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체제의 살풍경을 그린 독일 영화 <타인의 삶>

감시체제의 살풍경을 그린 독일 영화 <타인의 삶> ⓒ 에스와이코마드


* 이 글에는 영화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현대 국가가 수행해야 할 기능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외교, 국방? 아니면 복지? 이런 기능들은 '국가'란 개념이 태동한 근대부터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것들이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국가는 구성원에 대한 감시·통제라는 새로운 기능을 얻었다. 감시·통제 하면 얼른 독재정권을 떠올린다. 실제 과거 냉전 시절, 공산주의 체제는 구성원들을 노골적으로 감시했다. 그러나 이런 행태가 비단 옛 공산주의 체제에만 한정됐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조차 감시와 통제는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국가의 감시기능은 권력 자체의 속성에서 비롯됐다. 권력은 늘 무한팽창을 추구한다. 현대 들어 국가의 담당업무가 폭주하면서 국가권력은 자연스럽게 비대해졌다. 권력의 팽창본능과 날로 진보하는 테크놀로지가 서로 화학 결합해 그물망 같은 감시망을 구축해 놓고선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감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국가가 거대한 조직망을 동원해 구성원들을 감시, 통제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2006년작 <타인의 삶>(원제 : Das Leben des Anderen)은 이런 살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1984년 독일민주공화국(舊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이다. 시점을 1984년으로 설정한 건 무척 의미심장하다. 왠지 '빅 브라더'가 군림하는 상황을 그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슈타지 요원 비즐리는 탁월한 심문기술의 소유자다. 그의 심문에 걸려들면 없는 혐의마저 사실로 둔갑한다. 국가관도 투철하다. 자신의 일이 곧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자부심에 넘친다. 상부는 그를 높이 평가한다.

비즐리는 상부로부터 게오르그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하달 받는다. 드라이만은 동독 최고의 극작가로 당시 서기장이던 에리히 호네커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서방언론의 기사를 탐독하며 공산체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종종 드러내기도 했다. 슈타지는 이 같은 성향 때문에 그를 감시대상에 올린다.

드라이만에 대한 감시망은 가공할 만하다. 슈타지는 집안 구석구석에 감시 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그의 동선과 지인들과 나누는 전화, 심지어 연인인 크리스타와 나누는 은밀한 이야기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들여다본다.

구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체제 유지 일등공신

이 대목에서 잠시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슈타지라는 기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의 메시지에 쉽게 공감할 수 없어서다. 슈타지의 공식 명칭은 '국가안전보위성(Ministerium für Sicherheit)'으로 1950년 창설됐다.

창설 이후 슈타지는 독일 공산주의 정권을 받치는 기둥 역할을 담당했다. 요원들은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정보를 캐냈다. 이들은 특히 첨단 기술과 억압적인 심문 기법을 동원해 주민들의 삶에 개입하고 사고를 통제했다.

슈타지의 악랄함은 첩보기술에서 더 생생히 드러난다. 이 기관은 무엇보다 인적 자원을 잘 활용했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1989년 현재 9만 1,015명의 공식 요원과 17만 3,200명의 비공개 요원들이 슈타지에 몸담고 있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 재단이 낸 통계에 따르면 슈타지 요원 1명 당 감시 인원은 약 180명에 달한다. 옛 소련 정보부(559명), 폴란드(1,574명), 구 서독 정보부(4,100명)와 비교해 볼 때 밀착감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수준이다.

친서방 성향의 극작가 드라이만도 슈타지의 밀착 감시를 받는다. 비즐리는 그의 모든 행동거지를 실시간으로 기록해 상부에 보고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인간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본연의 감정마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비즐리는 드라이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차츰 그에게 매료돼 간다. 영화는 비즐리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감정 변화를 차분히 그려낸다. 그의 심경변화는 독일 낭만주의 사조의 기폭제가 됐던 '질풍노도(Strum und Drang)'의 영화적 표현이다.

드라이만은 서독의 유력 주간지인 <슈피겔>지에 동독의 자살현황에 대한 기사를 기고했다. 동유럽 공산권 가운데 동독이 헝가리 다음으로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 기사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는 이때 당국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익명을 사용했다.

당국은 문제의 기사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기사가 체제의 치부를 드러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국은 드라이만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바로 이때, 비즐리는 드라이만의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나선다. 비즐리는 드라이만을 지키려 사찰보고서를 거짓으로 작성해 보고한다. 드라이만은 위기를 넘기는 듯 했다.

그러나 슈타지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슈타지는 크리스타를 붙잡아 무자비하게 심문을 가한다. 그녀는 강도 높은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비밀을 실토한다. 그녀가 입을 열기 무섭게 슈타지 요원들은 드라이만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녀는 이런 광경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죽음을 택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이 대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국가의 무차별적인 감시와 통제는 인간성 파멸로 귀결된다는 전언이다.

<타인의 삶>이 그리는 감시망은 무한팽창을 추구하는 권력의 속성과 현대의 첨단기술이 만나 탄생한 가공할 실체다. 이 괴물은 여전히 세상을 떠돌며 권력자들을 유혹한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조차 이 괴물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니다.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환생한 슈타지 망령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정부가 보여준 행적은 슈타지와 너무나 유사하다. 정부는 우선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하 지원관실)이라는, 법적 지위가 모호한 기구를 설치했다. 슈타지 역시 창설 초기부터 종말을 고할 때까지 수행 과제, 권한, 관할 범위 등이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지원관실이 벌인 일은 더더욱 놀랍다.

지원관실은 기업인, 정치인, 연예인 등 각계각층에 걸쳐 대상자를 선별하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했다. 대상자들은 대부분 예외 없이 정부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던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정부가 정부에 찬성하는 국민과 반대하는 국민으로 분류해 후자에 속한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한 것이다.

<타인의 삶>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비즐리는 당국의 눈 밖에 나 한직으로 밀려난다. 그는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가 베를린 장벽 붕괴를 맞이했다. 드라이만은 뒤늦게 그의 고마움을 알고 그에게 자신의 저서를 헌정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현실은 음울하다. 민간인 사찰에 개입했던 공직자들은 증거인멸을 시도했고, 이같은 정황이 드러나자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더욱이 해가 갈수록 국가 공권력의 감시망은 견고해지는 양상이다. 특히 경찰-검찰-국가정보원(국정원) 등은 대통령 비판 여론 원천봉쇄에 '올인'하는 모양새다.

최근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육군 5163부대가 이탈리아 보안업체로부터 감청 프로그램을 구입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악명 높은 악성코드로 노트북과 휴대전화는 물론, SNS 사용 내역까지 확인할 수 있다고 전한다. 5163부대는 문제의 보안업체에 한국 시장 점유율 90%에 달하는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이 감청이 되는지 실험을 의뢰했다고 하니 그 의도는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하다.

이미 미 연방수사국(FBI)은 휴대전화를 원격 조종해서 도청 장치로 전환하는, 이른바 로빙 벅스(roving bugs)라는 기술을 수사에 활용하고 있다. 미 법원도 이에 대해 합법이라는 판단을 내린 상황이다. 우리 정부 기관의 움직임은 이런 기술이 IT강국 한국에서도 머지않아 상용화될 것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쯤 되면 슈타지의 망령이 신기술을 입고 세계 도처를 떠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것만 기억하자. 국가공권력의 무분별한 감시와 통제는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의 영혼마저 처절하게 파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인터넷 기독교 신문 <베리타스>에도 동시 송고됐습니다.
슈타지 타인의 삶 5163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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