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이후 <사생결단><범죄와의 전쟁><친구 2> 등 부산을 배경으로 한 누아르 영화가 많이도 쏟아져 나왔다.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작품은 몇몇 뿐이지만 그렇다해도 누아르와 결합한 도시의 힘, 나아가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진 흥행의 힘이 상당하다는 건 입증되었다. 문제라면 오직 이러한 것들에 기대 승부를 거는 영화 역시 적지 않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2007년작 <마을금고 연쇄습격사건> 이후 7년 만에 복귀한 박상준 감독의 <황제를 위하여>는 이런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누아르 영화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배우 이민기를 원톱으로 내세웠고 <신세계>와 <역린>을 통해 존재감을 쌓아가고 있는 박성웅이 출연하여 영화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부산의 프로야구단 소속으로 촉망받는 선수였던 이환(이민기)은 승부조작에 연루된 사실이 발각되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젊은이다. 무일푼이 된 그는 우연한 계기로 부산 최대규모의 사채조직 황제 캐피탈의 대표 상하(박성웅)와 만난다. 이환의 능력을 알아본 상하는 그를 조직에 끌어들이고 이환은 타고난 근성과 능력으로 무섭게 성장해간다.

반짝이는 도시의 추악한 이면


영화는 사람들의 욕망이 뒤엉킨 화려한 도시의 잔혹한 이면을 비추고 곧이어 그러한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조폭영화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좇는 사람들의 세계, 그리고 힘겹게 올라간 자리 역시 또 다른 죽고 죽이는 세계일 뿐이라는 것, 영화는 벗어날 수 없는 폭력과 경쟁의 세계를 통해 오직 돈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보이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조직의 인물(상하와 작두)은 실은 거물 스폰서의 지원을 받는 바지사장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조직의 두목이 된 이환은 더 높고 더 반짝이는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그 앞에 나타난 건 더 이상 멀리서 바라본 반짝이는 세계가 아닌 서로 물고 뜯는 잔혹한 곳일 뿐이다. 영화는 사람들이 오징어잡이배를 바다의 별이라 부르지만 실은 그 역시 오징어를 먹기 위해 잡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일 뿐이라는 대사를 통해 이런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전혀 새롭지 않다. 현대 누아르 영화의 교범이라 할 수 있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 이후 권력에 대한 헛된 추구를 다룬 이야기가 이런 류의 장르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됐다. <황제를 위하여>는 이런 흐름으로부터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내적인 완성도 역시 심각하게 떨어져 수많은 누아르 영화들 가운데 기억될 만한 작품이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액션은 힘이 없고 캐릭터는 멋이 없으며 이야기는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준 미달의 누아르


이태임이 연기한 차연수와 이환의 관계는 거물 스폰서와 맞물려 삼각관계의 긴장을 자아내야 마땅했음에도 시종일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져 있을 뿐이고 수도 없는 칼질 액션은 의미없는 난도질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신세계>에서 가져온 이중구의 캐릭터와 <변호인>의 차동영 캐릭터 등에서 따온 인물들은 전체적으로 급이 낮아졌다는 인상이 강했고 <올드보이>와 <신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장면들은 원작의 감각을 전혀 전해주지 못했다.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지도 못했고 영화적 완성도를 높이지도 못했던 이 영화의 승부수는 고작 이태임의 벗은 몸뿐이었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영화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배우의 과도한 노출은 경우에 따라 배우 이미지와 그에 따른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인데 이런 수준의 영화에서 노출을 감행한 이태임의 선택엔 아쉬운 점이 너무나 많다.

이밖에도 황제캐피탈과 템테이션, 인물들의 이름으로 나오는 작두와 광어 등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작명이 너무나 촌스럽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패션이나 헤어스타일 등 외양 역시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 실망이 컸다. 영화는 승부를 걸었어야 했던 많은 지점에서 무력하게 시간을 흘려보냈고 배경으로 나온 부산마저 그저 소모해버리고 말았다. 이쯤되면 영화가 대체 무엇을 목적하고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의문마저 든다.

<논어> 선진편에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공자의 가르침이 나온다. 이는 지나침과 모자람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영화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따져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지나치거나 부족했고 적절한 부분은 찾기 어려웠다. 바로 이 지점에 이 영화의 패인이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