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는 스타는 물론 예능, 드라마 등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 주장, 반론 그리고 인터뷰 등 시민기자들의 취재 기사까지도 폭넓게 싣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노크'하세요. <오마이스타>는 시민기자들에게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말

천둥 같은 기타소리가 클럽 안의 공기를 찢어발긴다. 베이스는 관객들의 귀를 육중하게 찍어 누른다. 드럼의 충격파가 정신없이 온 몸을 구타한다. 짐승 같은 보컬의 괴성이 귀를 찌른다. 흥분한 관객들이 서로를 밀치고 머리를 흔든다. 몸과 몸이 격하게 부딪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온 몸이 땀범벅이다. 이쯤 되니 슬슬 두렵다. 과연 두 발로 멀쩡히 걸어서 집에 갈 수 있을까. 들리지도 않는 장내방송이 환청마냥 머릿속을 울린다.

"홍대클럽 발 지옥열차,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바세린은 다른 인디밴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노동을 음악을 위한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의 연장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하드코어 스타일'이라 했다.

바세린은 다른 인디밴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노동을 음악을 위한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의 연장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하드코어 스타일'이라 했다. ⓒ 네이버 온 스테이지


헤비록 신의 '끝판왕', 바세린의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다

지난 5일 저녁, 홍대 클럽 디딤홀에서 열린 'Hellride: Resurrection Of Death Party(헬라이드: 레저렉션 오브 데스 파티'의 풍경이다. 공연명이 말해주듯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 자만이 즐길 수 있는 공연. 오딘, 메소드, 독솔로지 등의 하드코어-메탈 밴드들이 함께 참가한 가운데 밴드 바세린은 이 공연의 '끝판왕'으로 무대에 섰다.

저녁 9시, 튜닝타임 후 바세린의 등장을 알리는 시그널 뮤직이 나왔다. 잠시 숨을 고르던 관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환호한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눈빛이다. 다시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준비를 모두 마친 기타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드러머가 미친 듯이 페달을 밟으며 속도를 냈다. 페이스 조절을 하던 관객들이 이제껏 비축해 놓은 힘을 전부 토해낸다. 마치 용암이 끓어 넘치는 것 같다. 이렇게 투지 넘치는 관객들이 존재하는 록 신을, 과연 누가 죽었다 말했던가.

바세린의 사운드는 관객들의 심장에 불을 지른다. 자기도 모르게 속에 있는 무언가를 폭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니아들에게 바세린이 헤비 록 신의 최강자로 통하는 건 그래서다. 동시에 이 신에서의 최고 흥행카드기도 하다. 이들은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을 비롯해 여름에 열리는 주요 뮤직 페스티벌에 단골로 참여하는, 몇 안 되는 국내 하드코어-메탈 밴드 중 하나다. 대중들에게는 2005년 대한민국 대중음악시상식에서 록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직장인 밴드로 알려져 있다.

"무엇으로 불려도 좋지만 아마추어리즘은 사절!"

사실 이들이 '직장인 밴드'라는 매체의 보도들은 맞고 반은 틀리다. 보컬인 신우석과 베이스의 이기호, 기타의 조민영은 각자 본업이 있다. 신우석은 모션 그래픽 업체, 이기호는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 디자인 팀, 조민영은 유통회사에 각각 근무한다. 반면 작곡을 도맡고 있는 이강토(기타)와 드러머 최현진은 전업 뮤지션이다. 특히 최현진은 서태지 밴드의 드러머로 발탁돼 8집 활동기간 내내 활동했다. 본업에 종사 중인 멤버들 또한 인디신에서 수년 간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다. 과연 그들을 직장인 밴드라 부를 수 있을까.

그들은 이 꼬리표에 대해 "사실 저희도 불만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사하다"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를 알리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고, 우리를 더 잘 알리기 위한 배려라 생각한다"는 게 그 이유다. 멤버 모두 자신들이 어떤 성격의 밴드인지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면서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자신들이 어떤 밴드로 규정되든 간에 음악을 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아마추어리즘을 배제하고 싶어 했다. 단순히 '아름다운 도전'에 의의를 두는 밴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는 음악이 분명 본업은 아니기 때문에 취미라고 부를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마추어리즘까지 좋은 건 아니에요. 그건 싫어요. 음악을 하는 순간만큼은 프로페셔널이라 생각해요. 그렇다고 투 잡이라는 개념도 맞진 않고. 우리가 노래를 만들어서 돈을 벌어야겠다, 뭐 그건 아니니까. 오히려 음악 한다고 돈을 내는 입장인데(웃음). 그보다는 좀 더 좋은 소리를 듣고 싶다는 그런 마음들이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 프로답게 하자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죠." (조민영)

