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 선수 개막 첫날, 류선수는 일찌감치 나와 가볍게 몸을 풀었다.

▲ 류현진 선수 개막 첫날, 류선수는 일찌감치 나와 가볍게 몸을 풀었다. ⓒ 스텔라김


개막 전, 우려 깨며 흥행 성공까지 거머쥐다

1914년 1월 3일, 시드니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뉴욕 자이언츠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시범 경기가 열렸다. 그리고 100년 만인 2014년 3월 22일 같은 장소에서 메이저리그 야구 개막전이 개최됐다.

그동안 수많은 크리켓 경기를 치른 유서 깊은 이 스타디움은 입구부터 메이저리그 깃발이 펄럭이고 많은 기념품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는 등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라면 야구 시즌이면 당연하게 보일 풍경이다. 하지만 호주는 아직도 야구의 불모지에 가깝다. 실지로 이번 개막전을 유치하면서 많은 우려가 대두되었다.

'헛돈 쓰는 거 아니냐', '정부가 돈이 없다고 하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개막전을 앞두고는 표가 매진되고 암표가 성행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500불에 달하는 표부터 가장 뒤에서 봐야 하는 60여 불짜리까지 모두 예약된 것이다.

시드니크리켓그라운드 관중석  개막 1,2 차전 모두 예상을 뒤엎고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

▲ 시드니크리켓그라운드 관중석 개막 1,2 차전 모두 예상을 뒤엎고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 ⓒ 스텔라김


이날 시드니 크리켓 그라운드는 미디어들에게 먼저 게이트를 열고 일반 입장객에게는 두 시간 더 늦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두 세 시간 전부터 스타디움과 근접한 센티니얼 파크 주변에는 이날 개막전에서 맞붙을 LA 다저스(LA Dodgers) 팀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 (Arizona Diamond Back) 팀의 유니폼과 모자를 쓴 관중들이 대기 중이었다.

100년 전의 야구 시범경기를 기념하고 또 호주에서 야구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마련된 미국 메이저리그 개막전 개최가 결정된 것은 지난해 6월. 그후 크리켓 그라운드 측은크리켓구장을 야구 경기에 맞도록 새롭게 단장했다. 마운드를 만들기 위해 미국에서 흙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 둥근 운동장을 최대 활용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변모 시키는 등 최선을 다했다.

무관심 속에 썰렁한 이벤트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말끔히 종식시키며 오프닝 시리즈 첫 경기는 이날 오후 7시에 시작됐다.

개막 1·2차전, 다저스의 승리로 이어져

22일 경기는 LA 다저스가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의 호투에 스캇 반 슬라이크의 투런포가 보태지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이겼다. 다음날인 23일 경기에서는 류현진 선수가 등판해 5이닝 동안 2피안타 1 볼넷, 5탈삼진을 기록하며 완벽한 투구를 보여줬다.

이날 류현진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구장을 찾은 많은 한인팬들은 그의 투구를 더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류 선수가 3루 베이스를 돌던 중 조금 삐끗한 모습을 보이자 돈 매팅리 다저스 감독은 파코 로드리게스(Paco Rodriquez) 투수로 교체했다.

인터뷰를 하는 류현진 선수 5 이닝 까지 호투를 한 후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류현진 선수.

▲ 인터뷰를 하는 류현진 선수 5 이닝 까지 호투를 한 후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류현진 선수. ⓒ 스텔라김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류현진 선수는 "더 오래 마운드에서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해 아쉽다"면서 "발톱을 다친 것을 안 매팅리 감독이 배려해 준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한다"고 말했다.

매팅리 감독은 이날 인터뷰에서 류현진 선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하지만 류 선수가 내려온 5이닝 이후 4이닝 동안 무려 7명의 투수를 기용해야 했고 그들의 투구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매팅리 감독은 "이겼지만 기분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라며 불펜 투수들의 부진에 불만을 드러냈다.

