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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원숭이 그림자>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작품 무대는 '피스'라고 하는 숲이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숲통령 먹바위 딸과 평화를 염원하는 숲민들의 한 판 대결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숲을 무대로 한 우화소설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저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연재를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말

그만!
▲ 폭력은 그만!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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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고라니, 아이의 흔적을 찾다

늙은 고라니가 숲 광장에 도착했을 땐 달도 기울어 곧 날이 밝을 조짐마저 보였다. 원숭이 떼가 피스를 점령했던 시절 만들었다는 숲 광장은 한눈에 봐도 원숭이들을 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잘 꾸며진 광장은 생각보다 컸으며 무엇보다 먹을 것이 많아 늙은 고라니에겐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광장 주변으론 열매를 주렁주렁 단 야자수와 바나나 망고나무는 물론이고 원숭이들이 줄타기를 할 수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는데, 죄다 원숭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멀리로는 불을 훤하게 밝힌 먹바위 궁이 보였지만 궁 수비대로 인해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먹바위 궁을 처음 본 늙은 고라니는 '숲통령이 좋긴 좋은 자리구나' 하며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씁쓸해진 기분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에구, 무슨 팔자가 이 모양인지. 누구는 애비 잘 만나 저런 데서 살고 누구는 낙엽더미에서 살고……."

팔자타령을 늘어놓던 늙은 고라니가 코를 팽 풀고는 아이를 찾아 나섰다. 광장 어딘가엔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늙은 고라니는 아이의 냄새를 찾아 광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광장 바닥은 물로 씻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날의 참상을 말해주듯 광장엔 피 냄새로 가득했다. 어느 곳은 청설모가 흘린 피 냄새가 진동했고 어느 곳에 가면 노루와 사슴의 피 냄새가 진동했다. 어떤 곳은 피범벅이 되었는지 동시에 여러 동물의 피 냄새가 나기도 했다.

늙은 고라니는 광장을 떠도는 피 냄새만으로도 당시에 벌어졌던 상황이 그려졌고, 숲얼단의 진압 또한 얼마나 광폭하게 진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숲통령 자리를 찬탈했던 대머리독수리가 숲민 수천을 살육했을 때에도, 종신 숲통령을 꿈꾸던 먹바위가 숲민을 강에 던져 놓고 죽음의 낚시를 할 때에도, 온 숲이 피 냄새로 덮여 잠시만 걸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는데, 지금의 상황 또한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이의 냄새를 찾아다니던 늙은 고라니는 광장 한 귀퉁이에서 아이의 털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에 의해 강제로 뽑힌 게 분명해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몇 발짝 옆엔 아이의 피가 묻은 털 뭉치까지 떨어져 있었다. 늙은 고라니는 아이의 피 묻은 털 뭉치를 가슴에 품으며 오열했다.

"아이고 이놈아, 여기가 어떤 곳이라고 여길 왔더냐……."

미친 척 해야 살아남은 피스 숲

새벽 시간 늙은 고라니의 울음이 광장에 퍼지자 순찰을 돌던 숲경찰이 달려왔다.

"이 시간에 뭐하는 짓이야!"
"옳거니 잘 만났다. 니 놈들이 그랬지. 이놈아, 우리 아이 어디 있냐!"

늙은 고라니가 숲경찰을 붙잡고 악을 썼다. 아이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한 마당에 숲경찰이라고 해서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런 썅! 늙은 것이 어디다 대고 패악질이야!"

멱살을 잡혔던 숲경찰이 늙은 고라니를 밀쳐내며 방망이를 뽑아 들었다. 그러곤 늙은 고라니를 향해 사정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뒤로 벌러덩 넘어진 늙은 고라니는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숲경찰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온몸으로 받았다.

"니 년도 빨갱이지? 그렇지? 맞지? 빨리 불어!"

숲경찰은 몽둥이를 내리 칠 때마다 늙은 고라니를 빨갱이라 몰아 붙였다. 느닷없고 난데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사실대로 말하라고 다그칠 땐 비명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몽둥이를 휘두르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여기저기에서 핏방울이 튀었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도 몰려왔다.

피를 본 숲경찰은 더욱 흥분하여 저 혼자 미친 듯 날뛰었다. 늙은 고라니는 이러다간 아이를 찾기도 전에 숲경찰의 손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히히, 오라버닌 내가 좋은가봐. 푸헤헤……."

늙은 고라니가 거품을 입 안 가득 물고는 미친 척을 했다. 아무래도 제정신으로는 숲경찰의 손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였다. 늙은 고라니는 몽둥이질을 당하면서도 히죽히죽 웃거나 흐르는 피를 얼굴에 찍어 바르며 눈자위를 허옇게 까뒤집었다.

"아유, 귀여운 내 새끼. 어딜 갔었냐? 이리 오렴!"

늙은 고라니가 피를 흘리며 숲경찰에게 달려들었다.

"허어, 이년이 미쳤나?"

몽둥이질을 하던 숲경찰이 순간 움찔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늙은 고라니가 거품을 턱밑까지 흘리며 다가갔다.

"네 이놈! 어미를 두고 어딜 가는 겨!"

늙은 고라니가 몸을 질질 끌며 숲경찰을 따라갔다. 누가 보더라도 늙은 고라니는 미친 여자로 보였다. 숲경찰이 당황한 듯 몇 걸음 더 물러서며 주변을 살폈다.

"어어, 왜이래요!"
"이놈아, 이리 오라니까!"

늙은 고라니가 숲경찰을 따라가며 소리쳤다.

"나, 난 당신 아들이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숲경찰이 몽둥이를 집어 던지더니 몸을 돌려 냅다 뛰기 시작했다. 숲경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늙은 고라니는 참았던 고통을 쏟아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니 놈들이 내 아이를 나처럼, 그렇게… 때렸겠구나!……."

