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수의견>포스터

영화 <소수의견>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영화가 끝날 무렵에야 깨달았다. 제목에 생각지도 못한 역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법정 드라마에 어울리면서 항변의 의미도 담아낸, 제법 잘 지은 제목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소수의견'이란 제목은 감독(실은 원작소설 작가)이 대한민국을 향해 던진 차가운 야유였다. 소수의견'과 '다수의견'이 뒤바뀐 채로 돌아가는 현실과 그런 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던진 야유. 이 영화, 제목부터 만만치 않다.

두 청년의 죽음... 누구에게 죄를 물을 것인가

#1. 철거민의 아들 시호
도시재개발로 철거가 한창 진행돼 이미 쑥대밭이 된 마을 한가운데 무너지다 만 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건물 주변으론 경찰인지 철거용역인지 알 수 없는 사내들이 각목을 흔들어대며 서성이고 있다. 법이 닿지 않을 것 같은 이 골목을 교복 차림의 청년 하나가 익숙하게 걸어 오른다. 철거민 재호의 아들 신우다. 그의 뒷모습이 위태롭다.

#2. 의무경찰 희태
이번엔 교회로 쓰였을 법한 건물 안, 전기가 끊겼는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옅은 빛 아래로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전투경찰복을 입은 청년이 밥을 먹고 있다. 강제철거를 지원하기 위해 재개발현장에 투입된 의무경찰 희태다. 동료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어두컴컴한 공간과 어울리지 않게 해맑다. 불안할 정도로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도심 한복판 법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공간에 두 명의 청년이 있음을 알리면서. 강제철거 위기에 놓인 철거민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아들과 그 아들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할 젊은 경찰.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청년은 모두 죽는다.

 영화 <소수의견>의 한 장면

영화 <소수의견>의 한 장면 ⓒ 시네마서비스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아들은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또 경찰은 동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상대를 사정없이 짓밟고 개처럼 물어뜯고 온 힘을 다해 쇠파이프로 내려친다. 벌건 대낮 도심 한복판에 만들어진 아비규환의 지옥. 그 참혹한 현장에서 두 명의 청년이 끝내 목숨을 잃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살인혐의로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영화는 두 개의 물음을 던진다. 이 두 청년의 죽음에 대해 국가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또 아들을 지키려다 경찰을 죽인 아버지에게 죄를 묻는 것은 온당한가?

평범한 이들의 익숙한 선택이 만들어 내는 폭력

대개의 사회성 짙은 영화들과 달리 실체로서의 거악을 내세우거나 그럴듯한 음모론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보는 이의 가슴을 짓누르는 영화 속 갈등이 알고 보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도 익숙한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가령, 경찰(희태)의 살인을 덮기 위해 철거용역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검사 재덕은 영화가 끝날 무렵 '음모'는 없었으며 모두 자신이 '단독'으로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누가 나한테 전화라도 한 통 걸었을 것 같아? 나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그는 그것이 국가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봉사'였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게다가 옳다는 믿음으로) 저지르는 일들이 누군가에겐 감당할 수 없는 폭력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소수의견>의 한 장면

영화 <소수의견>의 한 장면 ⓒ 시네마서비스


그렇게 누군가는 살인현장을 치우도록 지시를 내리고, 누군가는 초동수사자료를 보지 못하게 하고, 누군가는 사건이 적당한 판사에게 돌아가도록 하고, 누군가는 배심원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또 누군가는 사건 취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 모두가 마치 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사건을 정해진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모습을 짜임새 있게 그려낸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돋보이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영화가 마지막까지 숨겨둔 질문... 어느 쪽이 '소수의견'인가

영화에는 두 개의 재판이 등장한다. 철거민(재호)의 아들 신우의 죽음에 국가의 책임을 묻는 '100원 국가배상청구소송'과 그의 살인죄(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죄)를 가리는 재판. 이 가운데 재호의 살인죄를 묻는 재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는데 그 결과가 흥미롭다.

철거민을 무죄라고 여기는 주장이 '소수의견'에 그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국민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피고인의 정당방위 성립을 인정한다. 뜻밖의 결론,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재판부는 다시 '권고적 효력'만을 갖는 배심원의 판단을 뒤집어 재호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그리고 법정에 함께 앉아 재판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대체 어느 쪽이 소수의견인가'하는 의문. 영화가 마지막까지 숨겨두고 있던 질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영화 속 이야기다. 현실에서 같은 사건을 두고 의견이 어떻게 갈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 속 장면 장면들이 관객들로부터 적잖은 공감을 이끌어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동안 대놓고 얘기할 수 없었던 우리 사회의 불문율을 드러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법과 원칙이라는 운영원리 그리고 공공의 이익이라는 거스르기 힘든 가치가 사회 구성원 다수의 합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말이다.

다수와 소수가 뒤바뀐 우리의 현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불문율을 떠올리게 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

코레일에서 해고된 KTX승무원 34명이 회사를 상대로 근로자 지위를 인정해달라며 낸 소송에 대해 올해 2월 대법원이 1,2심 판결을 뒤집고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준 결정이 그렇다. KTX승무원들은 2004년 KTX가 운행을 시작하면서 '1년 뒤 정규직화 그리고 항공사 스튜어디스보다 나은 대우와 공무원 수준 대우'를 해주겠다는 코레일의 약속을 믿고 지원했지만 회사는 2년 뒤 약속을 깨고 자회사인 관광레저와 계약을 맺으라고 요구했다. 그것도 1년 단위의 계약을.

그리고 대법원 판결 한 달 뒤 34명 가운데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대에 승무원이 된 그녀는 11년이 지나 3살짜리 아이를 둔 엄마가 돼 있었지만 끝내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지난해 11월 쌍용차 해고 노동자 153명이 회사를 상대로 정리해고를 무효로 해달라며 낸 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2심 판결과 달리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준 결정도 마찬가지다. 2009년 쌍용차가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2646명의 노동자를 무더기 해고한 뒤 회계조작으로 위기를 부풀렸다는 이른바 '기획부도'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또 지금까지 26명의 해고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실직상태에서 얻은 병으로 숨졌지만 법원은 마지막까지 이들의 억울함을 외면한 것이다.

법원의 판단을 다수의 결정으로 대신할 순 없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의 결과가 사회 구성원 다수를 납득시킬 수 없다면 그것을 옳은 결정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영화 속 국민배심원단의 결정을 뒤집은 판사의 판결처럼 말이다. 나아가 어떤 판단을 마치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의 생각인 양 부풀리거나, 그와 다른 생각을 그저 '소수의견'으로 깔아뭉개려는 행태는 위험하다.

혹시 벌써 그런 위험천만한 일들이 곳곳에서 반복돼오고 있는 건 아닐까. 또 그러는 사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 사회의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의 자리가 뒤바뀌어버린 건 아닐까. 무엇보다 늘 자신의 생각을 '소수의견'이라 여기며 주눅이 들어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실은 우리 사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를 본 뒤로 떠나지 않는 의문이다.

소수의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