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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보냈던 청춘. 대학 도서관에 엉덩이를 붙이기보단 만화방이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탕진하고, 술에 절어도 건강한 간을 맹신했던 20대. 조강지처같은 애인을 두고도, 건수가 생기면 언제든 색다른 여자와 색다른 관계를 만들기 위해 수컷본능을 과시했던 젊은 날의 초상은 입버릇처럼 '청춘'을 핑계 삼으며 그 시절에 가능한 '낭만'을 택했다.

청춘들은 '대출'(대리출석)로 대학생의 본분을 대신했고, '대출'(학자금 대출)로 대학생의 지위를 연명했다. 골치 아픈 꿈과 희망에 대한 담론은 저 뒤로 미뤄뒀고, 그 빈자리에 술과 여자 등의 유희를 채웠다. 그 시절의 청춘은 참 화려했고 즐거웠다.

1990년대, 이런 청춘들도 있었다

 2일 개봉한 영화 <청춘예찬>의 한 장면. 영화 <청춘예찬>에서 주인공 태평 역을 맡은 김남희

2일 개봉한 영화 <청춘예찬>의 한 장면. 영화 <청춘예찬>에서 주인공 태평 역을 맡은 김남희 ⓒ 화란지우


대학 동기로 만난 세 친구 태평(김남희 분), 수용(이동휘 분), 종신(박주용 분)은 '놀고 먹는 대학생'이다. 그중 키가 크고 잘 생겨서 이성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태평은 당시 유행한 '청청패션'도 무리 없이 소화 가능한 킹카다. 세 친구가 함께 미팅에 나간 자리, 태평은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말솜씨로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파트너를 결정하는 사랑의 작대기 시간, 세 여자의 손가락은 죄다 태평을 향하고 있다. 태평은 그중 제일 예쁜 가희를 고른다. 사실 태평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가희는 두 번째 여자 친구였던 셈. 잘 나가는 태평은 두 여자 사이에서 아슬아슬 곡예 연애(?)를 하며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태평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다가온다. 그것은 군 입대.

시간이 흘러 태평은 제약영업사원이 되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종신은 고등학생 과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수용은 가짜 명품가방을 파는 일을 하고 있다. 모이기만 하면 즐거웠던 세 친구의 술자리는 이제 더 이상 즐거움을 공유하는 자리가 아니다. 낭만을 담았던 술잔에는 이제 세상살이의 시름이 담긴다. 어느새 한 가정의 가장이 돼버린 세 남자, 이들에게 '청춘'은 이제 너무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영화 <청춘예찬>은 한때는 잘 나갔다며 '전성기'를 운운하던 청춘들이 덜 성숙한 상태로 사회에 내던져지며 씁쓸하게 퇴화되어가는 과정을 현실적이며 냉정한 시선으로 그린다. 1990년대에 화려한 청춘기를 보낸 세 남자의 당시의 최우선 가치는 낭만을 가장한 쾌락이었다. 이들은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특권처럼 여기며 술, 여자, 섹스, 놀이 등에 탐닉한다.

지질해 보이는 친구 경태가 성인잡지를 보며 간접적으로나마 리비도를 방출할 때, 세 남자는 되는 대로 미팅을 하며 현실의 여자를 리비도의 분출 상대로 삼으려 한다. 이들은 미팅에 초지일관 '하룻밤 잠자리'를 배팅한다. 저열하지만 솔직한 수컷들의 속내다. 물론 이 수컷들은 이 저열한 목표의식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준비해 온 작업 멘트와 헤픈 리액션에 숨긴다. 이는 여자도 마찬가지. 내숭은 여성의 본능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미팅 장면 사이에 낀 화장실 장면은 남녀의 다른 심리를 관찰하는 재미를 준다. 남자 화장실 속 태평과 종신은 한 여자를 두고 옥신각신한다. 둘은 짐승처럼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펼친다. 반면 여자 화장실에 세 여자는 모두 태평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서로 양보하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 여자는 모두 태평을 찍는다. 화장실에서조차 내숭에 가려있던 여자들의 속내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약육강식의 논리가 당연시되는 냉혹한 사회에 이들이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이들은 전과 다름없이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나며 청춘을 소비하는데 몰두한다. 하지만 이들의 청춘은 전처럼 화려하지 않다. 재밌지 않다. 저만치 미뤄뒀던 꿈, 희망 등의 담론이 점차 현실로 다가와 이들의 삶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취업, 결혼, 육아 등의 숙제가 세 남자의 청춘을 점점 앗아가고 있던 것이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건 세 남자의 얼굴 표정과 옷차림만이 아니다. 자유와 쾌락으로 정서적 유대감을 쌓았던 이들의 우정도 저마다 달라진 직업과 그에 따른 연봉액수로 계급화 되었다. 공동의 추억담은 더 이상 재밌는 안주거리가 되지 못했고 함께하는 술자리가 줄어든 만큼 이들 간의 우정은 벌어졌고, 대화는 줄었다. 그나마 침묵을 깨고 나오는 대화도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 위악을 위한 자학, 공연한 핀잔 등으로 불편하게 채워질 뿐이었다. 추억으로 쌓았던 '20년간의 우정'은 이제 밤문화를 공유하는 '20만 원의 우정'으로 둔갑했다.

