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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 대학 내에 있는 힌두 사원에서 만난 인도의 청춘 남녀.
 힌두 대학 내에 있는 힌두 사원에서 만난 인도의 청춘 남녀.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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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풀 꺾인 늦은 오후에 접어들면서 부어 있던 눈자위가 한결 좋아졌다. 아침마다 갠지스 강가에 나와 명상을 한다는 인도 중년 사내, 선재씨가 발라 준 가루약 덕분이었다. 그 덕분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손전화기에 틈틈이 메모해 온 글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오후가 되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며 숙소, 베란다를 할 일 없이 배회하던 프랑스 청년 필립마저 여자친구의 부름을 받아 일찌감치 숙소를 떠났다. 이것저것 볼 것 많은 '달려라 하니'는 이 선생을 비롯한 한국인 여행객들과 어울려 바라나시 어딘가를 기웃거리고 있을 것이었다(관련 기사 : 메시지 몇 번 만에 만난 그녀..."사모님이 알면 어쩌려고").

숙소에 홀로 남아 노트북을 펼쳐 놓고 사진이며 틈틈이 적어놓았던 메모 글을 대충 정리하고 나서 손전화기를 열었더니 '달려라 하니'로부터 두 통의 문자가 날아와 있었다.

'너무 슬퍼요. 송 선생님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문자 두 통...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오늘 오후 한국에서 평소 힘들 때마다 의지해 왔던 사람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 메인가트에서 홀로 앉아 있다는데 올 수 없냐는 것이었다. 문자가 날아 온 지 1시간이 넘었다. 노트북에 코를 박고 원고를 정리하고 있어 문자를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홀로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을까. 그녀의 문자는 누군가를 붙잡고 펑펑 울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와 메인가트로 향했다. 메인가트로 향하는 골목길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패기 발랄한 이면에 사람들 앞에서 쉽게 꺼내지 못하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달려라 하니'. 그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던 유일한 사람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상실감이 크겠는가. 바라나시에서 처음 만났고, 만난 지 나흘째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 받고 있는 내 아픈 상처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고마웠고, 보잘것없이 나약한 나를 의지해 위로 받고 싶어 하는 것이 고마웠다.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어둔 골목길을 헤쳐나가는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메인가트에서는 한창 갠지스 강, 어머니 강가에 경배를 올리는 푸자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천 년 세월 속으로 끌어당겨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인도의 전통 음악에 맞춰 제를 이끌어나가는 무희들이 향로를 들고 춤을 추고 있다. 무희들의 부드러운 몸짓과 향로에서 나오는 연기들이 천 년 세월을 어지럽게 이어주고 있다. 푸자 의식을 구경하는 수많은 인파에 파묻혀 문자를 날렸다.

'어디에 있습니까.'
'배를 타고 있습니다.'
'어느 쪽입니까.'
'무대 뒤편에 있습니다.'

가까스로 그녀를 찾았다. 그녀 옆에는 한국인 청년과 이 선생이 함께 있었다. 나와 연락이 닿지 않자 이 선생 일행을 불러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동시에 문자를 날렸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아픈 속내를 품어주지 못하고 말없이 이 선생 옆에 앉아 푸자 의식을 주시했다.

'달려라 하니' 그녀가 나를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솔직히 그녀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들이 곁에 있어 안심을 했다기보다는 묘한 질투심이 일고 있었다. 무대를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그 앞을 빈틈없이 가득 메운 사람들과 현란한 불빛들이 또다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부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는 그녀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기보다는 내 안에서 일고 있는 질투심 때문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달려라 하니'의 문자를 받고 바라나시 메인가트에 도착했을 때 푸자의식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달려라 하니'의 문자를 받고 바라나시 메인가트에 도착했을 때 푸자의식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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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대학교 안에 자리한 힌두 사원에 갔을 때도 그랬다. 사원에 들어서기 전에 자신의 아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던 이 선생이 사원을 나오면서 커다란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주었을 때 나는 사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보잘 것 없는 작은 꽃 한 송이를 주워 부끄럽게 내밀었다. 힌두 대학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며 이 선생이 내게 물었다.