늙은 고라니가 울음을 토해내며 피 묻은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몽둥이는 일반적인 몽둥이와 달리 곳곳에 철심이 박혀있어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때문이었던지 늙은 고라니의 몸 곳곳에는 털이 숭숭 빠져있었고 상처도 깊게 나 있었다.

늙은 고라니는 멍하니 상처를 바라보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털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아이의 털 뭉치와도 비슷해 아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늙은 고라니가 울음을 큭큭 삼키며 울부짖었다.

"이놈아, 어미가 왔다. 어디에 있더냐……."

한참을 울던 늙은 고라니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여기저기 피가 나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아이를 찾는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늙은 고라니는 광장에 떠도는 아이의 피 냄새를 쫓아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피를 흘리며 끌려갔는지 길게 핏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은 광장 중앙에서 시작해 오른 편 끝에 있는 망고나무 아래에서 멈추었다. 아이의 피 냄새를 따라가던 늙은 고라니도 그쯤에서 멈추었다.

늙은 고라니는 아이의 냄새가 멈춘 자리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아이의 흔적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늙은 고라니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이가 어디로 갔을 지에 대해 유추해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끌려왔다 해도 그때까진 살아 있었다는 것이니 이곳에서 어디로 갔을 것이며, 상처 난 몸을 스스로 끌고 왔다 하여도 여기에서 어디로 갔는지 늙은 고라니로선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이의 행방? 알지만 말해줄 수 없어 미안!

늙은 고라니가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늙은 고라니는 아이가 공중으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은 이상 아이의 흔적이 이처럼 감쪽같이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늙은 고라니는 주변을 둘러보다 가까이에 있는 망고나무에게로 갔다.

"망고야, 엊그제 새벽에 있었던 일 기억하지? 여기에 있던 고라니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핏자국을 보니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망고나무는 늙은 고라니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아인 기억나지 않는 걸. 뭐 설령 안다고 해도 난 말해줄 수 없어."
"왜지?"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먹바위 딸이나 늑대가 날 그냥두지 않을 거야."

망고나무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그들이 왜?"

늙은 고라니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먹바위가 숲통령을 할 때 먹바위의 행동을 비난했다가 잘린 나무가 열 셋이었고, 대머리독수리가 숲통령을 할 땐 살육장면을 말했다는 죄로 불타버린 나무가 다섯이나 되었어. 또 시궁쥐가 숲통령이었을 땐 시위대에게 열매를 제공했다는 죄로 뿌리 채 뽑힌 나무가 일곱이나 되었지. 끔찍한 일이었어. 그런 일이 있고나자 우리도 스스로 다짐을 했지. 알아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며 살자고 말야."

망고나무에게 사연을 들은 늙은 고라니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내 아일 찾겠다고 널 죽일 수는 없겠지."
"미안해.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냐."

아이의 행방에 대해 말해 줄 수는 없었지만 망고나무는 늙은 고라니에게 어떤 일로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방법? 그게 뭔데?"
"그때 원숭이 몇이 열매를 따러 왔다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거든. 어쩌면 그들은 아이의 행적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야."

망고나무가 말했다.

"나무조차 불태우고 자르는 놈들인데, 원숭이라고 무사하겠니?"

늙은 고라니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먹바위 딸이나 늑대도 원숭인 어쩌지 못할 거야. 그들은 원숭이나라 왕의 후손들이거든."
"그래서 원숭이들은 건들지 않는다?"
"그렇지. 여태껏 피스에서 원숭이를 해한 숲통령은 하나도 없었어. 해하기는커녕 지금도 서로 아부하느라 정신들이 없지."
"그렇게 대접받는 원숭이들이라면 과연 아이의 행방에 대해 말해줄까?"
"그건 나도 장담할 수 없어."
"좋아. 근데 그들은 어디서 찾지?"
"나도 어디 사는 진 모르지만 며칠에 한 번씩은 열매를 따러 여길 와."
"무슨 이야긴지 알겠어."

늙은 고라니가 아이의 핏자국이 있는 곳에 자릴 잡았다. 원숭이가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게 답답했지만 다른 방도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늙은 고라니는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혓바닥으로 자신의 상처를 핥았다. 그 모습을 본 망고나무가 몸을 흔들어 열매 몇 개를 늙은 고라니 곁에 떨구어 주었다.

"상처에 도움이 될 거야."
"이 귀한 걸……망고야, 고마워."

망고열매는 피스에서 친원파나 원숭이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열매였다. 물론 늙은 고라니도 망고는 난생 처음이었다. 언젠가 상처 난 노루가 치료제인 망고를 구하러 갔다가 원숭이에게 걸려 반병신이 되었다는 이야긴 늙은 고라니도 들었던 적 있었다. 그만큼 구하기 힘든 망고열매가 눈앞에 떨어져 있었다.

갈증에다 허기가 졌던 늙은 고라니는 망고 두 개를 급히 먹어 치웠다. 껍질은 따로 두었다가 상처를 치료하는데 사용했다. 망고는 소염제 성분이 있어 비수리나 가래나무보다도 염증에 관한 치료 효과가 몇 배나 컸다. 치로약으로서도 누구나 탐내는 그런 열매를 선뜻 건넨 망고나무가 새삼 고마웠다.

"망고야, 이렇게 달달하고 맛있는 열맨 처음이야……."

늙은 고라니의 표정이 모처럼 맑고 환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강기희 기자는 소설가로 활동중이며 저서로는 장편소설 <은옥이 1.2>, <개 같은 인생들>, <도둑고양이>,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연산> 등이 있으며, 청소년 역사테마소설 <벌레들> 공저로 참여했습니다.



태그:#국정원, #박근혜, #망고열매, #동물,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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