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족 잔디'를 밟을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기껏해야 500여 명뿐이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와 18개 구단 프로 축구선수들만이 이 금단의 그라운드에 섰다. 1진 프로선수가 아니면 그 잔디 위에서 축구화도 신을 수 없었다.

6만6천 관람석의 관객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그곳은 프로 선수들에게는 영광의 그라운드였고,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연 2억5천만 원 들여 키운 상암동 '귀족 잔디'

 오성규 서울시설공단 이사장.

오성규 서울시설공단 이사장. ⓒ 이희훈


2014 서울컵 센데이리그란?
서울특별시 시설관리공단은 오는 3월 29일부터 5월 10일까지 '서울컵 센데이리그'를 연다. 서울시 생활체육회와 마포구가 후원(협찬 LG전자)한다. 아마추어 직장클럽 32개 팀이 참여해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주경기장과 보조구장, 서울어린이대공원 운동장에서 총 63개의 경기를 펼친다. 예선전 48경기는 리그전, 16강 이후에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열리는데, 결승전은 주경기장에서 열리며 오마이TV가 생중계할 예정이다.

<선데이리그 안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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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대 축구전용 경기장의 하나로 손꼽히는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이 완공된 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열린다.

서울시 시설공단이 주최해서 오는 3월 29일부터 5월 10일까지 열리는 '서울컵 선데이리그'. 시민운동가 출신인 오성규 시설공단 이사장이 관람석에서 박수만 쳐왔던 시민들을 월드컵경기장으로 초대했다.

지난 18일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난 그는 이번 대회에서는 아마추어 직장클럽 32개 팀이 뛰지만 내년부터 참가 폭을 대폭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상암동 경기장은 K리그 FC서울이 연고구장으로 쓰고 있는데, 한해 K리그 18경기가 열린다. 나머지 경기 합해야 30여 회다. 대형 구장이어서 대형 문화행사를 해야 하는데, 유치가 어렵다. 크고 작은 행사를 포함하면 이용률은 연간 50여 회다. 큰돈을 들여서 관리하는 시민들의 자산을 비효율적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

시민들의 혈세로 운영되는 경기장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차원에서 선데이리그를 개최한다. 작년부터 준비해서 올해 첫 대회를 여는데, 내년에는 직장인뿐만 아니라 종교-사회단체나 동네 축구클럽 등이 참여하는 풍성한 대회로 키워나갈 생각이다."

사실 이번에 시민축구대회를 유치한 오 이사장도 축구라면 만사를 제처놓고 그라운드로 달려나가는 마니아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과 환경정의 사무처장을 했을 때만 해도 매주 수요일 성공회대 운동장에서 교수팀과 공을 찼다. 주 포지션은 오른쪽 날개. 시민사회단체 축구대회가 열리면 빠지지 않은 단골 주전 선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상암동 주경기장은 물론이고 보조구장에서도 뛰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왜였을까?   

상암동 잔디는 한국 토종 잔디가 아니라 양잔디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켄터키블루그라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습기에 취약하다. 이 잔디는 고온다습한 여름철에 병들기 쉽다. 우리나라의 기후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에 유럽에서 키우는 노력보다 10배 이상이라는 게 오 이사장의 설명이다. 지난해 일부를 보수하기는 했지만 이 '보물 잔디'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갈지 않고 애지중지 모시면서 키웠다. 지난 한해만 잔디 관리비용으로 쏟아 부은 돈만도 2억5천만 원이다.

잔디는 소모품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 이희훈


"우리 경기장은 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 주경기장이었던 스타드 드 프랑스(일명 생드니 경기장)를 벤치마킹했다. 그런데 그 경기장은 잔디를 1년에 4번이나 교체한다. 유럽의 다른 경기장도 비슷하다. 적게는 1번, 많게는 4번 교체한다. 잔디를 바꿔도 문제가 없을 정도의 기후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12년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잔디는 소모품이다. 프로 선수만을 위해 잔디를 모시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래야 개방할 수 있다."

오 이사장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에 독일 베를린 시에 있는 올림픽 경기장 갔는데 첫인상부터 달랐다. 시민들의 눈높이로 맞추었다. 가령 사람들이 걸어 들어가면서부터 경기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관람석에 앉아야만 그라운드를 볼 수 있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다. 커피와 토스트를 먹으면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2만 원 정도 되는 관람비를 내면서 투어하는 시민친화적인 프로그램도 있다. 개방이 또 다른 이익창출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도 월드컵경기장을 활짝 열린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다."

오 이사장은 지금도 전국의 월드컵경기장 중에 유일하게 매년 100억 원에 달하는 흑자를 내고 있는 '알짜 경기장'인데, 시민들에게 개방해서 더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번 대회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사회 갈등 해소와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할 것이라는 기대다. 

"다른 선진국들의 체육진흥정책 보고서를 보니 그 첫 번째 효과로 사회 갈등 해소를 꼽고 있었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종교와 집단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스포츠를 통해 이를 극복해왔다. 또 스포츠는 청소년의 게임 중독 등 폐쇄증을 치유하는 데도 많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 시설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차원을 넘어서 다문화와 청소년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시설 개방이 필요하다."

