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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보니까 아들 같던데, 온 가족이 9일 선고 공판을 보러 입국한 건가.

"우리 아들, 딸에게 '아버지가 무죄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아마 평생 기억으로 남을 테니까 같이 (한국) 가자'고 했다. '그런데 아빠가 유죄 나오면 어떻게 할래?' 이런 얘기도 하면서(웃음). (자녀들이) 재일동포 3세여도 한국말은 조금씩 하니까 '무죄'라는 말을 알아듣는 모습이었다. 그때 (몸에) 전류가 흘렀다고, 찌릿했다고 하더라. 아이들에게 자세한 얘기는 안 했지만, 아빠가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들어갔고, 엄마도 같이 고생했다는 건 알고들 있다."

- 가족들과 함께 4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여태까지 재일동포 양심수 동우회 회원들이 각자 (재심을) 신청해서 20명 정도 무죄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때마다 '무죄가 되어서 기쁘다'하면 정말 그럴까 했는데, 물론 기쁘기야 기쁘지만… '그러면 내 40년은 어떻게 되는 거냐.' 뭔가 좀 허탈감도 느끼게 되더라. 또 아직까지 차분하게 생각을 안 해봐서 그런지, 별다른 감회 같은 건 없어요. 그래도 오늘 (돌아가신) 장모님께 보고 드렸고, 일본에 가서 부모님 산소 다녀오고, 형제들과 축하 맥주 한 잔 하면 기쁨이 서서히 차오를지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갑자기 북한 간첩 사형수가 무죄라고 하니까, '아 그래요?'하는 기분이다."

- 옛날 기사를 검색해봤는데 찾기 힘들더라.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면 당시에 꽤 큰 사건이었을 것 같은데.
"제 사건은 아마 신문에서 다뤄지지 않았을 거다. 1975년 11월 22일에 '재일동포 간첩단 학원침투사건'이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사건이 있었다. 관련자들 모두 얼굴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는데, 나도 그 기사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한 달쯤 뒤에 갑자기 나를 연행해갔다. 우리는 11·22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워낙 사건이 커서 한두 달 뒤에 추가로 잡혀간 사람들은 크게 보도를 안 했던 것 같다. 2년 전 재심에서 무죄 나왔던 강종헌씨도 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잡혀갔다(관련기사: "37년 만의 무죄 판결... 정치적으론 아직도 '유죄'")."

"정부가 다루기 쉬운 재일동포들, 집중적으로 희생돼"

- 1970년대에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제법 많았더라. 80년대 들어서도 끊이지 않고.
"재일동포들이 그 당시부터 아주 집중적으로 희생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다루기 쉬운 사람들 아닌가. 한국에 특별히 친척도 없고,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남북이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머리로는 느끼지만 피부로는 못 느끼는 면이 있다. 또 일본에는 사회당, 공산당도 있고, 당시 재일동포가 약 60만 명이면 절반은 북한과 가까운 조총련계였다. 하지만 도쿄나 오사카 코리아타운에 가보면 조총련계와 남한 쪽 민단계가 뒤섞여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받은 교육 내용 역시 한국에 비하면 민주적이었고.

내가 1967년 4월에 일본 중앙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가 그 시절 일본 학생운동의 메카였다. 이때 미·일 안보조약을 두고 학생운동의 열기가 엄청 높았다. 점거하고, 지프차 불태우고, 최루탄도 많이 맞고. 다들 진보성향이고 좌익 색채를 띠고 있었으니 마르크스나 레닌 책도 봤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자본론>은 못 봤지만(웃음). 그런 책들을 읽고 '한국에 가보자, 한국의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통일에 관심을 갖고 살자'는 마음을 지닌  재일동포 청년들이 태반이었다. 나도 1971년 한국에 들어와서 1년 동안 우리말을 배웠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973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 입학했다.

상황이 이러니 비밀경찰이 우리를 잡아가서 때리면 먼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부로선 이용가치가 높았던 거다. 독재정권은 사회가 어지러워지면 우리를 진정제로, 희생양으로 삼았다. 한국사회에서는 '빨갱이, 간첩'이라고 하면 뿔 달린 줄 알고 무서워하지 않냐. 우리 집사람도 빨갱이는 진짜 뿔이 있는 줄 알았다더라. 그러니까 우리를 간첩이라고 발표하면 효과가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당했다. 하도 재일동포를 써먹어서 나중에는 다른 나라를 거쳐 밀입북한 간첩사건을 발표하더라."

- 그런데 사형선고까지 받을 정도로 본인 혐의가 무거웠던 것인가.
"사형 선고받을 만한 일은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런데 고문당할 때, 수사관들이 다짜고짜 '너는 북에 몇 번 갔다 왔어? 어떤 지령을 받았어?'라며 막 때렸다. 나는 처음에 일본에서 읽은 책이나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 등을 말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수사관들이 '어 이놈 봐라? 정말 재밌는 놈이네'하면서, 막 때리면서 점점 사건을 크게 만들어갔다.

나는 두 달 있으면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릴 사람이었는데…. 부인 여권 문제로 혼인신고를 미리하고 새 이불 만들고, 구두랑 시계도 사고, 이제 식만 올리면 됐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와야 해서 수사관들이 '너 빨리 이거 인정하고 나가야 할 거 아니냐' 하기에 매 맞으면서 '예예'하고 시키는 대로 말했더니 거물간첩이 됐다."

