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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호텔에서 바라본 묘향산 계곡(2005. 7. 24.)
 향산호텔에서 바라본 묘향산 계곡(2005. 7. 24.)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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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귀향 

고향 가는 날

이튿날은 준기가 마침내 고향집으로 가는 날이었다. 세 가족은 향산호텔에서 아침밥을 들었다. 이날 아침 밥상에도 고비 나물국에 깨끔한 반찬들이 가득 나왔지만 준기는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 아마도 고향집을 찾아가는 설렘 때문이었다. 준기 가족은 아침밥을 먹은 뒤 북쪽 두 선생과 함께 향산호텔을 출발하여 고향집으로 향했다. 준기는 승용차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준기는 1950년 7월 10일, 고향 구장역에서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입영열차를 탔다. 그날 이후를 정확히 헤아려 보니 꼭 45년 한 달 하루 만에 찾아가는 멀고 먼 고향 길이었다. 준기는 부모님을 비롯한 학교 선생님, 동네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조선인민군에 입대했던 그날이 바로 어제처럼 떠올랐다.

"어린 시절 원족 가는 기분입네다."

준기가 다소 들뜬 채 앞자리 두 선생에게 말했다.

"감사합네다. 선상님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은 오로디 수령님과 지도자 동지, 그리고 앞에 두 분 선상님 덕분이야요."

옆자리 어머니도 두 선생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오로디 수령님과 지도자 동지 덕분이디요."

리 선생의 대답이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바라본 운해(雲海)(2005. 7. 23.)
 백두산 장군봉에서 바라본 운해(雲海)(2005. 7. 2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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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은 의구하다

원래 영변군은 평안북도 동남부로 동쪽은 평안남도 영원군, 서쪽은 박천군, 남쪽은 평안남도 안주군, 북쪽은 평안북도 운산군과 붙어 있었다. 묘향산맥이 서쪽으로 뻗으면서 묘향산과 용문산 멧부리가 불쑥 솟았고, 그 여맥이 군내로 미쳐 대부분 산지를 이루고 있다.

청천강이 이 산지 사이를 가로지른 탓으로 강 유역에는 평지가 조금 있었다. 만포선 철도가 청천강을 따라 이 고장을 지나며 구장, 어룡, 신흥동, 북신현, 묘향산 등 여러 역을 만들었다. 만포선은 구장역에서 다시 동룡굴을 지나 용등에 이르는 용등선으로, 어룡역에서는 용문탄광에 이르는 지선으로 갈라졌다. 

준기는 향산호텔을 출발하자 눈과 귀에 익은 산천과 지명들이 펼쳐졌다. 신흥, 어룡, 구장… 곧 저 멀리 용문산이 보이고 그밖에 크고 작은 고향 산들이 엊그제 본 듯 눈에 익었다. 준기의 고향마을 구장동에서 영변 읍으로 가자면 매생이를 타던 나루터에는 그새 고속도로가 뚫리고 큰 다리가 놓여 있었다. 준기는 승용차 차창을 열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리 선생이 뒷거울로 준기를 보며 물었다.

"고향에 온 소감이 어떠십네까?"
"그 왜 '산천은 의구하다'는 넷(옛) 말 그대로야요. 긴데 고향마을 구장동이 구장군이 된 건 대단한 발전이구만요."
"1952년 행정개편 때 우리 수령님 교시로 구장군이 넹벤군에서 분리 설치되었디요."
"아, 네."

준기는 계속 언저리 산천을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고향 '구장'에 이르렀다. 고향마을은 새로 지은 구장군 인민위원회청사 외는 옛날이나 거의 다름이 없었다. 동구 밖 미루나무나 논과 밭, 그리고 들판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고향 마을의 집들이 준기가 어렸을 때는 초가지붕이거나 억새지붕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비슷한 모양의 콘크리트나 벽돌로 지어진 문화주택으로 변해 있었다.

초기의 정전회담장이었던 한 한옥 내봉장(來鳳莊)이다. 이 장소는 그해 10월 24일까지 사용되다가 다음날부터 유엔군 측 요구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개성, 1951. 9.).
 초기의 정전회담장이었던 한 한옥 내봉장(來鳳莊)이다. 이 장소는 그해 10월 24일까지 사용되다가 다음날부터 유엔군 측 요구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개성, 1951. 9.).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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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늦었네?

준기가 타고 간 승용차가 고향 집에 들어서자 남동생 철기 부부와 강계에 사는 여동생 옥순 부부, 정주에 사는 막내 여동생 옥매 부부, 그리고 낯모르는 조카들이 마당을 가득 채운 채 반겨 맞았다. 준기 부부는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곧장 철기의 안내로 아버지 묘로 갔다.

아버지 묘는 가까운 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있었다. 준기 부부는 아버지 무덤 앞에 깊이 고개 숙였다.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준기야, 왜 이렇게 늦었네?'
'아바지, 남조선에서 미국으로, 중국으로, 돌아오다 보니 이렇게 늦었구만요.'
'그 먼 길을 애써 찾아줘 고맙다야.' 
'아바지, 이제야 찾아봬 죄송합네다.'
'아니다. 기게 어디 네 탓이네. 아무튼 요기까디 오느라고 수고 많아서.'
'아바지,  메누립네다.'
'아무튼 너들 부부 항께 찾아줘 고맙다야. 부디 해로하라'
'예, 아바지.'

준기 부부가 동생 집으로 돌아오자 자그마한 잔치가 벌어졌다. 준기 피붙이만 열 넷에다 북녘 두 선생까지 모두 열여섯, 그리고 이웃사람까지 찾아와 스무 남은 사람들로 벅적거렸다. 어머니와 제수, 그리고 누이는 마당에 임시로 마련한 큰 밥상에 점심상을 차린다고 바빴다.