- 올해가 공단 창립 31주년이 되는 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단 산하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뿐만 아니라 어린이대공원, 청계천, 서울추모공원과 서울시립 승화원도 있다. 다른 시설도 월드컵경기장처럼 시민참여형으로 바꿀 계획을 갖고 있나?
"1000만 서울 시민 중 절반은 매일 시설공단이 관리하는 시설을 스쳐 간다. 그동안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시설을 관리하고 있지만 존재감이 없었다. 위로는 서울시로부터 지시를 받고, 밑으로는 시민들의 다양한 항의성 민원에 움츠린 내부 직원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부족했다. 서울시의 단순한 부속품이었고, 시설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유일한 사명인 양 결정돼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시설 안전은 기본이고 그 시설로부터 질좋은 서비스를 창출해서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가령 을지로 지하 계단을 피아노 건반을 치는 형태로 바꿨더니 보다 많은 시민들이 즐거워했다. 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의 개방 횟수를 늘리니까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연간 300일은 비어있는 스카이박스를 문화분야 사회적기업에 대관했더니 월드컵경기장을 거점으로 다양한 문화행사가 벌어져 많은 시민들이 즐기시더라. 시설 관리만이 아니라 시설 운영을 통해 서비스의 질을 제공하는 공기업으로 이미지메이킹을 하려면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자율책임경영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3년 뒤, 1천여 개 기관이 시설공단 파트너"

 오성규 서울시설공단 이사장.

"공유와 개방, 협업이 중요한 가치다. 그동안은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이를 외부 업체에 맡겨서 사업을 진행해왔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공공기관의 특성이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과정을 중시하는 시민운동의 특성을 공공기업에 접목시키면 새로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과정을 알차게 밟아나가려면 바로 시민들에게 개방해서 그 취지를 공유하고 협업으로 이끌어야 한다." ⓒ 이희훈


- 그럼, 시민운동가 출신 오성규표 혁신 공기업의 핵심 키워드는?
"공유와 개방, 협업이 중요한 가치다. 그동안은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이를 외부 업체에 맡겨서 사업을 진행해왔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공공기관의 특성이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과정을 중시하는 시민운동의 특성을 공공기업에 접목시키면 새로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과정을 알차게 밟아나가려면 바로 시민들에게 개방해서 그 취지를 공유하고 협업으로 이끌어야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경기장 맞은 편에 보이는 스카이박스를 가리키며) 저기 서울 일자리 플러스센터가 보이지 않나? 이 경기장에만도 50여 개의 스카이박스가 있다. 평소에는 비어있다. 저 공간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사회적 기업에 임대해줬다. 시민들이 직접 들어와서 공간을 활용하고, 경기장은 그들과 함께하면서 창의적인 문화 사업을 기획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지금 시설공단이 소유한 건물에 50여 개의 사회적 기업이 들어와 있다. 3년 뒤에는 1천 군데에 입주시킬 생각이다. 시설공단은 2천여 명의 직원이 운영하는 게 아니라, 1천여 개 기관과 공동운영하는 셈이다. 또 500명만 뛸 수 있는 월드컵경기장, 이게 말이 되는가? 천만 명이 함께 뛸 수 있는 경기장으로 만드는 게 핵심 키워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축구도 발전하지 않겠는가?"

- 3년 뒤에 1천여 개? 가능한 수치인가?
"시설공단은 200여 개 소에 걸쳐 있다. 한개 소당 5개의 파트너만 있어도 1천 개의 파트너를 만들 수 있다. 의지의 문제다. 가령 어린이대공원은 공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개방한다. 공원의 치안과 안전문제를 걱정하시는 분들, 동물과 식물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다. 주민들이 운영에 참여하게 하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한 시설에서 공원내에 캠핑장을 만들고 있는데, 전 같으면 외부 업체에 맡겨 며칠 만에 뚝딱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캠핑을 좋아하는 가족들을 초청해서 그들의 조언에 따라 조성하고 있다. 우리가 설정한 목표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시민들과 함께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시민들과의 스킨십을 통해 철밥통 이미지에 갇혀있던 공공기관도 거듭날 수 있다."

- 직원들은 업무가 늘어나서 싫어하지 않을까?
"지금은 모든 업무를 직접 진행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변화의 과정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업무를 시민들이 대신해주는 셈이다. 시민참여가 익숙해지면 그게 더 편하다고 느낄 것이다."

- 마지막으로 일부 언론이 오 이사장을 '낙하산 인사'로 비판한 적도 있다.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얼마 전 박원순 시장님이 한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도 그 질문이 나왔는데, 감사하게도 박 시장은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도 미진한 구석이 있음에도 좋게 평가해주셨다.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의 핵심은 결과적으로 무능한 행정가라는 것 아닌가. 전문성도 없는 인사가 와서 심각한 경영의 위기를 가져오면 큰 문제지만, 그 반대라면 박수칠 수 있어야 한다. 시민운동가 출신이 공기업 경영도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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