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정녕 한국 공격수들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 무대일까. 박주영(아스날)과 지동원(선덜랜드)는 한국 국가대표 출신 공격수들이 올시즌 나란히 EPL 무대에서 참혹한 시간을 보내며 지긋지긋한 징크스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로 꼽히는 EPL은 그동안 박지성·이영표·설기현·이청용·김보경 등 무수한 한국인 스타들이 거쳐가며 국내 팬들에게도 이제 친숙한 무대가 됐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미드필더나 수비수였다. EPL에 도전한 한국인 선수 중 성공했다고 할 만한 사례를 아직 배출하지 못한 포지션이 바로 공격수다(EPL 진출사례가 없는 중앙수비나 골키퍼는 제외).

스트라이커로 EPL에 진출한 선수는 이동국(당시 미들즈브러)·박주영·지동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중 EPL에서 뚜렷한 활약은 남긴 선수는 아무도 없다. 설기현도 종종 중앙 공격수로도 활약했지만 정통 포지션은 측면 미드필더나 윙포워드에 더 가까웠다. 설기현은 벨기에 리그 시절만 해도 한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공격수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영국 무대에서는 주로 2부리그(챔피언십)나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중하위권팀을 전전했다. 그리고 레딩 시절 후반기 이후로는 벤치를 전전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며 EPL에서 큰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반짝하던 시절이라도 있었던 설기현에 비해, 다른 한국인 스트라이커들에게 EPL은 한마디로 '악몽'이었다. 이동국·박주영·지동원 모두 EPL 진출 직전만 하더라도 국내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히며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할 만큼 소위 '잘나가던'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모두 EPL 진출 이후 하나같이 축구인생 최악의 슬럼프에 빠지며 커리어의 내림세로 접어들었다는 것도 기묘한 공통점이다.

이동국부터 박주영·지동원까지... 내림세 탄 한국인 공격수들

 잉글랜드 프로축구 아스널 박주영 선수

잉글랜드 프로축구 아스날의 박주영 선수. 박주영 선수는 최근 18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선발출장 하지는 못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이동국은 2007년 미들즈브러에 입단하며 K리그 선수로 EPL에 직행한 첫 번째 사례에 이름을 올렸다. 2001년 독일 베르더 브레멘 임대생활 이후 두 번째 유럽진출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이동국은 미들즈브러에서 FA컵과 칼링컵에 나서 각각 한 골씩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리그 경기에는 무득점에 그치며 결국 2년 만에 K리그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현지에서 이동국의 닉네임이 '골 못 넣는 공격수'였다. 이후 이동국은 2009년 전북에서 부활할 때까지 부침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박주영·지동원의 악몽은 현재진행형이다. 박주영은 2010~11시즌 프랑스 AS 모나코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상종가를 달리고 있었고, 당시 프랑스 챔피언 릴 OSC의 러브콜을 받고 입단을 눈앞에 뒀으나 아르센 벵거 감독의 제의를 받고 전격적으로 진로를 수정, 2011년 아스날에 깜짝 입단했다.

그러나 EPL행은 승승장구하던 박주영에게 몰락의 전주곡이었다. 박주영은 2011~2012 시즌을 통틀어 고작 6경기에 나서는 데 그쳤다. 유일한 득점은 컵대회에서 올린 한 골이 고작이었다. 정작 프리미어리그 경기에는 단 한 경기에만 교체출전했다. 이듬해 박주영은 스페인 셀타비고로 임대됐으나 여기서도 적응에 실패하며 21경기 3골이라는 부진한 성적표를 받았고, 올 시즌 아스날에 다시 복귀한 이후로는 1군 경기에 단 한 번도 나서지 못하고 있다.

지난 26일 웨스트브롬과의 캐피털 원컵 3라운드에서 박주영은 오랜만에 18인 출전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정작 출전기회는 잡지 못했다. 그동안 아스날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던 니클라스 벤트너도 선발출전했지만, 박주영은 토마스 아이스펠트나 추바 악폼같은 10대 유망주들에게 밀렸다.