직장인 밴드? 인디신의 현실을 모르는 모호한 수식어

 바세린의 록 사운드는 없는 힘도 쥐어짜게 만들만큼 피를 끓게 한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폭발하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바세린의 록 사운드는 없는 힘도 쥐어짜게 만들만큼 피를 끓게 한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폭발하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 GMC 뮤직


정말 모호한 것은 바세린의 정체성이 아니라 '직장인 밴드'라는 수식어 그 자체다. 인디신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상당수가 음악 외의 경제활동을 통해 생계를 꾸린다. 음악활동만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유지키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 이유로 토요일 밤을 뒤흔드는 클럽의 스타들은 동시에 외국계 기업의 회사원, 편의점 점원, 그리고 이삿짐센터의 인부기도 하다. 이들 역시 직장인 밴드로 불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은 프로일까, 아마추어일까. 아니, 이들의 음악생활은 과연 직업일까, 취미일까. 직업이 아닌 일을 취미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절대 이 난제를 풀 수 없다. 바세린만을 굳이 직장인 밴드로 봐야 할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라진다. 밑바닥에 남는 것은 단 하나다. 그들이 여타의 인디밴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차이가 있다면 노동을 음악을 위한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의 연장이라 믿는다는 점이다. 리더인 신우석은 "우리들의 정신적 정체성을 '하드코어'(Hardcore)에 두고 있다"고 했다.

하드코어는 펑크에서 파생된 음악으로, 80년대 초반 뉴욕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창조된 문화코드를 말한다. 당시 하드코어는 하층 노동자와 가난한 청년들의 지지를 받았던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총합이었다. 소수가 향유하고 있던 이 문화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과격하고 극단적인 연주 스타일로 표출됐다. 일부는 기존 펑크에서 약간의 변화를 줬고, 나머지 일부는 메탈과 결합했다. 그 무렵의 하드코어 밴드들은 노동을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행위인 동시에, 더 진솔한 음악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원천으로 봤다. 

하드코어라는 문화 코드에서 노동이 갖는 의미는 그래서 남다르다. 대부분의 밴드들이 겸업을 고집한다. "노동 없는 글쓰기는 공허하다"며 생계와 창작활동을 끝내 병행하고 마는 몇몇 소설가들의 고집을 닮았다. 바세린도 다르지 않다. "노동은 음악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니 "우리는 본업도, 음악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들에게 본업이란, 음악이 노동의 일부로 전락해 본연의 즐거움을 잃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패이자, 자아실현 그 자체다. 과격한 사운드와는 달리 상당히 건강한 마음가짐이다.

"음악하기 위해 모든 걸 내거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같은 경우는 우리가 이뤄놓은 커리어도 중요하게 생각해요. 저는 직장에서 영상과 그래픽을 맡고 있고, 동시에 밴드에서 보컬을 하고 있죠. 엄밀히 말해 음악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좋아하는 거 두 가지를 좇고 있는 셈이에요. 그리고 하드코어라는 게 라이프 스타일이 중요하거든요. 뭐든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말로 하드코어 스타일이니까, 언제나 그것에 충실하려 합니다." (신우석)

틀릴지언정 보정하지 않는 사운드, 야생의 끝을 보여주마!

 바세린의 새 앨범 <블랙 사일런스(Black Silence)>

바세린의 새 앨범 <블랙 사일런스(Black Silence)> ⓒ GMC 뮤직


노동과 창작이 병행하는 삶은 상당한 강행군을 요한다. 바세린 멤버들은 퇴근 후 틈틈이 작곡을 한 뒤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수정과 편곡을 한다. 남은 작업은 주말에 녹음실을 빌려 같이 마무리한다. 악기와 보컬 녹음은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한다. 서로 근무하는 직장의 환경이 많이 달라서다. 퇴근 후 새벽까지 녹음을 마친 후 잠도 자지 않고 다시 출근한 날도 많았다. 그렇게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세 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작업을 마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녹음 방식이 필요했다. 해서 1집 작업은 트랙별 녹음보다 합주 형식의 원 테이크 레코딩을 주로 이용했다. 박자와 합이 미묘하게 맞지 않는 부분들도 보정 없이 앨범에 담았다. 잘 다듬어진 여타의 앨범들에 비해 유려한 느낌은 없지만, 그야말로 '야생'의 사운드다. 항상 칼처럼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는 사운드만이 감흥을 주는 건 아니다. 이들의 앨범이 그렇다. 