"내 성기를 붙잡아서 담뱃불로 지지려고 하고"

40년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등 사건 재심에서 무죄 선고받은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 이철 씨
 40년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등 사건 재심에서 무죄 선고받은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 이철 씨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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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텐데, 혹시 고문당하던 상황이 어땠는지 설명해줄 수 있는지….
"어… 무조건 들어가면 빤스까지 다 벗긴다. 알몸이 되어가지고, 수치스러운 상태에서 구타를 당한다. 때리고, 차고, 잠도 못 자게 하고. 심지어는 야전침대에 나무기둥이 있었는데, 그걸 뽑아서 날 마구 때리니까 그 탄탄한 나무가 부러졌다. 그리고 벌거벗은 내 성기를…(말하길 주저하면서 입술에 침을 바름) 붙잡아서 담뱃불로 지지려고 하고….

제일 힘들었던 것은…(조심스러워함) … '네가 (혐의를) 인정 안 하면 약혼녀랑 장모를 데려와서 네 눈앞에서 범하겠다, 그리고 한강에 버려도 우리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협박을 했다. 그래서 내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모든 걸 시키는 대로 할 테니 그렇게 하지마세요'라고 정말로 빌었거든. 그걸 생각하면…제일 괴로웠는데…."

- 당시 부인도 간첩방조죄로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장모님이 두 사람 옥바라지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또 일본에 계신 부모님들도 충격으로 세상을 뜨셨다고.
"우리…어… 우리 아버지는…(천천히 말을 이어감)… 내가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쓰러지지 않았는데, 약혼녀까지 연행됐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왜 며느리가 끌려가느냐'며 쓰러지셨다가 일주일 정도 뒤에 나와 집사람 둘 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날 밤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어… 몇 번씩 면회를 오셨다가… 내가 1979년도 8월 15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고 대전교도소로 옮겨진 지 얼마 안 됐을 때 돌아가셨다. 내가 잡힌 뒤 한 5년 사셨나? 부모님 다 충격 받아서 돌아가신 거다. 원래 건강하신 분들이었는데.

그런데… 음…(눈시울이 촉촉함) 우리 장모님은, 내가 왜 고맙게 생각하냐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사윗감이랑 같이 (감옥) 안에, 그것도 간첩죄로 들어갔다. 장모님은 내가 사형 선고받으니까 법정에서 기절하시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를 원망하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으셨다. 보통은 '이철 때문에 우리 가족이 망했다'며 울고불고 할 거다. 내가 1심 끝날 때까지 면회 금지였는데 수시로 양말, 내복 같은 것 넣어주시고, 면회가 가능해져서 장모님 뵈었을 때 '아이고 어머니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괜찮다, 건강하게만 있으면 괜찮다'고 하셨다. 나를 원망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하시더라.

장모님 때문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사형이 집행되어도 '저 나쁜 놈이 죽었지만 영혼만은 구원됐다'고 안심하실 것 같았다. 또 장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는데, 참 좋아하시더라.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님께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때 추기경님의 말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이 젊은 재일동포 학생들이 왜, 무슨 일을 했기에 사형선고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2000년 전에 예수님도 당시의 국가보안법으로 죄 없이 돌아가셨으니까 여러분도 용기를 내라.' 나로선 충격적이었다. '아 이 분은 우리가 죄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구나.' 이후 진짜배기 가톨릭 신자가 됐다(웃음)."

"세월호 희생자 영정 앞에서 많이 울었다"

- 장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장모님이 정말 나한테 잘해주셨거든요. 민주화운동하는 학생들도 우리(재일동포)랑 친해지면 손해볼까봐 가까이 안 하려고 했다. 그때는 우리가 (독재정권에) 이용당했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진짜 간첩인 줄 아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 장모님이 1985년에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 생기자 이미 출소한 약혼자와 함께 활동하셨다. 그러면서 계속 재일동포 양심수, 이 억울한 사람들의 존재를 호소하셨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 가족이나 구명운동하는 사람들이 오면 안내해주시고, 통역해주시고. 결혼 전 오사카에 사셔서 오사카 사투리를 아주 잘하셨다(웃음). 한국에선 사람들이 '장모, 장모' 했는데, 일본에선 '재일동포 구속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만큼 어머님이 열심히 하셨으니까. 내가 출소하고 나서도 '빨리 명예회복 되어야 하는데' 하시다가 딱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제 무죄 받고 어머니께 보고하러 다녀왔다."

- 성묘 다녀오는 길에 안산에 들렀다고.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헌화하고, 향도 피우고 왔다. 세월호 참사는 엄청 큰 불행이죠.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냐. 나는 오늘 학생들 영정이 끝에서부터 끝까지 있는 걸 보면서 '아휴 이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는데… 선박회사나 비뚤어진 시스템 때문에 희생됐구나' 했다. 그리고 300명 넘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것을 그 앞에 서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겠더라. 우리 가족하고, 이번 재판을 함께 보러 일본에서 온 친구 10여 명이 함께 갔는데 다들 영정 앞에서 많이 울었다. 너무 가슴 아프더라. 정말로 정부가 보상을 떠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분명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인터뷰] "원세훈 붙잡힌 날, 40년 만에 무죄 나왔다"
[일문일답 전문②] 야만의 시대 지났지만... "옛날의 희생이 희미해져가는 듯"


태그:#이철, #재일동포 간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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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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