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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5년 '재일동포 간첩단 학원침투사건'으로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이후 감형·석방된 이철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변호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와 지지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이철 씨는 "무죄 판결을 받아 기쁘기야 하지만 내 40년은 어떻게 되는 거냐. 뭔가 좀 허탈감도 느꼈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1975년 '재일동포 간첩단 학원침투사건'으로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이후 감형·석방된 이철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변호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와 지지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이철 씨는 "무죄 판결을 받아 기쁘기야 하지만 내 40년은 어떻게 되는 거냐. 뭔가 좀 허탈감도 느꼈다"고 소회를 밝혔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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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못한 선거법 유죄 판결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던 지난 9일 오후 2시 40분,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서관 현관 앞에 한 남성이 섰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와 꽃다발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이철(67), 40년 전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은 재일동포다.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부장판사 위현석)는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간첩 등 이씨의 혐의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 마지막 공판 전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은 점점 굵어져가고 있었다.

"앞으로 5년, 10년 뒤에 '내가 언제 재심 무죄를 받았더라'하고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는데 '아 원세훈이 붙잡힌 날!'로 생각하면 잊지 않을 것 같다."

다음날 오후 종로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이철씨는 "나는 무죄를 받고, 나를 (간첩으로) 날조하고 괴롭힌 사람들은 유죄를 받고, 참 인상적인 날이었다"며 웃었다.

고문에 못 이겨 '거물간첩' 된 예비신랑


1973년 대학원에 진학하며 한국으로 온 그는 1975년 12월 11일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구속영장도 없이 이씨를 감금했고 고문했다.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예비신랑은 서둘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씨는 "수사관들이 '너 빨리 이거 인정하고 나가야 할 거 아니냐' 하기에 맞으면서 '예예'했다"고 말했다.

그냥 매 맞는 수준은 아니었다. 고문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씨는 머뭇거리면서 당시 상황을 조금씩 들려줬다. 설명하는 내내 입술이 마르는지 자꾸 침을 발랐다.

"어… 무조건 들어가면 빤스까지 다 벗긴다. 알몸 상태에서 구타를 당하는 거죠. 때리고, 차고, 잠도 못 자게 하고. 심지어는 야전침대에 나무기둥이 있었는데, 그걸 뽑아서 날 마구 때리니까 그 탄탄한 나무가 부러졌다. 그리고 벌거벗은 내 성기를……붙잡아서 담뱃불로 지지려고 하고…. 제일 힘들었던 것은…… '네가 (혐의를) 인정 안 하면 약혼녀랑 장모를 데려와서 네 눈앞에서 범하겠다, 그리고 한강에 버려도 우리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협박을 했다. 그래서 내가 '제발 그러지 마세요'라고 정말로 빌었거든요. 그걸 생각하면…제일 괴로웠는데…."

그렇게 그는 '거물간첩'이 됐다. 약혼녀마저 간첩방조죄로 끌려와 징역 3년 6개월에 처해졌다. 크게 놀란 이씨의 아버지는 두 사람이 서울구치소에 들어간 날 밤 세상을 떴다. 어머니마저 1979년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은 직후 돌아가셨다. "두 분 다 원래 건강하셨는데 충격을 받아서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이씨의 눈동자가 촉촉했다.

재일동포는 독재정권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씨는 "우리는 (정부가)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었다"며 "남북 대치 상황을 실감 못한데다 재일동포의 절반이 북한과 가까운 조총련계였고, 일본 학생운동은 좌익색채를 띠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비밀경찰이 우리를 잡아가서 때리면 먼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 역시 온갖 고초를 겪었고 1988년에서야 가석방으로 나왔다. 13년이나 늦어진 결혼식도 이때 올릴 수 있었다. 

그동안 이씨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고교 동문들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구명운동단체를 만들었다. 한때는 일본 전역에 17개 지부까지 있었던 '이철 후원회'는 10만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열심히 움직였다. 여전히 활동 중인 후원회원들 가운데 몇몇은 이씨가 무죄 판결을 받는 순간에 함께했다. 10일에는 안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도 같이 다녀왔다.

사실 이씨는 재심을 청구할 뜻이 없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재일동포 양심수 동우회'를 만들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던 재일동포들의 명예회복에 힘썼다. 이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면서 그 대상자를 '재일동포 양심수 전원'으로 했고, 특별법 제정도 추진했다. 개개인이 아닌 재일동포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을 바꾼 사람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재일동포변호인단' 이석태 변호사였다. 장경욱 변호사와 함께 2011년 일본을 방문한 이석태 변호사는 이씨에게 "특별법은 언제 될지 모르는데, 일단 재일동포 사형수가 무죄를 받으면 다른 피해자들도 무죄 받는 것 아니냐"고 설득했다. 마음이 움직인 이씨는 그해 10월 31일 재심을 신청했고, 2015년 2월 9일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았다.

"40년 만의 무죄로 허탈한데... 한국도 조짐이 이상하다"

그런데 이씨는 무죄 선고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쁘기야 하지만 '내 40년은?'하고 허탈감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이씨는 그 세월 가운데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고맙다"고 했다. "감옥 안에서 청년들이나  장기수들과 생활하며 나도 분단의 무게를, 독재의 아픔을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는 이유였다. 물론 잃은 것도 많지만, 이씨는 감옥 생활은 수사관들이 망가뜨린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시간이었다고도 했다.

과거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살아온 날의 절반 이상을 과거와 싸워온 그였다. 그런데 이씨의 눈에 지금 한국의 상황은 자신이 싸워온 지난 시절과 닮아가는 분위기다. 그는 걱정스러워했다.

"많은 이의 희생으로 사회가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생각했는데, 그 열매들이 어디로 갔는지… 참 희미해졌다. 다시 이상한 사회로 돌아가려는 듯한 조짐마저 보인다."

이씨는 "정말로 옛날의 희생이 무엇이었는지 국민들이 깊이 생각해야 하고, 그 희생을 헛되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1시간 40분 가량 인터뷰하는 내내 '과거'를 이야기하던 그가 처음으로 '현재'와 '미래'에 한 부탁이었다.

[일문일답 전문①] "매맞고 거물간첩으로... '약혼녀 협박' 제일 괴로웠다"
[일문일답 전문②] 야만의 시대 지났지만... "옛날의 희생이 희미해져가는 듯"


태그:#이철, #재일동포 간첩사건,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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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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