"송 선생님은 뭘 먹으실래요."
"나는 두 사람 먹는 거 같이 먹을게요. 아무것이나 먹어도 상관없어요."
"왜 그리 우유부단합니까."
"음식 이름도 모르고 그냥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네요."
"거참, 나약하시네요. 줏대도 결단력도 없고..."

이 선생이 자꾸만 면박을 주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이글거리는 태양, 후덥지근한 날씨 탓일까. 내 귀에는 빈정대는 말투로 들려왔다. 바라나시에서 만날 때부터 그랬다. 나는 나이를 따져가며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에서는 나보다 나이가 세 살 정도 아래인 것으로 말해 놓고 인도에 와서는 동갑내기라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달려라 하니' 그녀 앞에서 종종 허세를 부리는 듯했다. 그가 나에게 나약하고 줏대도 결단력도 없다고 말하는 순간, 단순히 강렬한 햇빛 때문에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이방인'(알베르 카뮈의 소설)의 주인공 뫼르쏘가 떠올랐다. 더 이상 참지 못해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내가 나약하다고 결단력이 없다고 하는데 젊었을 때 나도 꽤 독종이었어요. 내가 흐물흐물 거리니까. 사람들은 군대 얘기가 나오면 내가 방위 출신인 줄 안다니까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 이래 봬도 고등학교 때 이미 태권도 사범을 했고, 군대에서는 특수부대에서 있었습니다."

흥분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그 지긋지긋했던 폭력의 시절을 과시하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강렬한 햇빛 때문이 아니라 '달려라 하니'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 앞에서 내 자신을 과시하며 이 선생에게 속좁게 대응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돈을 표시 나게 잘 쓰는 사업가인 그는 본래 친절한 성품이었다. 반면에 무언가를 내게 끊임없이 가르치려 했다.

그런 말 많은 이 선생과 '달려라 하니'와 함께 어딜 가게 되면 속좁은 나는 '참을 인'자를 머릿속에 새기며 가능한 입을 닫고 있어야 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미묘하게 벌어지는 이런 부질없고도 치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눈병도 눈병이었지만 오후 내내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푸자 의식을 보고 나서 우리 일행은 바라나시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달려라 하니'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 근처의 작은 라이브 음악 카페로 향했다. 나는 이 카페에서 50루피 정도의 인도의 전통 음료 '라씨'나 좀 무리해서 캔 맥주 한 개를 시켜놓고 인도의 전통음악을 감상하곤 했다.

카페에는 내가 눈 인사로 사귀었던 인도 악사가 있다. 그는 우리 악기로 치자면 대금에 해당하는 인도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카페로 가는 도중에 나를 어리석은 인간으로 몰아 세워가며 끊임없이 가르치려 들고 있는 이 선생에게 또다시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전직이 선생님이었습니까?"
"아니요."
"왜 자꾸만 가르치려고 합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나를 궁지에 몰거나 면박을 주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냥 자신의 성품대로 친절을 베푼다는 것이 그렇게 비쳤을 것이었다. 신이 있다면 신이 그를 통해 내 자신을 바라보게 하려는구나 싶을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옹졸한 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이 선생을 통해 나를 보았다. 이 선생이 나를 대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나 또한 이 선생과 다름없었다. 얼치기 진보주의자인 나는 나와 정치적인 성향이나 성품이 다른 아내를 내 식대로 따라 주기를 바랐다. 옳고 그른 잣대를 들이대 가며 끊임없이 가르치려 했다. 아내는 그런 내가 지긋지긋했을 것이었다. 화가 났을 것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인도 사내가 악기 연주를 하고 있다가 나를 알아보고 눈인사를 한다. 나는 그를 바라나시에 머물면서 서너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내 나이와 엇비슷해 보이는 그는 나를 만나면 영어로 '어이, 나의 친구'라고 반기곤 했다. 그는 바라나시를 중심으로 한 자리에서 한두 달 정도 머물러 가며 리쉬케시, 마날리 등의 인도 각지를 떠돌고 있다고 했다.