"사실 녹음 작업이란 게 두어 달에 걸쳐 하는 게 보통인데, 일이 바쁘니까 한 달을 내리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안 돼요. 1집 앨범은 녹음하는 데 정확히 3일 걸렸어요. 기타 녹음 하루, 보컬 녹음 하루, 드럼 녹음 하루, 해서 3일 만에 끝났죠. 그래서 드럼 같은 경우는 사실 티가 안 날 뿐이지 미묘하게 틀린 부분도 많고 그래요." (신우석)

"1집 앨범은 주로 합주 사운드를 담는 원 테이크로 녹음했어요. 한 번 합주를 하고 모니터를 한 뒤 '야, 이번에 틀린 사람 없지?' 이러면 녹음을 끝냈죠.(웃음) 다들 시간이 안 맞아 급하게 녹음을 해왔는데, 그중에서도 1집 녹음이 제일 빡세지 않았나 싶어요. 사람들이 요즘 록 음악은 야생성이 죽었다고 하는데, 1집이야말로 진짜 야생이지. 진짜 그때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조민영)

이후의 앨범들은 원 테이크가 아닌 트랙별 녹음을 사용했다. 몸이 힘들어도 좀 더 완성도 높은 사운드를 선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녹음을 하는 방식에서 천천히 시간을 두며 손질하는 과정으로 방식을 바꿨다. 이번 9월에 발매된 새 앨범 <블랙 사일런스(Black Silence)>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손이 많이 간 작품이다. 멤버 모두가 "역대 앨범 중 가장 많은 공이 들어간 작품"이라 자부했다.

분명 허언이 아니다. 편곡은 이전보다 더 드라마틱해졌고, 덥스텝(Dub Step)과 이모(Emo) 계열의 사운드처럼 현재 유행하는 스타일이 적재적소에 담겨있다. 1990년대식 정통 메탈의 구성들을 대거 끌어온 시도도 흥미롭다. 소리의 질감은 이전 앨범들보다 훨씬 매끄럽고 입체적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발을 내디뎠다 생각해요. 그간 부담이 좀 있었는데, 앨범을 진행하면서 자신감도 생겼고, 만들어놓고 보니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라 느낍니다. 3집보다 더 발전된 음악이라 자부할 수 있어요. 새로운 기타리스트 강토하고도 융합이 잘 됐고. 분명 부끄러운 앨범은 아니라 생각해요." (신우석)

"저희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리 소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내면 좋겠는데, 음악만이 직업이 아니다보니 그러기 쉽지 않아요. 솔직히 작곡과 연습만으로도 벅차죠. 전업 뮤지션인 강토가 사운드 공부를 중심적으로 하고 우리는 도움을 많이 받는 입장이에요. 동시에 엔지니어 조상현씨의 도움도 많이 받았죠. 이번에 그분이 사운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아졌어요. 거의 제 6의 멤버 수준이죠.

이번 작품이 바세린 역사상 가장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 앨범이라 생각해요. 작업 과정에서 편곡이 정말 많이 들어갔어요. 많은 분들이 좋다고 해주시는데, 팬 분들의 말처럼 음악적으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하진 않고, 아직 테스트와 실험 단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을 만들기 전에 다음 앨범은 메탈리카 4집(<저스티스 포 올(Justice For All)>)과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 했었어요. 전작에 비해 약간은 난해하고 듣기 힘든, 하지만 탄탄한 구성에 깊이 있는 음악을 하기 원했는데, 다는 아니라도 반 정도는 보여준 듯해 만족스럽습니다." (조민영)

죽을 때까지 청년이고 싶은 그들의 하드코어 스타일

바세린이 만들어진 지 이제 17년째다. 멤버들의 나이는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어섰다. 헤비록 뮤직은 거친 사운드만큼이나 밴드의 수명도 짧다. 모든 밴드가 메탈리카나 메가데스처럼 환갑이 되도록 헤비록을 연주하진 않는다.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음악을 할 수 있을지 슬슬 생각하게 될 나이다. 사회생활과 음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입장에선 지금보다 이후의 강행군이 분명 더 벅찰 것이었다. 체력과 감각 모두 받쳐줘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야망은 크다.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서도 10대와 20대들이 열광하는 음악을 만드는 게 목표"다. 최신곡 몇 소절 부를 줄 안다고 중년이 순식간에 청춘의 정서를 갖게 되는 건 아니다. 새로운 세대의 피를 끓게 하려면 젊었을 때의 자신을, 그때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현실은 녹록치 않다. 조직생활은 꿈 많은 청년들도 순식간에 노화시킬 만큼 매몰차다. 세파에 당당히 저항할 줄 아는 몸과 정신이 필요하다.

참 부럽게도, 바세린은 그 저항에 당당히 견딜 수 있을 만큼 꽤나 단단해 보였다. 밤 11시 반, 인터뷰가 끝난 이후에도 그들은 자리를 파하지 않았다. 이후 스케줄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낮부터 지금까지 한 차례의 합주연습, 두 번의 공연, 심야 인터뷰를 소화한 상태였다. 멀찍이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하드코어 스타일'이 무엇인지, 그제야 감이 왔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피가 끓었다.

바세린 헤비록 블랙 사일런스 하드코어 헬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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