로빈 판 페르시(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외에 이렇다할 대체공격수가 없던 2011년에도 아스날의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배제됐던 박주영으로서는 올리비에 지루·루카스 포돌스키·야야 사노고·니클라스 벤트너 등 공격자원이 훨씬 풍부해진 아스날에서 출전 기회를 얻기가 사실상 힘들어 보인다. 소속팀에서의 부진으로 대표팀에서도 1년 가까이 제외된 박주영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 출전도 현실적으로 점점 멀어지고있는 상황이다.

2011년 아시안컵에서 주전 원톱으로 활약하며 한국축구의 미래로 평가받았던 지동원 역시 EPL 선덜랜드 입단 이후 기량이 정체됐다. 2011~12시즌 주로 교체멤버로 활약하며 당시 우승팀 맨체스터시티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는 등 12경기 2골로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듬해부터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2012~13시즌에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돼 17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는 등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선덜랜드로 복귀한 올 시즌 다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 8월 풀럼전부터 3경기 연속 출전했음에도 부진했다. 특히 크리스탈 팰리스전(9월 1일)에서는 완벽한 헤딩 기회에서 소극적인 플레이로 기회를 날려 현지 언론의 거센 비판을 들어야 했다. 공격력 부진으로 시즌 초반부터 리그 최하위에 그치는 등 험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선덜랜드지만, 스티븐 플레처·조지 알티도어·코너 위컴·파비오 보리니 등에게 밀린 지동원이 언제 다시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차범근 닮아가는 손흥민

손흥민, "승리는 국민의 응원 덕분"  한국 축구대표팀이 11일 저녁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1대 0으로 승리하자, 손흥민이 손을 들어보이며 팬들에게 화답하고 있다.

현재 레버쿠젠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 선수. 사진은 지난 6월 11일 2014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 당시 모습. ⓒ 유성호


한국인 공격수들이 왜 유독 EPL에서 부진한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유난히 강한 압박과 피지컬을 중시하는 EPL 무대에서 한국 공격수의 체격과 스피드로는 최전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선수들이 이적 당시 소속팀의 상황이나 주전 경쟁 등 주변 상황을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이름값에 취해 성급하게 이적을 결정한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유럽무대 전체를 살펴봐도 한국인 공격수가 성공한 사례는 한국축구 역대 최고의 레전드로 꼽히는 '차붐' 차범근 정도다. 차범근은 1970~80년대 유럽최고의 무대였던 분데스리가를 평정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았다.

전성기의 차범근의 플레이는 오늘날 국내 공격수들에게도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차범근은 국내에서는 윙포워드에 가깝게 플레이를 했다면,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사실상 중앙 공격수로 전업했다. 당시 투톱 시스템이 보편화됐던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은 주로 타깃맨 아래의 처진 공격수로 활약했는데, 미드필더에서의 공격전개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차범근이 측면으로 빠져나와 윙어에 가까운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의 포지션이 윙포워드였다고 혼동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최전방 공격수로서의 피지컬과 측면에서 활약할 수 있는 스피드를 모두 겸비한 차범근이었기에 가능한 플레이였다.

차범근의 뒤를 잇는 손흥민도 플레이 스타일은 다르지만 측면과 중앙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선수다. 지난해 함부르크에서 12골을 기록하며 차세대 스타로 발돋움했고, 올 시즌에는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뒤 왼쪽 측면 윙포워드로 변신하며 조금씩 차붐의 아성을 좇아가고 있다.

이동국은 스피드와 활동량에서 유럽 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박주영·지동원은 상대적으로 최전방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지만 반대로 어떤 포지션에서도 어정쩡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유럽무대에서도 부진이 길어지며 측면도 중앙도 아닌 플레이를 하면서 원톱 공격수로서의 감각까지 상실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과가의 이동국처럼, 박주영과 지동원에게도 현실적으로 '탈출' 이외의 새로운 돌파구는 없어 보인다. 어느 팀에 가서도 경쟁을 이겨내고 주전을 차지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기량이 없는 다음에야, 선수로서 자기에게 어울리는 소속팀을 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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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손흥민 지동원 EPL 공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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