연주를 마치고 난 그는 카페 손님들에게 음반을 권한다. 내가 손을 들어 보이자 그는 우리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 쪽으로 다가와 내게 다정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자신의 연주곡이 담겨 있는 음반을 내밀었다. 두 장에 300루피라고 한다. 동행 했던 한국인 청년이 인도 사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한국말로 빈정거렸다.

"이거 음질도 안 좋을 것인데, 너무 비싸요. 백 루피면 살 수 있을 텐데."
"한때 밴드를 했다는 젊은 사람이 그러면 쓰나. 내가 살 거니까 걱정 마요."
"송 선생님이 나무에 거름을 많이 주면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한국인 청년은 내가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한국인 여행자들을 나무랐던 것을 비꼬고 있었다. 나는 내 친구를 욕하는 것 같아서 날을 세워 말했다.

"그런 경우 하고는 다르지요, 값싼 음식을 골라 하루에 한두 끼 먹는 내가 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니까요. 나는 이 분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또 노래하는 내 아들이 생각나서 구입하려는 것입니다."
"몇 푼 안 되는데 내가 사 드릴게요."

이 선생이 불쑥 나섰다.

"내가 꼭 사고 싶은 이유가 있어서 그러니까 내가 살게요."
"제가 사드린다니까요."

숙소 근처 라이브 카페에서 인도의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인도 사내의 음반.자존심 강한 그와 서너 차례 만났다.
 숙소 근처 라이브 카페에서 인도의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인도 사내의 음반.자존심 강한 그와 서너 차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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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이름을 묻지 못했던 연주자는 어쩌면 한 물간 그렇고 그런 뜨내기 연주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분명 자존심 강한 연주자였다. 내가 처음 이 카페에서 그의 연주를 들었을 때였다. 그가 연주를 마치자 한 서양인이 거지에게 적선하듯 10루피를 건네자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거부했다. 그 따위 돈 필요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자존심 강한 고집스러움이 좋았다. 그에게서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떠돌이 악사의 자존심을 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좋아 몇 차례 이 카페를 찾았던 것이었다. 그와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그는 거지들처럼 더러운 골목길 그늘에 주저앉아 상가 사람들과 어울려 호탕하게 웃어가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탈한 그의 모습이 좋았다.

그는 노래 부르는, 뮤지션 아들이 있다는 나를 반겼다. 만날 때마다 진심이 담긴 어조로 '나의 친구'라고 불러주었던 그에게 바라나시를 떠나기 전에 작은 선물을 건네주고 싶었다. 그게 바로 그의 자존심이 담긴 음반을 사주는 것이었다. 그의 연주 음악도 연주 음악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자존심을 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한때 뮤지션이었다는 한국인 청년이나 이 선생이 알 리가 없었다. 내가 지갑을 꺼내자 이 선생이 한사코 막아섰다.

"제가 사드린다고 해도 자꾸 고집 피우시네."
"아들한테 선물하려고요. 이건 내가 살게요."
"거 참, 정말 고집 세시네."

이 선생이 빈정대는 말투로 한사코 내 지갑을 막아 세웠다. 결국 나는 부질없는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 같아서 지갑을 닫아야 했고 인도 악사들을 향해 이놈, 저놈 함부로 말하던 이 선생이 돈을 지불했다. 그는 배짱 두둑한 사내가 되었고 나는 다시 우유부단한 어중정이가 되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참 까다로운 인간이었다. 이 선생이 차려놓은 음식을 놓고 그냥 고맙다고 넙죽 받아먹으면 그만인데 영양가를 따져가며 제 입맛대로 반찬 투정이나 하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바라나시에서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나를 바로 보게 해준 이들

우리는 함께 다니지 말았어야 했다. 서로 피곤하게 할 따름이었다. 그 중심에 '달려라 하니'가 있었다. 이들은 내가 얼마나 까다롭고 어리석인 인간인지를 바로 보게 해주었다. 인도까지 와서 한심하게 질투심 따위로 남 탓이나 하지 말고 네 갈 길이나 똑바로 가라 이르고 있었다.

