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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3일 <무한도전>이 처음 세상에 나왔습니다. 한국 방송 환경을 감안하면, 한 예능 프로그램이 10년 가까이 생존한다는 것은 분명 드문 일입니다. 같은 PD가 9년 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또한 놀랍습니다. <무한도전> 10주년을 맞아 이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김태호 PD라는 한 사람을 통해 살펴봅니다. 김태호 개론 1편에서 이어집니다. [편집자말]
김석윤 PD, KBS에서 <달려라 울 엄마>, <올드 미스 다이어리> 등 시트콤을 히트시켰고, 영화 감독으로도 재능을 보여 <올드 미스 다이어리>를 극장에서 선보인 바 있다. 김명민, 한지민이 주연한 영화 <조선 명탐정 - 각시 투구꽃의 비밀>은 누적 관객 수 479만 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김태호는 대학생 시절 처음 그를 만난다.

"KBS에서 방송 실습을 했어요. 그 때 거기서 한창 잘 나가시는 김석윤 PD를 만났어요. 실습 2주차인가? 끝나고 마지막 술자리에서 '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회사, MBC에 가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막연하게 MBC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12년 5월 12일, 여의도 MBC 방송대학)

이들의 이름은 2011년 나란히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스타 예능 PD들의 종편행이 한창 '러시'를 이뤘던 그 때, 김석윤 PD의 JTBC 이적 소식에 더해 김태호의 종편 이적 여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김태호는 트위터를 통해 "무한도전의 진화는 제 인생의 중요한 도전이다. 따라서 지금 저는 무한도전을 떠날 수 없다"고 일축했다. 공교롭게도 김태호가 MBC 입사 10년 차가 되는 해였다. 10년, 조연출 시절 스스로 설정한 PD 도전의 한계점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합격하고, MBC 나타난 '돌아이'

2012년 9월 29일 방영된 <무한도전> 297회 '무한상사'편에 출연한 지드래곤. 당시 신입 사원 면접 에피소드를 연출하면서 김태호 PD는 자신의 MBC 면접 당시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2012년 9월 29일 방영된 <무한도전> 297회 '무한상사'편에 출연한 지드래곤. 당시 신입 사원 면접 에피소드를 연출하면서 김태호 PD는 자신의 MBC 면접 당시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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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태호, 한참을 돌아서야 MBC를 택한다. 방송을 꿈꾸는 사람이 <동아일보>에 지원했다는 것도 의외지만, 애써 최종 합격을 해놓고 외면했다는 것 또한 확실히 평범한 선택은 아니다. "어째 남의 옷 입은 느낌만 들어서", 김태호가 김혜리 기자에게 밝힌 변심 이유다.

"인턴 합격자 12명에 들었다고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어째 남의 옷 입은 느낌만 들고 한숨만 나오는 거예요. '나 글 쓰는 건 싫은데…'싶고. 정장을 입고 오라는 지시도 마음에 걸렸어요. 결국 '내일 못 갈 거 같습니다'라고 전화했더니 '왜요?' 묻더라고요. '마음이… 안 내키네요'라고 대답했어요. (2009년 12월 22일, <씨네21> 인터뷰)

그리고 김태호는 전화를 끊고 울었다고 했다. 인생을 그르친 게 아닐까 두려워서. 만약 그가 두려움에 밀려 '정장'을 입었다면, 우리는 <동아일보> 김태호 기자를 보게 됐을지도 모른다. <동아일보> 김태호 기자라, 아, 생각만 해도, 흠흠...

SBS나 제일기획에 들어가지 못한 사연은 황당, 그 자체다. 김태호가 입사 원서를 마감일 자정까지 접수하는 줄 알고 친구랑 마냥~ 놀지 않았다면 SBS <무한도전>이 나올 수도 있었으리라. 재학증명서 하나 빠졌다고 '나를 설마 떨어뜨리랴'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금 김태호의 명함에는 제일기획이라고 찍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열차 시간표를 착각해서 학과 동기들을 뛰게 한 '서울역 구보 사건'을 연상시키는 '허술함'들이다.

어쨌든 이 정도면,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이 그를 MBC로 이끌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MBC와의 첫 만남 또한 그러했다. 노랑머리에, 피어싱 그리고 스니커즈를 신고 면접 현장에 나타난 김태호, 또 그런 '돌아이'를 덜컥 합격시킨 MBC 면접관. 모두 '대다나다(대단하다)'. 다음은 <무한도전>을 잉태시킨 그 날의 만남.

