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정도전> 방송화면 ⓒ KBS


이방원이 끝내 정몽주를 찍어냈던 칼날을 다시 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칼날은 그가 한때 숙부라 부르며 따랐던 그의 정치적 스승 정도전을 향하고 있었다.

정도전(조재현 분)과 이방원(안재모 분). 두 야심가의 만남이 없었다면 과연 조선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당시 고려가 아무리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있었다 해도 정도전이 제시했던 역성혁명은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이방원은, 자신을 '거골장(가축을 도살하는 일을 업으로 삼던 사람으로, 전쟁터에서 평생을 보냈던 이성계가 스스로를 낮춰 불렀던 말)'이라 자칭하던 아버지 이성계(유동근 분)를 역성혁명의 전면에 내세우려 했던 불세출의 천재 정도전을 알아본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정도전은 대업의 야심을 전면에 드러내기 전 이방원에게 고려의 관리가 될 것을 권한다. 이미 과거에도 급제했던 이방원이었지만, 그는 "녹봉조차 제대로 주지 못하는 나라의 말단 관원 따위에 관심이 없다"며 거절한다. 그리고 이방원은 덧붙였다. "믿고 따를 만한 인물도 없고... 혹여 숙부(정도전)께서 재상이 되시면 한번 고려해보겠습니다"라고.

굳이 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속 이방원에게 정도전이란 내내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고려의 중심에서 배제된 채 '촌뜨기'라 불리며 무시당했던 아버지 이성계에게 닥친 숱한 위기를 해결해 준 것도 정도전이요, 심지어는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천명한 것도 정도전이었다. 이방원에게는 정도전 그 자체가 대의고, 명분이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이성계를 은밀히 찾아가 새 나라의 군주가 되어달라 간언하던 것을 엿듣고는 억눌려있던 야심에 불을 지핀다. 동기가 어찌됐든, 가능성이 있든 없든, 이방원은 정도전의 대의에 자진해서 몸을 바쳤던 첫 번째 인물이었다. 윤소종(이병욱 분)도, 조준(전현 분)도, 지금은 정도전의 가장 든든한 당여인 남은(임대호 분)조차도 처음부터 정도전과 그의 대업에 선뜻 동참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사극 역사상 가장 고독했던 주인공 중 하나인 정도전에게도 이방원만큼 힘이 되는 존재는 없었을 터다.

정도전은 역성혁명이라는 판에 놓을 말들을 골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정도전이 짜 놓은 판 위에 올려진 가장 큰 말,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은 정도전의 최측근이 되어 그의 담대함과 정치력을 체득해 나갔다. 그렇게 성장한 이방원은 쉴 틈 없이 달리던 역성혁명의 동지들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 억새밭을 만나 앞을 가로막혔을 즈음 스스로 칼이 되어 억새를 자르고 길을 만들기도 했다. 끝까지 고려 사직을 위해 분투했던 정몽주(임호 분)를 제거하는 칼을 자처했던것은 이방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과 이방원은 정몽주의 죽음이라는, 조선 건국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이 벌어진 뒤 갈라서게 된다. 그들의 1차적 목표는 분명히 같았다. '이성계를 새 나라의 태조로 만든다'는 것. 그러나 이 목표의 달성은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의미였다. 조선 건국은, 정도전에게는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한 초석이었던 반면 이방원에게는 평화의 시작이었다.

기실 엄밀히 따져 본다면 애초에 두 사람의 목표는 일치하지 않았다. 미묘하게 달랐다. 정도전은 고려의 멸망과 새 나라의 건국을 갈망했고, 이방원은 이성계의 즉위를 원했다.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신권 중심의 국가를 위해, 덕망있는 군주를 위협하는 야심가를 제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정도전의 대의에 물든 건국 직후의 조선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왕권 중심 국가의 왕이 되어야만 했다.

아주 단순히 보더라도, 이방원이 조선 건국과 이성계의 즉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뒤 받은 대가는 고작 허울 뿐인 왕자 자리였다. 그리고 이방원은 자신을 그런 사태로 몰고간 정도전이 밉지 않을리 없었을 것. 그래서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결은 정해진 수순과도 같았으며, 대의의 충돌이 아닌 욕망의 충돌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 정도전은 생애 마지막 정적 이방원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정도전>보다는 먼저 방영되었으나, 다룬 시기는 이방원 즉위 후였던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승자 이방원은 자신의 욕망을 대의라 부르며 이를 부르짖는다.

 SBS <뿌리 깊은 나무> 방송화면

SBS <뿌리 깊은 나무> 방송화면 ⓒ SBS


"그 자(정도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내가 정몽주를 죽였고, 내가 그 자 대신 명에 볼모로 갔고, 내가 고려 왕을 쳐내고 아바마마를 왕위에 올렸어. 그 자들은 정몽주를 죽이고 싶어해도, 명분 따위에 휘둘려 하지 못했어. 그자들은, 더러운 물에 손을 담그려 하지 않았어! 내가 세운 조선이다. 내가 더러운 물에 손을 담그고 세운 나의 조선이야! 내가 온전히, 모두 가져야 마땅한 권력이다. 그게 나의 조선이고 나 이방원의 대의다. 이방원의 대의가 곧 조선의 대의인 것이야!"

그러나 정도전과 이방원의 만남이 피튀기는 대결로 변모하고, 결국 한 쪽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을 지언정 이를 '잘못된 만남'이라 부르기는 성급하다. 정도전을 축출하고 난 후 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정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이 된 이방원은 정도전의 정책들을 자신의 조선에 대거 녹여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이 아버지 태종에게 "아바마마께서는 정도전이 만든 조선을 그대로 이어가셨다"고 말했던 것처럼.

일례로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겠다고 나섰을 때 군사 훈련 보이콧의 선봉에 섰던 것이 이방원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즉위 후 사병을 혁파해 왕권을 공고히 한다. 그리고 이방원에 의해 강화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세종이 활동하는데 탄탄한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방원의 변화는 마치 이색(박지일 분)에게 수학하던 정도전이 변해가던 모습과 유사하다. 이색의 밑에서 유자(儒者)로 성장했으나 정도를 걷지 않고 결국 역성혁명이라는 발칙한 야망을 실현시켰으며 스승의 정치적 생명까지 끊고 만 정도전. 그리고 정도전의 최측근에서 성장하며 그의 모든 것을 배워 나갔지만 끝내 실질적 스승과도 같았던 정도전을 죽이고 만 이방원.

두 사람은 '정신적 아버지'였던 스승을 베는 참담한 행위를 저질렀으나, 그들이 내리친 칼날에 잘린 것은 한 개인의 목숨일 뿐 역사나 사상의 단절은 아니었다. 모양이 아름답지는 않을지 몰라도, 꼬인 실타래를 베어 내고 그것을 하나의 역사로 이어 붙인 장본인이 바로 정도전과 이방원이었던 까닭이다.

정도전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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