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인간중독>

1969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인간중독> ⓒ NEW


영화 <인간중독>(14일 개봉) 개봉 직전에 열린 쇼케이스에서 MC를 봤던 신동엽은 '영화의 배경을 1969년으로 한 게 혹시 무슨 의미냐?'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사실 신동엽은 이 질문을 굉장히 장난스럽게 했다. 이 쇼케이스의 주제가 '19금 토크'였기 때문이다. '69'의 이미지를 차용한 이 질문은 참석자들의 웃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그리고 영화를 계속 복기하면서 나는 이 질문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왜 <인간중독>은 1969년, 월남 파병의 후유증을 겪기 시작하는 한국의 한 관사를 배경으로 진행됐을까? 왜 우리를 또 다시 과거의 세계로 이끌었을까? 이 영화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각은 바로 '1969년'이라는 시대에 있다.

김대우 감독은 <인간중독>을 만들면서 자신의 추억 두 가지를 집어넣었다. 하나는 1969년 7월, 아폴로 11호가 최초로 달에 착륙한 순간이다. 김대우 감독은 신동엽의 짓궂은 질문에 이 아폴로 11호의 추억으로 답을 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실제로 영화에 등장한다.

또 하나는 어린 시절 '관사'의 추억이다.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김대우 감독은 어린 시절 관사 생활을 했다. 주말에 부모님이 손을 잡고 관사 주위를 거닐던 모습은 어린 김 감독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영화 속 관사가 아름다운 곳으로 그려진 이유도 바로 그 어린 시절 추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인간중독>의 낭만은 거기까지다. 1969년은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추억이 생긴 일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악몽 같은 일의 연속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 중심에 영화의 주인공 김진평(송승헌 분) 대령과 그와 사랑에 빠지는 종가흔(임지연 분)이 있다.

'관사'라는 좁은 세계에서 만나는 두 사람

 김진평(송승헌 분)과 종가흔(임지연 분)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 '인간'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

김진평(송승헌 분)과 종가흔(임지연 분)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 '인간'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 ⓒ NEW


교육대장을 맡고 있는 김진평 대령은 모든 것을 다 갖춘 군인이다. 부하들은 그를 신임하고 신임으로 들어온 경우진(온주완 분)은 그에게 온갖 아부를 한다. 하지만 그의 세계에는 '인간'이 없다. 오직 관사라는 좁은 세계에서 만나는 '계급을 가진' 이들이 그가 만나는 사람의 전부다.

심지어 그의 부인인 숙진(조여정 분)조차도 남편을 출세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며 '사랑의 결실'인 임신조차도 자신의 지위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간이 아닌 계급이 모든 것을 지배하며 남편의 계급에 따라 부인들의 계급이 정해지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가 김진평이다.

이 부분에서 영화의 첫 장면을 생각해보자. 술자리에서 진평의 장인인 군단장(정원중 분)은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지자 '요시!'를 외친다. 일본 말이다. 여기서 군 요직을 차지한 그의 과거는 바로 일본 사관학교의 학도라는 점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김진평이 승승장구한 것은 그의 노력이 아닌 아내의 집안 덕분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김진평이 군복을 벗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이 날아간다는 이야기다. '군'은 인간보다 위인 존재였고 그렇기에 그는 군의 질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주인공 종가흔 또한 전쟁의 상처를 지닌 여인이다. 화교인 그는 전쟁을 겪었고 남편인 경우진과 원치 않은 결혼을 해야 했다. 경우진의 어머니는 우진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대한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조차도 그에겐 냉담하다.

그런 그녀가 관사라는 세계에 들어왔다. 앞에서 말한 대로 관사는 계급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당연히 부인들의 텃세가 없을 리 없다. 남편이 싫어함에도 집 앞에 새장을 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낙이었다. 그런 그가 김진평을 만난 것이다.

무엇에 중독됐는가? 바로 '인간'이다

 '관사'라는 좁은 세계, '군'이라는 계급 속에서 살아야하는 두 사람

'관사'라는 좁은 세계, '군'이라는 계급 속에서 살아야하는 두 사람 ⓒ NEW


따지고 보면 '인간중독'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을 모르던 두 남녀는 그 좁은 세계에서 '인간'을 만났고 서로에게 중독이 된다. 그들이 서로에게 중독이 됐고 그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결국 '불륜'을 선택했다. 두 사람은 비로소 인간과 손을 잡고 인간과 왈츠를 추고 인간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평하면서 '무엇에 중독됐는지 모르겠다'라고 평했는데 이미 그 답은 제목과 영화에 다 나온다. '인간에 중독된 사람'의 이야기라고 감독은 답을 하고 "너희들은 목숨 걸고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라는 최중령 부인(전혜진 분)의 대사로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린다.

<인간중독>은 김진평과 종가흔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19금' 홍보에 열을 올리지만 정작 '19금'만 생각하고 보면 많은 장점을 놓치게 된다. 특히 숙진과 최중령 부인의 기싸움은 재미와 함께 계급 사회의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폴로 11호의 추억이 있다고는 하지만 1969년은 군사 독재와 월남전이라는 두 파고가 밀려왔던 때였다. 일본 사관학교를 나온 이가 정치와 군의 요직을 차지했고 그들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월남에 보내 싸우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상처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군'의 위세가 드셌던 바로 그 시대였다.

 진평의 부인 숙진(조여정 분)은 남편의 출세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진평의 부인 숙진(조여정 분)은 남편의 출세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 NEW


그런 면에서 <인간중독>은 단순히 불륜의 이야기, 19금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의 가장 권력층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이라는 계급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계급으로 모든 것이 규정되는, 사회조차도 군의 논리가 지배하기 시작하는 세상. 관사는 바로 그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그것이 <인간중독>의 파격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이유다.

공교롭게도 <인간중독> 속 사건이 벌어진 뒤 얼마 뒤,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통과시키며 군정을 연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신과 쿠데타를 거쳐 최근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술자리에서 '요시'를 외쳤던 이들이 여전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인간중독>의 이야기를 만날지도 모른다.

인간중독 송승헌 임지연 김대우 조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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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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