어디 이들뿐이었는가. 화장터에서 만난 장작 쌓는 노인의 부드러운 손짓이며 무지막지한 아내에게 내쫓기고도 자신을 탓했던 한국인 이혼남, 낯선 내게 아무런 조건 없이 짜이 한 잔을 사주었던 인도 청년과 소박한 옷 가게 요기, 매일 아침 가트에 나와 명상을 한다는 포목점 사내며 나의 속좁은 자비심을 일깨워 주었던 거지들에 이르기까지 시원한 한 줄기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수 많은 인연들, 바라나시에서 만난 모든 인연이 나를 바로 보게 해주었다.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었다.

다음 날, 바라나시를 떠날 시간이 돌아왔다. '달려라 하니'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냥 헤어지기가 아쉽다며 이 선생이 이른 아침 갠지스 강 가트에서 만나자고 했다. '달려라 하니'와 함께 짐을 꾸려 가트로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가트 한 옆에서 요가 학원생들이 온갖 요가 동작을 선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말 없이 한 동작 한 동작을 지켜 보았다.

요가 수업을 마친 어린 청춘들이 갠지스 강가에서 작은 등잔을 들고 각자의 소원을 빌고 나서 그 등잔을 강물에 띄운다. 나는 강물에 몸을 맡기는 등잔을 바라보며 내 안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나,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한 중년 사내를 떠올린다. 그 중년 사내는 화장터의 주검들 앞에서 쭈그려 앉아 있다.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서 춤추며 흘러가는 저 갠지스 강가에서 그림자처럼 서성거리며 내내 흐느끼고 있다. 그 중년 사내가 내게 말을 건네고 있다.

갠지스 강가에서 이른 아침 요가를 하고 있는 요가학원생들.
 갠지스 강가에서 이른 아침 요가를 하고 있는 요가학원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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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수업을 마친 소년들이 작은 등잔을 들고 각자 소원을 빌고 있다.
 요가수업을 마친 소년들이 작은 등잔을 들고 각자 소원을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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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불행도 한순간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저 강물처럼 밤낮없이 흘러갈 뿐
그럼에도 시간의 고삐를 잡고 떠나시게
눈물이 강물처럼 넘쳐나는 허무의 끝으로
혼자서 떠나시게나...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인연 닿는 데까지 함께 떠날 '달려라 하니'가 있었다. 나처럼 그녀 또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상처를 안고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하지만 여자 혼자 몸으로 낯선 길을 떠나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길 동무로 삼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거기에 내가 있었다. 나 역시 유쾌 발랄한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인도에 온 지 20일째 접어들고 있다.

마음 한편에서는 '혼자서 가라' 이르고 있었지만 현지인들과 언어 소통이 어려운 데다가 여전히 혼자라는 것이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채워줄 그녀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필요로 하는 길동무가 되기로 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해 놓은 하르드와르 (Hardwar) 행 열차를 타기 위해 바라나시 역으로 향했다. 하르드와르에서 인도 요가의 고장이라 할 수 있는 리쉬케시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바라나시에서 하루 이틀 더 머물 것이라는 이 선생이 역까지 따라나섰다.

사실 '달려라 하니'는 이 선생과 함께 떠나야 했다. 고행자처럼 재미도 없고 즐길 줄도 모르고 거기다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나보다는 바삐 몸을 움직여 여기저기 기웃기웃 참견하며 신나게 놀고 먹고 즐길 줄 아는 이 선생과 함께 여행을 떠났으면 더욱더 신나는 여행길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선생이 바라나시에 오기 전에 우리는 이미 기차표를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내게 부담이 될 정도로 과분한 친절을 베풀어준 이 선생과 헤어져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그 '악명 높은 인도 열차 타기' 관문을 통과해 좌석에 앉았다.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난생 처음 열차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소년처럼 가슴이 설렜다. 수행자들의 요람이라 일컬어지는 리쉬케시는 20여 년 전,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나는 거기서 눈 맑은 동굴 수행자를 따라 나서고 싶었다.

강물에서 바라본 바라나시 가트 풍경. 바라나시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이 남 탓하지 말고 내 자신을 바로보라 이르고 있었다.
 강물에서 바라본 바라나시 가트 풍경. 바라나시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이 남 탓하지 말고 내 자신을 바로보라 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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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달려라 하니', #푸자의식, #질투심, #또 다른 나, #바라나시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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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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