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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류돼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했던 강종헌씨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찻집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36만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에 대한 심경을 밝히고 있다.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류돼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했던 강종헌씨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찻집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36만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에 대한 심경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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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만이다. 1976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하다 석방된 강종헌(61)씨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1975년 11월 서울대·고려대·부산대 등에 재학 중이던 16명의 학생을 간첩혐의로 조작해 기소한 사건이었다. 강씨는 이들 중 한 명으로 지목돼 간첩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88년 양심수 석방조치에 따라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10년 이 사건을 조작된 것이라고 결론 내렸고, 법원은 2011년 강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난 24일 서울고법 형사합의3부(부장 최규홍)는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민간인을 상대로 수사권이 없는 육군 보안사령부 소속 수사관들이 경찰단계의 수사를 담당한 것은 불법수사에 해당한다"며 "보안사 소속 수사관들이 수집한 증거는 모두 위법증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수사기관이 수집한 증거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고문·가혹행위 등 위법적으로 수집된 것이어서 증거능력이 없다"고 설명했다.

"'억울하다' 외쳐도 들어주지 않아... 여론재판 견뎌내는 게 제일 힘들었다"

강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여론재판이 제일 힘들었다며 이번 판결은 부분적 명예회복일 뿐 사회, 정치적으로는 아직 유죄라며 착잡한 심정을 내비쳤다.
 강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여론재판이 제일 힘들었다며 이번 판결은 부분적 명예회복일 뿐 사회, 정치적으로는 아직 유죄라며 착잡한 심정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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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끝난 이날 오후 서울 종로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강씨를 만났다. 그가 한 첫 말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였다.

"사형이 확정된 게 1976년 3월이었습니다. 이번 무죄를 받을 때까지 37년이 흘렀습니다. 오늘 재판부의 결정을 들으며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저도 힘들었지만 재판부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건의 방대한 기록을 재판부가 성의껏 다 보고 면밀히 검토해서 공정한 재판을 해주었습니다."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일어난 당시 강씨는 재일동포로서 모국 유학을 와 서울대 의대에 재학하던 중이었다. 보안사는 그를 '유학을 가장해 한국에 침투한 간첩'으로 보고 수사 대상자에 포함시켰다.

강씨는 그때의 고문 수사를 "수사기관이 원하는 답을 얻기까지 인간을 파괴해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원시적인 구타를 당했고 나중에는 전기고문까지 겪었다. 결국 각종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던 이씨는 수사를 견디지 못하고 거짓으로 혐의를 인정해 사형을 선고받게 됐지만, 다행히도 재판부는 강씨의 무고함을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강씨는 이번 재판을 통해 "부분적인 명예회복을 이뤘을 뿐"이라고 했다. 지난해 4·11 총선 당시 강씨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18번으로 출마하자, 새누리당 등은 교도소에서 함께 복역했던 김현장(63)씨가 '강 후보는 간첩이 맞다'는 공개서한과 진술을 내놓은 것을 근거로 공세를 폈다.

재판부 "'강종헌은 간첩'이라는 김현장 주장, 증거능력 인정 못 해"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류돼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했던 강종헌씨(왼쪽)와 일본인 단체 '한국양심수를지원하는전국회의' 소속 이시이 히로시 사무국장(오른쪽)과 와타나베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찻집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박근혜 당선인이 재일 한국인 양심수의 구제를 위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만들어 직권으로 사건의 진상규명과 조사활동에 임해달라고 요구했다.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류돼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했던 강종헌씨(왼쪽)와 일본인 단체 '한국양심수를지원하는전국회의' 소속 이시이 히로시 사무국장(오른쪽)과 와타나베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찻집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박근혜 당선인이 재일 한국인 양심수의 구제를 위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만들어 직권으로 사건의 진상규명과 조사활동에 임해달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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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두 사람의 복역 상황' '강씨가 김씨에게 이런 말을 할 객관적 이유' '대화 내용의 합리성과 객관적 사실과의 일치 여부' 등을 고려할 때 김씨의 진술은 증거능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강씨는 "일부 보수 언론에서 나를 '종북 주사파'인 듯 묘사한 보도를 보면,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나를 공작원으로 보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근거도 없이 '이 놈은 간첩이다, 대남공작원이다'라고 고발한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칭찬받고 보호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발당한 사람이 '사실이 아니다, 억울하다' 외쳐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재심 판결을 받기까지 이러한 여론재판을 견뎌내는 게 제일 힘들었습니다."

김현장씨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던 <조선일보>는 강씨의 이번 무죄판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이날 강씨와의 만남에는 일본에서 그의 재판을 도왔던 '한국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의 와타나베 카즈오 대표와 이시이 히로시 사무국장도 함께했다. 두 사람은 법원 판결에만 역사청산을 맡길 게 아니라, 한국 정부가 강씨와 같은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시대 배경 때문에 발생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일어난 당시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한창이었습니다. 체제 유지와 정권 안정을 위해 북한위협론을 제기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재일교포 유학생들이 이용당한 것입니다." (이시이 사무국장)

"당시 사건 때문에 상처 크게 받아서 감히 나서지 못하는 피해자들도 많습니다. 사건 피해자를 한꺼번에 재심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제도적인 특별조치를 정부에서 해야 합니다. 한 건씩 재판해서 언제 과거사 문제를 청산합니까." (와타나베 대표)

강씨 외에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중에는 재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없어지면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재심 청구조차 힘들어졌다고 한다. 이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다시 설치해 정부 직권으로 당시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활동과 구제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와타나베 대표는 이러한 내용을 올 2월 말 들어설 박근혜 정부에 청원할 계획이다. 

강씨 역시 '100% 명예회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 당시 재일교포 피해자들의 무고함을 입증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강종헌이란 사람은 아직 사회적·정치적으로 유죄입니다. 다음 정부가 나서서 제 억울함을 풀어줬으면 합니다."


태그:#강종헌,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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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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