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2014년 블록버스터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장했다. 올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시즌의 개막작이라고 할 수 있는 <300: 제국의 부활>과 <노아>에 이어 3월 26일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아래 <윈터 솔저>)가 개봉했다. <윈터 솔저>는 '어벤져스'의 리더인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속편으로 어벤져스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초봄 극장가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는 3월29일 개봉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는 3월29일 개봉했다 ⓒ 마블


가장 인기 없는 마블히어로

슈퍼히어로영화는 가장 미국적인 장르이다. 그 중에서도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분)는 가장 미국적인 슈퍼히어로다. 캡틴 아메리카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에 탄생했다. 전시에 태어난 영웅답게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식 애국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성조기를 그대로 차용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복장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선동적이다.

때문에 캡틴 아메리카는 마블영화세계(Marvel Cinematic Universe)의 다른 영웅들에 비해서 북미 외의 지역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 했다. 전편은 한국에서 <퍼스트 어벤져>라는 부제로 개봉했는데 캡틴 아메리카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유였지만 지나친 미국적 색채를 완화시키기 위한 배급사의 꼼꼼한 상술이었다. 하지만 배급사 측의 세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퍼스트 어벤져> 한국에서 블록버스터의 기준으로는 참패에 가까운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캡틴 아메리카의 약점은 단지 낯뜨거운 미국식 애국주의만은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모범적이다. 속된 말로 마블의 '엄친아', '범생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에는 그런 모범생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는지 모르지만 현대의 관객들에게는 고루하고 따분하다.

배트맨이나 아이언맨, 헐크와 같이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슈퍼히어로의 캐릭터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캡틴 아메리카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평면적이다. 대개의 슈퍼히어로영화가 그렇지만 세계를 선과 악으로 양분하는 유치한 이분법적 세계관과 단순한 이야기 구조도 21세기 관객의 지적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성조기를 그대로 차용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복장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선동적이다.

성조기를 그대로 차용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복장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선동적이다. ⓒ 마블


게다가 '슈퍼파워'마저 초라하다. 엄밀히 말하면 캡틴 아메리카는 '람보'와 같은 근육질의 액션히어로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처럼 이른바 '덕후'들을 흥분시키는 최첨단무기로 무장한 것도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의 유일한 첨단무기인 '비브라늄' 방패는 오히려 헤라클레스와 같은 고대의 영웅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캡틴 아메리카의 태생적(?) 한계는 자연스럽게 볼거리의 약화로 이어졌다.

슈퍼히어로영화의 가장 큰 오락적 미덕은 '파괴의 스펙타클'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신체적 능력이 다소 뛰어난 캡틴 아메리카가 보여줄 수 있는 볼거리는 심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퍼스트 어벤져>는 인물, 이야기, 볼거리 중 그 어느 것도 매력적인 구석이 없는 평범한 상품이 되고 말았다. 흥행성적도 다른 마블히어로들에 비해 신통치 않았다.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의 리더임에도 마블히어로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영웅이었다. "스미소니언박물관의 화석"처럼 시대착오적인 구식영웅에 열광하는 소비자는 마블의 기대처럼 많지 않았다. 그래서 캡틴 아메리카는 <윈터 솔저>에서 근본적인 혁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구식영웅의 변신은 매우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가장 미국적인 영웅의 삐딱한 진화

애초 마블은 어벤져스의 각 히어로들을 장르별로 특성화할 구상이었다. 예컨대 <아이언맨>은 '테크놀러지액션', <토르>는 '판타지액션', <캡틴 아메리카>는 '정치스릴러'로 각자의 특색에 맞게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2단계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장르 전략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윈터 솔저>는 마치 본 시리즈나 새로운 007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어둡고 진지한 정치스릴러로 진화했다. 특히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적과 맞서는 설정은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이라는 캡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약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전환시켰다. <윈터 솔저>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에서 국가폭력과 맞서는 현대적인 반영웅(anti hero)으로 진화했다. 이야기가 무겁고 어두워지면서 캡틴아메리카의 진지한 캐릭터는 오히려 장점이 됐다.

'슈퍼 파워'의 약점도 장점으로 전환됐다. 루소 형제는 자동차추격전, 1대1 격투, 시가총격전 등 비교적 사실적인 액션장면들을 위주로 볼거리를 구성해 캡틴 아메리카에 최적화된 액션의 해법을 찾아냈다. 그렇다고 슈퍼히어로장르의 오락적 미덕인 초현실적 파괴의 스펙타클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영화 절정의 공중부양 항공모함 '헬리캐리어' 전투장면은 <어벤져스>의 뉴욕 전투장면만큼 장쾌한 파괴의 스펙타클을 구현한다.

로버트 레드포드를 악당(villain)으로 캐스팅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지적 '아우라'는 유치한 슈퍼히어로영화를 진지한 정치스릴러로 전환시킨 일등공신이다. 팔콘(안소니 마키 분)과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분)와 같은 보조영웅(sidekick)을 적절히 배치한 것도 영리하다. 특히 팔콘은 아이언맨의 대체재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팔콘의 비행액션은 아이언맨 이상이다. 블랙 위도우, 즉 스칼렛 요한슨의 시각적 역할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지적 '아우라'는 유치한 슈퍼히어로영화를 진지한 정치스릴러로 전환시킨 일등공신이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지적 '아우라'는 유치한 슈퍼히어로영화를 진지한 정치스릴러로 전환시킨 일등공신이다 ⓒ 마블


일부의 우려도 있었지만 마블이 블록버스터영화의 연출 경험이 전혀 없는 루소 형제에게 캡틴 아메리카의 혁신을 맡긴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캡틴 아메리카에게 필요한 것은 볼거리의 증폭이 아니라 캐릭터와 이야기의 진화였기 때문이다.