"네래 도와(좋아)하는 냉멘를 만들게 햇디."
"잘 하셌어요. 오마니. 내레 기게 가장 먹구 싶었디요."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들(1952. 1. 7.)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들(1952. 1. 7.)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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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동생 내외는 씨암탉도 잡아 백숙을 만들어 내놓았다. 준기가 냉면을 먹자 옛 맛 그대로였다. 준기는 어머니와 제수한테 냉면을 만드는 법, 특히 담백한 육수 만드는 법을 즉석에서 묻고 일일이 밥상 위의 반찬도 카메라에 담았다.

"오마니, 내레 미국에서 밥장사루 돈을 벌구 이시요."
"잘했다. 사람이 몸으로 돈 버는 게 가장 돟디(좋지)."
"미국에서 데일루(제일로) 번화한 뉴욕 맨해튼에서 농문옥이란 밥집을 해요."
"메라구, 농문옥?"
"예, 오마니."
"아주 잘 했다. 네래 우리 고향 농문산(용문산)을 아주 빛내주는구나. 너들 정말 당하고 당하다." 

고향집에서 가족과의 만남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오후 세 시가 되자 북녘 홍 선생은 그늘에 세워둔 승용차의 시동을 걸었다.

"오마니 이제 갈 시간입네다."

준기는 울먹이며 말했다.

"머이? 발쎄 …. 고향집에 와서 하룻밤 자디두 않구 … 오늘 가디 않으믄 안 되가서?"
"……."

준기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준기 어머니가 다가가 아들과 며느리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이 오마니를 두고 또 먼 길을 떠나가야 하네?"

준기 어머니는 이전과는 달리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준기 가족들도 함께 훌쩍였다.

"왜 우린 부모 자식 간에 마음대로 만나디두 못하네? 이게 무슨 사람사는 세상인가!"

준기 어머니의 악을 쓰는 울부짖음과 대성통곡에 철기 내외가 당황하여 달려들어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준기가 어머니 품에 달려들었다. 순희도 함께 시어머니에게 달려들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합네다. 기냥 내버려 두시라요."

북쪽 리 선생은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듯 오히려 담담히 철기 내외에게 말했다.

"들짐승도, 새들도 기러지 않는데 무슨 사람 사는 세상이 이 모냥이네!"

준기 어머니는 다시 크게 울부짖더니 그만 까무러쳤다. 그러자 준기 내외가 얼른 어머니를 안고는 방안에 데려다 눕혔다. 순희는 여행용 가방에서 비상약으로 가지고 온 약을 시어머니에게 먹이고 가슴을 열어젖힌 뒤 인공호흡을 시켰다. 가족들과 북쪽 두 선생은 초조하게 준기어머니를 지켜보았다.

"병원으로 날래 모십시다."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앞 8각13층탑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앞 8각13층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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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선생이 말했다.

"더위와 갑작스런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 잠시 후면 깨어나실 거예요."
"어드러케 잘 아시우?"
"서울 적십자간호학교 출신으로 미국에서 오랫동안 간호사로 지냈디요."

작별

준기가 대신 대답한 뒤 북쪽 선생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오마니가 깨어난 뒤에 가야겠수다. 오늘 저녁 일정은 뭡네까?"
"알가습네다. 우리 당 대외연락부 부위원장 께서 두 분 선생의 고향방문 환영모임이야요. 내레 지금 이곳 사정을 보고하가시오."

리 선생은 철기 집 안방에서 전화를 한 뒤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 모임을 취소했수다. 부위원장께서 오마니를 극진히 모시라구 말씀하시더만요."
"고맙습네다."

최순희는 동서에게 찬 우물물을 길어오게 한 뒤 시어머니의 이마에 연신 물수건을 갈아댔다. 곧 준기 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한 시간 뒤 쯤 준기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깨어났다.

"내레 공연히 너들 발걸음만 무겁게 햇디."
"아니에요, 어머니. 곧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서울 메누리 정성으로 얼른 깨어낫디. 네 손이 약손이다."

준기 어머니는 순희의 손을 잡고 고마워했다.

"오마니, 내레 곧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오가시오."
"알가서야. 너들, 잘 가라. 아무튼 그 먼 길을 둘러 둘러 이 늙은 오마니를 찾아줘 덩말 고맙다."

준기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예, 오마니. 부디 오래 사시라요. 기래야 우린 또 만납네다."
"알가서.
"오마니 때문에 한바탕 울고 나니까 아주 속이 시원하네요."
"네로부터 우리 조선 사람은 기래서야. 그동안 쌓였던 한이 눈물과 함께 쑥 내려간 게디. 나두 아주 시원하다."
"어머니, 부디 건강하세요. 또 찾아뵐게요."

순희가 시어머니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했다.

"기래 알아서. 너들도 객디에서 부디 건강하라."
"네, 어머니."

북쪽 홍 선생은 그동안 그늘에 세워둔 승용차의 시동을 다시 걸었다.

"오루바니 내외분, 안녕히 잘 가시라요."
"옥순이, 옥매 누이, 잘 이시라."

두 누이는 혀를 깨문 채 손을 흔들었다.

"우리 가족은 이제 통일이 되었어야. 기렇디 않네?"

준기의 그 말에 마당을 가득 메운 가족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소녀가 유엔군에게 선물을 받아가고 있다(1951. 2. 15.)
 두 소녀가 유엔군에게 선물을 받아가고 있다(1951. 2. 15.)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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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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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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