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쇼트트랙의 심석희가 18일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결승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한국 쇼트트랙의 심석희가 18일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결승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 연합뉴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잘했다. 수고했다. 자랑스럽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 결승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태극낭자들이 그저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다. 박승희(22·화성시청), 심석희(17·세화여고), 조해리(28·고양시청), 김아랑(19·전주제일고)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이 일궈낸 그야말로 값진 승리다.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특히나 나라별 경쟁을 치르는 올림픽에서는 극적인 순간들을 만끽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제각각 애국심에 의존하여 제 나라 대표선수들을 뜨겁게 응원함으로 누리는 숨 막히는 순간일 테다. 어제 벌어진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 결승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감동적인 영화의 클라이맥스와도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역전에 역전...기적을 이룬 막판 레이스

처음에는 대한민국이 주도권을 잡았다. 세계 랭킹 1, 2위에 올라 있는 대한민국 선수들의 레이스라 이대로 잡은 주도권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라 여겼고, 이 페이스를 잘 유지하면서 1등으로 결승점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선두를 놓치지 않고 있던 대한민국 대표팀은 18바퀴를 남긴 상황에서 순식간에 3위로 밀려나는 위기를 맞이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워낙 변수가 많고 발 하나 차이로 순위가 가려지는, 순발력을 우선하는 경기이기에 그저 안심한 상태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계주에서 18바퀴는 추격이 가능한 충분한 거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 도는 데 2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태극낭자들의 폭발적인 레이스 향연은 선두를 달리고 있던 중국을 다시 따라잡기 시작했다. 8바퀴를 남기고 역전에 성공한 대한민국. 터보 엔진을 장착한 스포츠카처럼 순식간에 돌진하게 만드는 그들의 선수 교체 기술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3위로 쳐진 대한민국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맨 앞에서 레이스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심장을 조이는 순간은 3바퀴를 남겨 놓고 또 다시 일어나고 말았다. 대한민국 선수들이 중국 선수들에게 또 다시 역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제 마지막 선수 심석희에게 모든 희망과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두 바퀴를 내리 달려야 하는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감이 지워지게 된 순간이었다.

심석희에게 마지막 두 바퀴는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와도 같았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로 기량을 마음껏 펼치고, 결과가 어찌 되건 노력에 따른 대가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여기까지 올라온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 따위를 가질 수 있는 여유를 17살 소녀가 갖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심석희는 알고 있었다. 이번 경기마저 금메달을 놓치게 된다면, 그저 1등만을 외치는 대한민국에게 또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사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여자 1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던 그녀였다. 만약 이번 계주에서도 1등으로 결승점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또 대한민국은 그녀를 바라보며 얼마나 지독한 한숨을 몰아쉬며 아쉬움을 쏟아냈을까?

어쩌면 그녀의 기적과도 같은 막판 스퍼트는 중국에게 설욕을 품은 오기나 끈기보다는 17살 소녀의 여린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국민들의 기대감과 1등이 아니면 그동안 트랙을 달리면서 느꼈던 모든 즐거움을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묵직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심석희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적을 냈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결승점을 향해 질주했고, 중국을 상대로 대역전극을 펼치는 기염을 토해냈다. 마지막 순간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이었음은 심석희가 아닌 중국 선수의 망연자실한 표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몇 번의 역전을 거듭한 끝에, 숨 막히는 접전과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한 끝에, 드디어 대한민국 태극낭자들은 여자 쇼트트랙 3000m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벅찬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뜨거운 눈물은 차가운 빙판을 녹였고, 태극기를 온 몸에 감싼 채 그렇게 트랙을 돌고 또 돌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그녀들의 눈물이 아팠고 미안했다. 금메달을 딴 사실은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그들과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은메달·동메달을 획득하고도 죄인처럼 지내야 했던 심석희와 박승희, 그리고 다른 선수들의 심적 부담감과 두려움이 생각나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기뻐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에 해방이 된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에 우는 듯해서.

파벌싸움으로 멍든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고질적 문제는 안현수를 러시아로 귀화하게 만들었고, 이런 저런 혼란들은 쇼트트랙 선수들의 가능성과 에너지를 몇 년째 소진시키고 있었다. 국민들은 쇼트트랙의 분탕질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쇼트트랙 선수들에게 칭찬을 하는 일에도 인색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 컬링 선수들의 약진을 응원하는 것처럼 비인기종목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잘 해온 효자종목 선수들이 부진을 보이고 실수를 했을 때, 더 큰 목소리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는 것 또한 국민들이 해야 할 몫이 아니었을까. 설사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스포츠 자체를 즐기려는 여자 쇼트트랙 선수들의 진정한 기쁨을 빼앗을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는데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DUAI의 연예토픽),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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