1차전 3:1, 2차전 7:5로 개막 두 차례 경기를 모두 이긴 다저스는 바로 홈으로 돌아가 본토 개막전을 준비할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오는 3월 31일 샌디에이고와 맞대결하는 것으로 본토에서의 포문을 연다. 장시간 비행으로 해외 개막전을 치른 선수들이 컨디션을 빨리 회복하는 것이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두 경기를 모두 이긴 만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팀보다는 한결 가벼운 마음일 것이다.

이날 인터뷰에서 류현진 선수는 "한국 선수로 해외 원정 첫 승을 기록해 정말 좋다"면서 "호주의 한인 팬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찾아 응원해 준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 류 선수는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류현진 화이팅! 비싼 티켓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인 팬들이 찾아 류현진 선수를 응원했다.

▲ 류현진 화이팅! 비싼 티켓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인 팬들이 찾아 류현진 선수를 응원했다. ⓒ 스텔라김


한편, 관중석의 한인들 중 유독 눈길을 끈 젊은 한 팀이 있어 소감을 물어봤다. 시드니의 이스트우드(Eastwood) 한인 야구 클럽에서 취미로 매주 야구를 한다는 주문욱씨는 "태어나서 처음 메이저리그 현장을 본다"면서 "마침 시드니에서 열렸으니 평생에 얻기 힘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흥분된 모습을 보였다. 또 "특히 류현진 선수가 뛰는 걸 직접 보니 정말 좋았고, 게다가 잘 던져줘서 더욱 기쁘다"고 말했다.

이날 관중석은 미국 본토의 메이저리그 구장 못지않게 나오는 음악에 맞춰 한마음으로 손뼉 리듬을 쳐주는 등 멋진 관중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경기장 뒷이야기

100년 전에 열렸던 야구 시범경기를 기념하는 의미를 담았던 이번 메이저리그 시드니 개막 시리즈에서는 여러가지 의미 있는 일들이 많았다. 잘 알려져 있듯 호주에서 야구는 인기 스포츠 종목이 아니다.

크리켓, 풋티, 골프, 테니스, 수영… 호주인들이 열광하는 스포츠다. 그럼에도 호주는 메이저리거를 배출하기도 했고, 마니아 층이 있다. 거기에 관중들의 수준은 호주 베이스볼 리그(ABL, Australian Baseball League)를 앞서가고 있다. 일찍이 ABL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시장을 넓히지 못한 채 1999년에 사라졌다가 2010년 부활했다.

야구 패션이 젊은 층의 인기를 끌면서 조금씩 야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특히 다문화국가인 만큼 한국을 비롯, 일본, 중국, 남미 등지에서 온 소수민족의 야구 동호회들이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래서 현재는 애들레이드 바이트(Adelaide Bite), 브리즈번 밴디츠(Brisbane Bandits), 캔버라 캐벌리(Canberra Cavalry), 멜버른 에이시스(Melbourne Aces), 퍼스 히트(Perth Heat), 시드니 블루 삭스(Sydney Blue Sox) 등의 팀들이 리그전을 치르고 있다.

첫번째 전설- 구대성

특히 알려진 바와 같이 구대성 선수는 시드니 블루 삭스에서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다.

이번 메이저리그 개막전에 앞서 개최된 시범 경기에서도 활약을 보인 구대성 선수를 개막 첫 날 만나봤다. 언제까지 현역으로 뛸 것이냐는 질문에 "뛸 수 있을 때까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경기를 하면서 힘이 많이 딸린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제 2의 인생은 역시 지도자길을 갈 것이냐는 질문에는 "지금도 이미 캐치볼 등을 하면서 구단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아직 불러주는 곳은 없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했다.

