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100%의 적중률을 자랑하지만, 그것을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그저 확률게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그러한 망각, 혹은 착각이 무슨 상관이랴. 때에 이르러 조용히 사라지면 그뿐이니 말이다.

문제는 매사 군림하려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잊을 때이다. 그들 간의 싸움은 때로 평범한 이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들에게 권력은 악행의 도구일 뿐이며, 대부분 자신과 주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쓰인다. 자신들의 목숨이 아홉 개나 되는 듯 불구덩이로 내달리는 사람들. SBS 월화드라마 <펀치>에 등장하는 많은 이들의 면면이다.

'나쁜 놈' '덜 나쁜 놈' 논리, 인간에 대한 근원적 회의일까

'펀치' 공식포스터

▲ '펀치' 공식포스터 ⓒ SBS


주인공 박정환(김래원 분) 검사는 수많은 비리의 기록이 담긴 오션캐피탈 회장 김상민(정동환 분)의 자술서로 아내인 신하경(김아중 분) 검사를 감옥에서 빼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면 수많은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걸 알고 있는 신하경은 원칙과 법의 논리를 내세운다. 서로 다른 의미에서 막다른 길에 선 두 사람의 선택이었다.

두 사람의 생각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극렬히 부딪힌다. 그들에게 적당한 타협이란 어불성설이다. 박정환은 "그래봤자 똑같은 놈들이 또 그 자릴 꿰찰 뿐, 소용없는 일이다. 하경아. 세상 사람들에겐 그저 내가 잘되면 좋은 나라고 내가 잘 못되면 나쁜 나라야"라는 자조적인 말을 내뱉는다.

사랑하는 형 이태섭(이기영 분)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검찰총장 이태준(조재현 분)은 '나쁜 놈'에서 '더욱 나쁜 놈'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래왔던 그와는 별개로, 만천하에 '좋은 놈'으로 각인돼 있던 법무부장관 윤지숙(최명길 분)은 아들의 병역비리를 묻은 과거가 드러나며 드라마 초반의 최대 반전과 충격을 이끌어냈다.

37살의 한 검사가 유명을 달리하자, 악덕검사 조강재(박혁권 분)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아까운 나이지. 그러나 어쩌냐. 세상이 비좁은데"라고 읊조린다. 그 좁디좁은 세상에 여전히 발붙이고 있는, 악행이 기반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아비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전작 <황금의 제국>에서도 그랬듯, 박경수 작가는 <펀치>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선과 악의 단편적 구도로 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판단은 절대적으로 유보되어야 한다. 특정한 일들이 그 마각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그마저도 언제든지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드라마를 보는 이들에게 한 치의 마음의 여유도 허락지 않으며, 극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양면성, 다면성에 대한 통찰이라는 점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박정환이 말했듯 역시 '그놈이 그놈'이라는 근원적인 회의적 시각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정의는 없다'?...마지막 보루를 상징하는 신하경 검사

'펀치' 신하경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배신과 음모 속, 그의 꿋꿋함은 한껏 빛을 발한다.

▲ '펀치' 신하경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배신과 음모 속, 그의 꿋꿋함은 한껏 빛을 발한다. ⓒ SBS


그러나 작가의 그러한 시각에 대해 생길 수 있는 약간의 의문들은 드라마에 한껏 귀기울여본다면 조금은 풀릴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막바지에 선 이태준과 박정환, 두 사람은 결국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욱 크나큰 불법, 탈법을 저지르게 된다. 권력의 정점에서도, 그 언저리로 밀려난 후에도 그들에게 우주의 중심은 오로지 자신들뿐인 것이다. 주변의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뛰어넘는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줄곧 원칙을 고수하며,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자신과 가족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겹지만 팔을 바깥으로도 한껏 구부릴 수 있는 사람. 바로 신하경을 통해서 말이다.

신하경에게 검사의 지위는 그저 법을 올곧이 집행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일반적 통념으로는 너무나 고지식하고 또 너무나 융통성 없는 인물이다. 조금만 구부러져도 되는데, 약간만 옆길로 새면 모든 것이 편할 텐데. 탄식이 나올 정도의 그 꼿꼿함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할 지경이다.

아무리 그놈이 그놈이고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이라지만, 그것이 세상에 정의가 '없다' '사라졌다'고 말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신하경은 그 마지막 보루다.

작가는 또한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평범하며 인간적인 삶의 소중함에 대해 줄곧 말하고 있다. 전작 <황금의 제국>에서는 그것이 늘 욕심을 내려놓은 뒤 살러 가자던 '함평농장'으로 상징되었고, 이번 작품에서는 어머니와의 여행, 귀향 등으로 더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박정환은 죽음 앞에서 선 지금에야 가족의 안위를 떠올린다. 딸의 유치원 졸업식, 초등학교 입학식 참석은 이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고작(!) 가족의 안위라니! 우선순위에서 당연히 뒤로 밀려있던 일들, 그러나 그것은 벼랑 끝 마지막 선택임과 동시에 많은 이들이 잊고 있을지 모를 소박한 행복의 상징이 된다.

<펀치>를 통해 들여다보는 우리네 세상은 고양이처럼 아홉 개의 목숨을 가졌다 착각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의 장이다. 마치 내일이 없는 듯 오늘에 취해 살지만, 실은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알 수 없는 삶. 그 끝에 서서도 결코 이기심과 착각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의 밑바닥에 그래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늘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지점을 통렬히 꿰뚫어내는 것. 바로 작가 박경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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