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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등 사건 재심에서 무죄 선고받은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 이철 씨 (왼쪽)와 변호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
 40년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등 사건 재심에서 무죄 선고받은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 이철 씨 (왼쪽)와 변호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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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과거 얘기로 돌아가면, 기록을 보니 구명운동이 어마어마했던 것 같다. 10만 서명운동도 있었고, 수많은 후원회가 생겼다고.
"제가 큐슈의 인길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역사가 꽤 있는 곳이다. 그곳 동문들 가운데 도쿄나 오사카에서 사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이 움직였다, '날조된 사건 같은데 우리가 그것을 하나씩 벗겨야겠다'며 구명운동단체도 만들고. 내가 정말로 고마운 게 재일동포 양심수 후원회는 주인공이 출소하면 자연스레 없어졌는데 이철 후원회는 아직까지 있다. 최고로 많을 때는 일본 전국에 지역별로 17곳이 있었다. 그분들이 10만 서명운동 하고, 일본 국회의원 140명에게서 탄원서 받고, 추운 겨울에 전단지 뿌리고, 역 앞에서 단식까지 하고, 내 고향 시장에게 담화문 받고…. 그런 일을 수도 없이 했다.

내가 가톨릭 신자니까 어떤 신부님이 미 국무성 차관보에게 얘기해서 그 차관보가 '이철 사건을 알아보라'고 지시도 했다더라. 이때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우리 장모랑 부인을 직접 만나고, 법무부에 공문을 보내 묻기도 했다. 또 우리 가족들이 도쿄변호사회에 인권구제신청을 냈더니 변호사회가 직접 조사를 했다. 이때 그들이 (북한에 다녀왔다는 혐의와 달리) 내 알리바이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니까 더 힘이 났다."

장경욱 변호사 : "도쿄변호사회가 당시 보고서를 냈는데, 공소사실에서 방북 부분을 무너뜨리는 내용이었다. 지금 봐도 이 보고서 내용이 아주 치밀하다. 이철씨랑 접선한 사람이 부산영사관에서 일했다고 허위 진술했다는 점도 다 밝혀냈다. 그래서 일본 국회에서도 정부에게 '이철 사건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설명해봐라'고 요구했다(기자 주 - 이철씨를 변호한 장 변호사는 10일 인터뷰 때 함께 했다)."

"왼쪽이 사형장인데 오른쪽으로 가더라, 그제야 숨 쉬었다"



- 도쿄변호사회도 나서고, 구명운동이 활발해서 그나마 감형이 됐나보다.
"나는 감형되던 날 사형당하는 줄 알았다(웃음). 오전 4시 반인지, 다섯 시인지 아무튼 캄캄했는데 갑자기 방문이 덜커덕 열리더니 교도관이 '이철이 나와!'했다. 나는 '사형집행이구나'해서 벌떡 일어났고, 같은 방 사람들도 놀라서 깼다. 그 직전에 하루에 6명씩, 이틀 동안 12명이 사형 당했고, 몇 개월 전에 청소하는 분이 '이철씨 내가 오늘 사형장 청소하면서 이철이란 종이가 붙은 관을 봤다'고 가르쳐줬다. 그래서 100% 사형 집행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옥사 밖으로 나와서 사형장 쪽으로 가는데, 바로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더라. 왼쪽이면 사형장인데. 나는 그때도 '바로 사형장으로 데려가면 내가 반항할까봐 속이려나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가던 방향을 안 바꾸기에 교도관에게 나를 어디로 데려가냐고 물었다. '오늘이 8·15 아니냐, 이날 부르는 건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이겠어?'하더라. 그제야 내가 정말로 크게 숨을 쉬었던 걸 기억한다. (긴장한 탓에) 계속 숨을 안 쉬고 있었던 것 같다."

- 1988년에 가석방으로 풀려날 때도 깜짝 놀랐겠다.
"물론 놀랐죠. 가석방 소식은 하루 전날 들었다. 재소자 가운데 취사반장이 있었는데, 다음날 식사를 준비하는데 내가 있던 사동에 밥이 하나 적더란다. 그래서 취사반장이 어떻게 알아보니까 내일이 개천절인데, 내가 가석방 대상이었다며 알려줬다. 그런데 개천절 당일에 세수하러 갈 때까지 나를 부르지 않아서 헛소문인가 했다. 할 수 없이 씻고 있는데 보안과 부장이 와서 '이철이 어딨어? 빨리 짐 챙기고 나와'라더라. 보안과 사무실에 가서 얼른 옷 갈아입고 뒤도 안 보고 나왔다. '나를 이렇게 내보내줄 리가 없다, 이 사람들이 착각한 것 같은데 붙잡기 전에 빨리 나가야겠다' 싶었다. 뒤에서 '이철이 니가 아니야' 할까봐(웃음)."