아니, 회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레게 머리가 휙~

김태호 PD
 김태호 PD
ⓒ 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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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인: "너는 면접 본다는 놈이 이렇게 하고 오면 어떻게 하냐?"
김태호: (속으로) '이걸 가지고 문제삼는 회사는 다닐 생각 없는데?'
신종인: "너, 그 옷 어디서 샀니? 그 신발 짝퉁이지?"
김태호: (속으로) '아니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인신공격이야?'

그동안 세간에 알려진 그 날 만남을 재구성한 것이다. 훗날 김태호는 당시 신종인 예능국장(전 MBC 부사장)이 MBC 입사 후에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는 인물 보고 뽑았다. 50명 중 한 명은 '그래야 되지 않을까'해서 뽑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 회상했다. "모범생만 뽑으면 천편일률적이라 개성 강한 '돌아이'들을 뽑아보자"는 것이 당시 신 국장의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남과 다름'은 예능계에서 꼭 필요한 바탕이다. MBC에 입사해 <웃으면 복이와요> 등을 연출하고 춘천 MBC 사장, MBC 프로덕션 사장 등을 역임한 유수열 PD 역시 "속칭 '돌아이' 기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PD가 말하는 PD>란 책에서 "색깔이 있는 인간이라야 한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무미건조하고 몰개성적인 인간이기를 거부해야 한다"며 "자유로운 외양의 PD가 있어도 이상한 사람이라고 흉보지 말자"고 부탁한다. 앞서 신 국장의 '면접 기준'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하지만 김태호의 '돌아이' 기질은 동료 PD들조차 흠칫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한 김민식 PD가 기억하는 '조연출 김태호'다.

"제가 <논스톱> 연출하고 그럴 때, 조연출(김태호 PD)로 회의실 바깥 다니는 걸 가끔 보고 당황했어요. 나는 MBC 개그맨 새로 들어온 애인 줄 알았거든요. 갑자기 레게머리 파마가 지나가서(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신입 조연출이라고 하더군요." (2012년 5월 12일, 여의도 MBC 방송대학)

입사 1, 2년 차는 패션 투쟁기 그리고...

개성을 (웬만하면∼) 존중해주는 방송국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선'은 있기 마련. 뒷말이 안 나올 수 없다. "아무리 예능 쪽 PD라고 해도, 나이 든 분들은 좀 그런 면에서 보수적일 수도 있는데, 회사 상사들이 그냥 가만히 두더냐"는 질문에 김태호는 "거의 입사 1년, 2년 때는 투쟁기였다"며 이렇게 말한다.

"반바지 같은 거 입고 다니는 것도 되게 좀 혼나고 그랬었는데, 가끔 이렇게 편집실에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절도 잘 모를 때가 많아서 좀 아쉽더라고요, 청춘이. 그래서 편집실에만 있지만, 어떨 때는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 입고 편집하면 그래도 나름 마음가짐은 휴가 간 것처럼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짓도 좀 해 보고 그랬었는데요." (2010년 12월 4일, 손석희가 만난 사람)

김태호가 그런 짓까지 했던 걸, '돌아이' 기질 때문만으로 볼 수는 없다. 김민식 PD는 "조연출 생활 1년이면 천하장사도 폐인이 되어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는 전설적인 노동 강도의 드라마국을 피해 찾아간 부서가 예능국이었지만, 나의 판단 착오였다"며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리얼해서 그대로 옮긴다.

"특히 아침 7시부터 다음날 저녁 7시까지 36시간 동안 마라톤 편집 작업을 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웠다. 새벽에 두어 시간,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긴 하지만, 밤샌 다음날은 하루 종일 멍한 상태에서 편집을 해야 했다. (중략) 일하다 안 풀리면 좀 쉬기도 해야 하는데, 방송 시간은 꼬박 꼬박 다가온다. 우선 조연출이 1차 편집을 마쳐야 PD가 수정도 하고, 자막 의뢰도 할 수 있고, 음악 작업이며 효과 작업도 들어갈 수 있으니...모든 스태프들이 조연출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좀만 쉰다, 토막잠이라도 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2006년, PD가 말하는 PD, 부키)

20대 마지막 크리스마스의 '데드 포인트'