<윈터 솔저>는 '마블시리즈 중에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9점 대의 높은 평점을 고려하면 까다로운 한국 관객들을 만족시키는데도 이미 성공한 듯하다. 캡틴 아메리카의 성공적인 진화로 <어벤져스>의 속편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상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블의 영리한 상업전략은 당분간 그들에게 보다 많은 수익을 안겨 줄 것이다.

페이퍼클립작전, 나치의 과학자들을 포섭하라

<퍼스트 어벤져>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나치의 비밀조직 '히드라'와 맞서 싸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나치 과학자들을 포섭하고 '히드라'의 잔당들은 '쉴드'에 잠입해 조직을 장악한다. 그리고 히드라는 쉴드를 이용해 세계에 분쟁과 갈등을 유발시키고 공포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나치의 잔당이 CIA와 유사한 쉴드를 장악한다는 설정은 황당무계하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의 비밀작전을 통해 나치과학자들을 미국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7일 나치독일의 항복이후 미국은 점령지역에서 히틀러의 비밀무기고를 발견했다. 미국은 나치의 놀라운 과학기술에 경악했다. 당시 나치는 잠수함 발사 로켓, 대공 미사일, 가변익 제트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 미국보다 수 십 년 앞선 첨단무기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OSS에 특별 작전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나치의 과학자들을 최대한 포섭하여 미국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나치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빼돌리기 위한 비밀작전은 훗날 '페이퍼클립' 혹은 '오버캐스트' 작전이라고 불린다.

나사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페이퍼클립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한 외국과학자는 약700여 명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과학자 중 2/3은 나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거나 적극적으로 부역한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는 런던을 공포에 떨게 한 최초의 로켓 V-2를 개발한 베르너 폰 브라운도 포함되어 있었다. 폰 브라운은 나치독일의 로켓기술자 132명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있는 베르너 폰 브라운.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있는 베르너 폰 브라운. ⓒ wikipedia


폰 브라운은 악명 높은 나치과학자였다. 그는 연합군을 공포에 떨게 한 로켓 개발을 총지휘했을 뿐 만 아니라 강제노동으로 수 천명을 학살했다. 이 같은 범죄사실을 고려하면 폰 브라운은 전범으로 교수대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폰 브라운의 재능이 탐났다. 그래서 그를 처형하지 않고 미국으로 이주시켰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의 로켓기술은 미국보다 앞서 있었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을 쏘아 올린 것도 소련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폰 브라운 등 나치과학자들의 도움으로 소련과의 기술격차를 좁힐 수 있다. 그리고 달에 먼저 도달함으로써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승리했다. 폰 베르너와 나치과학자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미국은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우주항공기술은 나치의 유산인 셈이다.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나치과학자들의 공이라는 주장도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 라니어 칼쉬는 <히틀러의 폭탄>이라는 책에서 1944년 나치가 독일 동북부의 류겐 섬에서 첫 핵실험을 했으며 1945년에도 투링기아 지역에서 두 차례 핵실험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치 친위대가 이 지역에 두 개의 완벽하게 제도된 원자탄을 보관하고 있었고 이 폭탄들이 미국에 넘어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됐다는 다소 황당한 이론을 내놓기도 했다. 칼쉬의 주장을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나치 과학자들이 맨하탄계획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폰 브라운 외에도 페이퍼클립의 과학자들 중에는 악명 높은 전범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새턴' 계획에 참여했던 아더 루돌프는 강제수용소의 노동감독으로 수많은 이들을 학대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미국 정부도 '100% 나치주의자'라고 평가할만큼 악질적인 파시스트였다.

루돌프는 1982년 자신의 과거 폭로되자 서독으로 망명했다. 쿠르트 블롬은 강제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에게 유행병 백신을 실험했으며 미국으로 이주한 후 미 육군 화학전단에서 일했다. 인체실험을 감독, 지휘했던 왈터 슈라이버는 미 공군 의과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52년 나치에 협력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캡틴 아메리카는 쉴드의 수장인 닉 퓨리(새무엘 잭슨 분) 국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드라가 장악한 쉴드를 해체시킨다. 쉴드의 요원들도 '캡틴'의 결정을 따른다. 쉴드와 히드라가 다를 바 없다는 캡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각성은 현실에서도 타당하다. 미국의 패권주의는 '히드라'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 관람 시 유의사항 : <윈터 솔저>에는 두 개의 부가영상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윈터 솔저>의 후속편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어벤져스>와 관련 있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한 개를 관람한 후 퇴장한다. 필자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나홀로연구소> http://blog.naver.com/silchun615에 중복 게재됩니다.
윈터 솔저 캡틴 아메리카 어벤저스 페이퍼클립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