- 일본으로 돌아가서 '재일한국인 양심수 동우회' 만드는 등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섰지만 정작 본인 재심 청구는 늦어졌다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진실화해위)에도 개인이 아닌 동우회 이름으로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고 들었다.
"진실화해위에 신청 자체는 개인으로 했는데, 재심 대상자를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 양심수 전원'이라고 했다. 그게 진실화해위가 재일동포 사건을 조사한 계기가 됐다(기자 주 - 전명혁 전 조사관은 2011년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2009년 진실화해위에 재일동포 간첩사건전담팀이 꾸려졌지만 진실화해위 활동이 끝나면서 조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일부 피해자들의 사건만 진실규명 결정이 나왔다고 밝혔다. 이후 민변과 함께 재심을 진행한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는 약 30명이며 현재까지 18명의 무죄가 확정됐다).

나는 개별적으로 재심을 진행해야 한다면 어느 세월에 다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재심 제도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고, 그 많은 양심수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광주 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처럼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일괄 처리되길 바랐다. 그때까진 내 재심 청구도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일(3월 11일) 장경욱 변호사와 이석태 변호사가 재일동포 양심수 재심을 시작하자고 찾아왔다. 이 변호사가 '특별법 요구하는 것도 좋은데 언제 될지 모른다, 일단 재일동포 사형수면 재일동포 정치범 중에서도 대표격이니 그 사람이 (재심) 무죄를 받으면 다른 사람도 무죄 받는 것 아니냐'며 나를 설득했다. 그래서 2011년 10월 31일에 재심 신청하고, 2013년 2월 7일에 개시 결정이 났다. 공판은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되어서 어제 끝났고."

"나도 분단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지난 1975년 '재일동포 간첩단 학원침투사건'으로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이후 감형·석방된 이철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이철 씨는 "무죄 판결을 받아 기쁘기야 하지만 내 40년은 어떻게 되는 거냐. 뭔가 좀 허탈감도 느꼈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1975년 '재일동포 간첩단 학원침투사건'으로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이후 감형·석방된 이철 씨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이철 씨는 "무죄 판결을 받아 기쁘기야 하지만 내 40년은 어떻게 되는 거냐. 뭔가 좀 허탈감도 느꼈다"고 소회를 밝혔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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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일인데도 기억이 생생할 수밖에 없어서 이런 저런 얘기가 쏟아진 것 같다. 딱 40년 만에 무죄를 받았다. 어떤 40년이었나.
"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가끔 강연 요청을 받는다. 그럼 '감옥살이밖에 할 얘기가 없는데, 그래도 괜찮겠냐'고 말한다. 감옥 안에서 체험한 일들이 내게는 원동력이 됐다. 거기서 많은 청년, 학생들을 만나고 통일을 염원했다가 수십 년째 갇혀있는 장기수 선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마음이 뿌듯했다. 분단의 아픔을 사는 사람들,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 속에 끼어있다는 점이,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들과 귀한 세월을 같이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나도 분단의 무게를, 독재의 아픔을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참 뿌듯한 거죠.

물론 잃은 것도 많다. 감옥살이를 한 세월이 13년이다. 참 억울하게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신혼 생활, 많은 친구들, 젊음, 청춘도 잃었다. 하지만 그보다 귀한 것들이 내게 주어졌다. (수사 과정에서) 친구들 이름을 대고, 약혼자마저 감옥에 들어오는 등 내 운명이, 인간성이라는 게 엉망이 되어버렸는데 감옥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래서 징역살이를 참 고맙게 생각하고, 나를 집어넣은 사람한테도 감사해야하지 않나 싶다. 어딜 가든 징역살이한 것을 감추지 않는다. '나는 전과자다. 하지만 도둑질이나 파렴치범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다.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살며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

- 40년 전에 재일동포 간첩사건으로 득을 봤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공안정국 등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국 상황은 어떻게 보는가.
"치열한 민주화 운동, 청년·학생·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어서 민주정권 10년이 나온 것 아닌가. 사회가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수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옛날 희생으로 얻은 열매들이 어디로 갔는지… 참 희미해졌다. 다시 이상한 사회로 돌아가려는 듯한 조짐마저 보인다. 정말로 옛날의 희생이 무엇이었는지 국민들이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을 헛되게 하면 안 된다.

지금 검사, 판사들도 민주화를 이룬 사회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법조인이) 된 것 아니냐. 선배들 덕분에 자신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도 보수로 회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 많은 판사들 중에는 예전에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전부 유죄 선고하고, 사형 선고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전부 다 물러가고 사회가 거듭 나야 한다."

- 어제 상황이 희한했다. 본인을 잡아갔던 중앙정보부, 지금의 국정원 전직 원장이 유죄가 나와서 법정구속됐다.
"그러게요(웃음). 앞으로 5년, 10년 뒤에 '내가 언제 재심 무죄를 받았더라'하고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는데 '아 원세훈이 붙잡힌 날!'로 생각하면 잊지 않을 것 같다(웃음). 나는 무죄를 받고, 나를 그렇게 (간첩으로) 날조하고 괴롭힌 사람들은 유죄를 받고. 참 인상적인 날이었다."

[인터뷰] "원세훈 붙잡힌 날, 40년 만에 무죄 나왔다"
[일문일답 전문①] "매맞고 거물간첩으로... '약혼녀 협박' 제일 괴로웠다"


태그:#이철, #재일동포 간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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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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