공감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동의하기 싫은 '청춘'의 단편들

 2일 개봉한 영화 <청춘예찬>의 한 장면. 대학 동기로 만난 세 친구 태평(김남희 분, 우측), 수용(이동휘 분), 종신(박주용 분)의 모습.

2일 개봉한 영화 <청춘예찬>의 한 장면. 대학 동기로 만난 세 친구 태평(김남희 분, 우측), 수용(이동휘 분), 종신(박주용 분)의 모습. ⓒ 화란지우


결국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독하게 암울한 '남자의 인생'이다. 영화는 군대, 취업, 결혼, 육아, 승진, 내 집 마련 등으로 요약되는 삶의 변곡점마다 남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조명한다.

영화에 비친 남자들의 삶은 비겁하지만 안쓰럽고, 더럽지만 서글프다. 종신은 취업을 하기 위해 학력을 위조하고, 용수는 미성년자와 미군의 원조교제를 알선해 돈을 번다. 그리고 태평은 병원장의 비위를 맞춰도 팔기 힘든 약을 결국 불법적인 방법으로 유통한다. 이처럼 영화 속 세 남자의 삶은 불법하지 않으면 불안정한 것처럼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여기에 이 영화의 단점이 있다.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열패감에 젖어 있다. 초반에는 세 남자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청춘을 찬양하지만, 후반에는 이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려버린다. 이들의 청춘을 칭찬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바꿔 꾸짖는 모양새다.

더군다나 영화는 태평의 실패와 경태의 성공을 도식적으로 비교한다. 경태는 세 남자가 놀 시간에 학업에 전념해 성공한 인물이다. 그리고 태평은 취업 대신 대학 시절에 낭만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는 노력해서 성공한 경태의 성공을 비웃고, 태평의 비루한 현재를 동정하고 응원한다.

이 영화가 가진 태생적 열패감이 이러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 장면의 목표가 남성 관객의 공감을 사기 위한 것이라면 일정 부분 납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의도였다면 자수성가한 경태보다는 가난한 종신이 습관처럼 비아냥대던 부자 부모로부터 태어난 자식들을 비교대상으로 삼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부족한 자본 탓으로 노출되는 독립영화의 기술적 흠결은 논외로 하더라도, 영화가 정성으로 채울 수 있는 디테일에 무심한 점이 참 아쉽다. 세 남자의 20년을 복장과 헤어스타일로만 구분한 점, 회사 사무실 장면마다 보기 거슬릴 정도로 광량의 조명을 쓴 점 등이 그렇다. 또한 영화에 깊게 밴 남성 중심적 사고가 종종 과하게 드러나 불편한 대목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을 죄다 남성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성적 도구로 그려 놓은 것이다.

한 가지 더, 조울증같은 결말도 불편하다. '수난시대'를 버티면 좋은 날이 도래한다는 원론적이며 진부한 결말은 되레 자식 세대에게도 같은 방식의 삶이 악순환될 것 같은 뉘앙스를 더 강하게 남기기만 한다.

영화는 도드라지는 단점들을 갖고 있지만 무엇보다 굴곡진 남자의 삶을 공감도 높게 그려내고 있다. 큰 사건 없이 다큐에 가까운 서사이지만, 그렇기에 세 남자의 이야기가 매우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우리 삶에 그렇게 유난스러운 사건은 없으니까 말이다. 세 남자를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력 역시 훌륭해서 이야기를 사실에 가깝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술에 취한 태평은 푸념한다. "예전엔 내가 정말 특별한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원 오브 뎀(One of Them)이야." 냉혹한 사회 안에서 세 남자의 화려했던 청춘은 이미 지고 없었다. 특별했던 남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더러운 현실을 감내하는 아저씨가 되어 있었고, 이들의 청춘을 상징하던 섹스는 달콤한 과정 없이 돈으로 이용이 가능한 스트레스 해소용 놀이로 변질되고 말았다.

접대에 실패해 일비만 날린 태평이 홀로 노래방에 앉아 '변해가네'란 노래를 울먹이며 부르던 장면이 내내 잊히질 않는다. 공감하지만 동의하기 싫은 남자들의 이야기, 불쾌하지만 참으로 눈물겹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jksoulfilm.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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