우리가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로미오 앤 줄리엣>의 대표 넘버 'Aimer(사랑한다는 것)'의 노랫말처럼, 사랑이란, 어두운 밤을 불태우고 살아가는 것이니까. 살아 숨 쉬고 희생하며 서로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니까. 인간이 이 밑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라 더 높은 세계로 향하도록 만다는 게 사랑이니까. 서로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로미오 앤 줄리엣>처럼 강렬하게 사랑의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이 있을까. 오리지널이든 라이선스든, 재공연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란다.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포스터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프렌치 오리지널 내한공연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지난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관객과 소통했던 이번 공연은, 갑작스레 주인공 로미오 배우가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포스터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 프렌치 오리지널 내한공연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지난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관객과 소통했던 이번 공연은, 갑작스레 주인공 로미오 배우가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 (주)마스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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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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