또 "한화에 있을 당시 류현진 선수와 '동료'로 뛰기에는 세대 차이가 있었지만, 이번에 시드니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후배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45세의 나이에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 기량으로 현역의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 구대성 선수. 구 선수는 개막전 첫 날 손수 정성껏 준비한 호주의 대표적인 기념품 '부메랑(원주민들의 사냥도구)'을 류현진 선수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두 번째 전설- 돈 매팅리 다저스 감독

전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한 1루수. 1982년부터 1995년까지 14시즌 동안 뉴욕 양키스에서 뛰면서 통산 222 홈런, 1099 타점, 2153 안타 기록을 남기며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고 9회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전설이다.

다저스의 코치를 역임하고 현재 감독으로 있는 매팅리는 "오늘 이 수많은 관중 중에는 류(Ryu, 류현진)를 보기 위해 온 한국인 팬들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 "물론이죠. 잘 알고 있습니다. 현진은 정말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훌륭한 투수예요"라고 대답했다. '류'라고 부르는 대신 정확한 발음으로 '현진'이라고 해 주는 것에서 류현진 선수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즌의 시작인 만큼 앞으로 한 회 한 회를 잘 치러나갈 것"이라면서 "한국인들이, 물론 류현진 때문이지만 다저스에도 많은 성원을 보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세 번째 전설- 빈센트 스컬리

다저스의 목소리 빈 스컬리 빈 스컬리 옹은 시드니까지 먼길을 와 개막전을 어김없이 중계했다.

▲ 다저스의 목소리 빈 스컬리 빈 스컬리 옹은 시드니까지 먼길을 와 개막전을 어김없이 중계했다. ⓒ 스텔라김


'다저스의 목소리(The Voice of the Dodgers)'라 불리는 빈 스컬리는 미국의 스포츠 캐스터이고 다저스 중계 전담아나운서다.

1927년생이니 이곳 나이로 쳐도 87세. 무려 65년 동안 변함없이 마이크를 잡아 왔다. 몇 시간이 걸리든 야구 경기 내내 해설자도 없이 중계를 해 온 사람. 미디어 룸에서 만난 그는 커피를 기다리며 서 있는 필자에게 먼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내가 당신의 순서를 방해했나요?"

필자야말로 그의 식사 시간을 방해 할까봐 눈치를 보고 있던 차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대화를 이어갔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라고 우선 대답부터 하고 정말 "존경을 담아" 사진을 찍고 몇 마디 나눠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고, 그 오랜 세월 한 길을 걸어 온 '대선배'를 존경한다는 말에 기쁜 미소를 활짝 보여 주는 멋진 노신사.

올해 은퇴를 하는 스컬리옹은 그래서 이번 시드니까지의 여행을 두 말 없이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정말 더 오래 더 건강하라는 인사에 최선을 다 해 약속을 지키겠다고 대답하는 그는 말끔한 정장을 여전히 고수하며, 줄곧 온화한 미소를 담고 대화를 하는 사람이었다. 마치 그의 중계가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라 '졸립다'고 할 만큼 차분하게 진행하는 것이라서 열렬한 팬층을 갖고 있는 것처럼.

전설이 된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전설을 쓰는 사람들

100년 전의 시범 경기를 기념하고 야구에 대한 관심을 더 높이기 위해 열린 메이저리그 개막전. 말하자면 전설이 된 100년 전의 시범 경기가 있었고, 야구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호주에서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열리는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

그 현장에서, 구장으로, 3층 미디어 룸으로, 또 관중들을 만나러 뛰어 다니며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역사와 전설, 그 두 개였다. 모두 역사 속에 있지만, 누구나 '전설(Legend)'이 되지는 않는다.

이미 전설이 된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전설이 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사람들이 함께 한 메이저리그 시드니 개막전은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새로운 즐거움을 남기며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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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멜번 저널(3월 28일 발행본) 중복 게재
메이저리그 시드니 류현진 다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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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이민 45 년차. 세상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고 그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사를 찾아 쓰고 싶은 사람. 2021 세계 한인의 날 대통령 표창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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