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포스터

▲ 투모로우 포스터 ⓒ 20세기폭스코리아

도시 전체를 찢어발기고 나아가 미국을, 심지어는 백악관과 자유의 여신상일지라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를 또 한 편 봤다.

나는 <유니버설 솔져>부터 <스타게이트>와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패트리어트 - 늪속의 여우> 등을 거쳐 < 2012 >에 이르는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좋아한다. 미국의 주요 도시와 공권력, 때로는 국가의 상징물까지도 거리낌 없이 부숴버리고 돌아서서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그 특유의 호탕함을 나는 몹시도 좋아한다는 이야기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방식으로 세태를 풍자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무시당하거나 쉬이 잊혀지는 것들에 거리낌 없이 애정을 드러내는 그의 영화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투모로우>(2004)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장점이 잘 녹아든 대작 재난영화다. 지구온난화와 그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미국 뿐 아니라 북반구 전체가 얼어붙는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기대를 모았는데 <프리퀀시>의 데니스 퀘이드와 촉망받는 젊은 배우 제이크 질렌할을 내세워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의 <프리퀀시>를 통해 3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들을 지키는 아버지를 연기한 바 있는 데니스 퀘이드는 이 영화에서도 뉴욕의 공립도서관에 고립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얼어붙은 뉴욕으로 향하는 기상학자를 연기했다.

영화는 뉴욕의 공립도서관에 고립되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아들일행의 모습과 빙하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시에 뉴욕에 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여정을 떠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대재난에 직면한 미국의 모습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거침없이 부수고 단순하게 경고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는 거대한 폭풍과 기온급감이라는 대재앙에 직면해서 무력하게 파괴되는 문명의 모습이다. 미국의 가장 유명한 도시인 LA와 뉴욕의 상징물이 회오리바람에 휩쓸려나가고 눈과 얼음에 파묻히는 모습을 이 영화가 아니고서야 대체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게다가 대부분의 재난영화가 그렇듯 당해낼 수 없는 재앙과 마주해 보여주는 사람들의 용기있는 태도 역시도 좋은 구성과 캐릭터 속에서 감동적이고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그 와중에 롤랜드 에머리히 특유의 경고와 풍자, 유머도 등장하는데 그리 날카롭거나 섬세한 것은 아니지만 낭만적이고 매력적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멋이 있다고 생각한다.

투모로우 아버지는 그곳에 가만히 있으라 하였고 아들은 그에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서로를 뜨겁게 안았다.

▲ 투모로우 아버지는 그곳에 가만히 있으라 하였고 아들은 그에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서로를 뜨겁게 안았다. ⓒ 20세기폭스코리아


우리 모두가 답을 안다... 그래서 괴롭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버지가 뉴욕에 가 있던 고등학생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가로지르던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구해기 위해 도서관 밖으로 향했던 장면이다.

퀴즈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에 가있던 고등학생 아들.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여정을 떠나는 아버지. 영화 중반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지고 바닷물이 도시로 흘러드는 와중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성급하게 건물 밖으로 나오지 말고 자신이 구하러 갈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라고. 그리고 그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뉴욕으로 향해 마침내 아들을 구해낸다.

세월호 침몰 참사가 발생한지 어느덧 48일째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단 한 명의 탑승자도 구조하지 못했다.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흘렀고 희망은 절망으로 변해갔다. 더없이 허망하고 무력한 나날이었다.

영화 속 샘과 단원고 학생들은 많은 점에서 비슷했다. 스스로 위험을 알렸고 가만히 있으라는 통제에 따랐으며 어른들이 자신들을 구하러 올 것이라 확신했다. 빠르게 얼어붙던 도시에서, 침몰하던 배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런데 어째서 샘은 살고 세월호의 탑승객들은 희생당했을까.

투모로우 로라같은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대체 어느 남자가 도서관 밖으로 향하지 않겠는가!

▲ 투모로우 로라같은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대체 어느 남자가 도서관 밖으로 향하지 않겠는가! ⓒ 20세기폭스코리아


롤랜드 에머리히가 생각하는 지구의 운명은?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병들어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지구의 모습을 긁힌 상처를 통해 바이러스에 감염돼 고열에 시달리는 로라의 모습으로 상징한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도서관 밖으로 나아가는 샘과 친구들. 그들이 항생제를 구해와 로라를 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어쩌면 영화의 결말, 나아가 롤랜드 에머리히가 생각하는 지구의 운명과 통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로라는 곧 상처입고 고통스러워 하는 지구였고 로라를 죽이는 것은 곧 지구를 죽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로라를 살리기 위한 샘의 용기있는 행동이 지구를 살리기 위해 애쓰던 그의 아버지의 노력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샘의 노력으로 로라는 살아났고 잭의 희망대로 인류 역시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자,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1

"혹시 이걸로도 발전기가 돌아갈까요?"

사이먼이 꽂혀진 책들 뒤에 숨겨진 스카치를 꺼내며 말한다.

"미쳤나? 그건 12년 묵은 스카치야."

랩슨 교수가 사이먼의 말에 대꾸하며 역시 책 뒤에서 잔 세 개를 써낸다. 모두 웃고 다같이 건배를 하며 사이먼이 말한다.

"to England. 잉글랜드를 위해."

랩슨 교수가 이어 말한다.

"to mankind. 인류를 위해."

고메즈가 화답한다.

"to Manchester United.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위해."

#2

벽난로에서 태울 책을 모으며 니체의 책을 뽑아든 여자에게서 책을 빼앗으며,

"프리드리히 니체는 안 돼. 19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니체에 대한 투닥거리는 말다툼이 이어진다. 그때 아래에서,

"잠깐만요. 여기에 세법 관련한 책 잔뜩 있어요."

#3

여자가 남자 사서에게 묻는다.

"무슨 책이죠?"
"희귀서적실에 있던 구텐베르크 성경."
"신이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난 신을 안 믿어."
"그런데 왜 책을 껴안고 있죠?"
"지키려고."

침묵.

"이 성경은 최초의 인쇄본이야. 이 책으로 이성의 시대가 열렸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은 문자야."

여자가 '훗'하고 웃는다.

"비웃어도 좋아. 하지만 문명이 끝나도 이 책 하나만은 남겨놓고 싶어."

나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에 나오는 이런 장면들이 정말 좋다.

투모로우 20세기폭스코리아 롤랜드 에머리히 세월호 참사 제이크 질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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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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