2012년 5월 MBC 파업 당시 여의도 공원에서 열렸던 MBC 방송대학. 김민식 PD(사진 오른쪽)와 김태호 PD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 '러브 하우스'를 할 당시 연출과 조연출로 함께 일했다
 2012년 5월 MBC 파업 당시 여의도 공원에서 열렸던 MBC 방송대학. 김민식 PD(사진 오른쪽)와 김태호 PD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 '러브 하우스'를 할 당시 연출과 조연출로 함께 일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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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김태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느낌표> 시절에는 일주일에 하루 퇴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고 한다. 1시간짜리 방송을 위해 A4 용지 100장 분량의 자막을 일일이 손으로 적기도 했고, 밤을 새워가며 애써 편집한 테이프가 불합격 통보와 함께 선배의 손을 떠나 '공중 부양'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김태호는 "싫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 차림 편집'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 아니 '옷부림'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그의 표현을 빌리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돼가면서" 칭찬을 받는 일도 늘어났다. "사람들이 '잘 한다, 잘 한다' 하니까 신이 나서 재미있게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일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태호의 회상.

"체력에 한계가 오더라고요. 편두통에 이어 구토, 결국 성모병원에 걸어가서 죽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간호사가 '그렇게 아프신 분이 여기까지 걸어오셨어요? 더 아프시면 오세요'라고 하더군요. 순진하게 다시 회사로 돌아왔죠. 그런데 모니터가 2개인데 4개로 보이는 거예요. 고열에 시달리다 바로 입원했어요. 2주 진단을 받았는데, 이번 주 녹화 재밌다며 가겠다고 우기기도 했어요. 결국 20대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병원에서 보냈죠." (2011년 4월 5일, 아레나 5주년 A-Talks)

누구나 한계에 부딪히면 두 글자를 떠올린다. 포·기 또는 여기서 스·톱. 김태호도 그랬다고 한다. 방송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렇게 소모적으로 몸이 망가지는데, 뭐 크게 반응도 없는 것 같고, 유학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김태호에게 '데드 포인트'는 20대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찾아 온 셈이다.

김태호도 예외 없이 '10년 법칙'

2006년 MBC 방송연예대상 '네티즌이 뽑은 올해 최고의 프로그램상' 수상 당시 모습. 조연출 시절 포기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던 '데드 포인트'를 극복한 결과였다
 2006년 MBC 방송연예대상 '네티즌이 뽑은 올해 최고의 프로그램상' 수상 당시 모습. 조연출 시절 포기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던 '데드 포인트'를 극복한 결과였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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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포인트, 마라톤 용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이 극에 달하는 순간, 많은 마라토너들이 떠올리는 말이다. 허나 그 고비를 넘기면 고통은 오히려 줄어들고 다시 힘이 생긴다고 한다. 따라서 데드 포인트는 곧 위기이자 기회다. 실제로 이봉주는 데드 포인트를 즐긴다고 밝힌 바 있다. "내가 힘들면 남도 힘든 거니, 오히려 차이를 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김태호는 어떻게 이겨냈을까.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그저 "앞으로, 5년, 10년만 다시 도전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하버드대 하워드 가드너가 쓴 '창조하는 사람들'의 결론도 어찌 보면 평범한 것이었다. 피카소,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최고의 천재라 불린 그들도 10년을 자기 분야에 바쳤음을 증명해 낸 책, 이른바 '10년 법칙'이다.

김태호도 10년 만이었다. MBC 입사 10년 만에 대학 시절 자신의 '실습 멘토'였던 김석윤 PD와 종편 스카우트 '1순위'에 자리매김한 그 때가 말이다. 김태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10년째 MBC에 입사해서 일하다 보니까 항상 과정은 힘들더라고요. 정말, 과정이 힘들어서 떠난 사람도 있고, 과정이 힘들어서 그냥 그 자리에 머문 사람들도 있는데, 결국에는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인내심인 것 같아요." (2012년 5월 19일, 청춘페스티벌 특강)

그의 말처럼 인내심,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힘든 조연출 시절을 버텨낸 PD가 김태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 과정을 좀 즐기고 과정을 이겨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산중턱에 와 있는" PD들 또한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김태호를 연호하는 시청자가 그렇게 많은 걸까.

김태호의 창의성, 그 본격적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김태호 개론 1편] 친구의 죽음, 태호를 깨우다
[김태호 개론 프롤로그] 그의 머릿속이 정말 궁금했다

(김태호 개론 3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김태호, #무한도전, #김석윤, #김민식,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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