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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모름지기 작가는 평생을 두고 꼭 쓰고 싶은 작품이 있다. 나의 이번 <어떤 약속>이 그런 작품이다. 분단된 나라의 작가는 마땅히 통일문제가 으뜸 화두이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예상 밑그림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과 북에서 두 젊은 남녀가 인민의용군으로 입대한다. 이들은 낙동강 다부동 전쟁터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룬 뒤 마침내 부모를 찾아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로 그릴 셈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분단으로 가족간 이산의 아픔과 구시대의 낡은 이데올르기로 한겨레가 화합치 못하고 갈기갈기 찢어진 채 반목과 질시, 갈등 속에 살고 있다. 이는 국내뿐 아니라 내가 둘러본 해외 동포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작품 속에서 우선 한 가정의 '작은 통일'을 그려보고자 한다. 작은 시내가 모여 강이 되고, 여러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한 가정의 작은 통일이 마침내 큰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2005년 7월 20일부터 25일까지 평양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가 열렸다. 그때 나는 남녘 작가의 일원으로 동참했다. 이 대회에 남북 및 해외작가들이 모여  '6·15 통일문학상'을 제정한 바 있었다. 그 뒤 이런저런 국내외 사정으로 이 대회의 이 결정 사항은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었지만, 나는 그 언젠가는 이 '통일문학상'이 꼭 실행되리라 믿는다.

나의 이번 신작 <어떤 약속>은 애초부터 '제1회 6·15 통일문학상'을 염두에 두고 쓰는 분단 극복 전작 장편소설로, 그 시행과 응모에 앞서 남녘 북녘 및 해외 동포에게 오마이뉴스 화면을 빌려 먼저 그 선을 보인다. 나의 보잘것없는 이 작품이 남북통일 제단에 한 줄기 향연(香煙)이 된다면, 나는 이 땅의 한 작가로 더 이상 무슨 바람이 있겠는가.

국내외 독자 여러분의 사랑과 격려, 그리고 성원은 나의 붓에 신명을 불어넣는 추임새가 될 것이다. 나는 목욕재계한 뒤 이 연재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별에게 두 손 모아 빌면서<어떤 약속>그 막을 올린다. - 박도 올림

2011년 10월 초순,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인 낙동강 다부동전적지 답사 때 조지훈의 시비 곁에 선 필자(조지훈 선생은 대학 강의시간에 이 시를 낭송해 주셨는데 그때 받은 감동이 늦깎이 제자의 영감을 불러일으켜 소설창작에 한 실오리 역할을 하고 있다).
▲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시비 2011년 10월 초순,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인 낙동강 다부동전적지 답사 때 조지훈의 시비 곁에 선 필자(조지훈 선생은 대학 강의시간에 이 시를 낭송해 주셨는데 그때 받은 감동이 늦깎이 제자의 영감을 불러일으켜 소설창작에 한 실오리 역할을 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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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프롤로그

1

"부디 몸 성히 돌아오라."

준기 아버지 김만돌은 어린 아들의 의용군 입대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딱 한 마디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 강말순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머이! 네 어깨에 총이나 멜 수 있갓네?"
"기럼요. 오마니, 내레 조국해방전쟁에 나가서 꼭 영웅 훈장을 따 오가시오."
"야, 네 어깨에 총을 메믄 땅에 닿가서. 기만 두더 앉을 수 없네?"
"오마니, 사나이가 입대하기로 약속한 이상 기럴 순 없습네다."
"기렇다믄 이 오마니는 네레 훈장을 따오기보다 기더 무사히 돌아오기만 빌가서."
"오마니, 아무 걱정 마시라요. 내레 어떤 고난에서두 꼭 살아서 돌아오갓시오."
"기럼, 기래야 당한(장한) 내 아들이디. 우리 아들 둔기 만세다!"

2

낙동강 건너편 다부동 뒷산 유학산 쪽에서 계속 포성이 울렸다. 준기와 순희는 지축을 흔 듯한 그 포성에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방바닥에 엎드렸다. 한참 뒤 그 포성이 멎자 두 사람은 고개를 들고 소곤거렸다. 그들은 지난 밤에 낙동강을 건넌 뒤 구미 형곡동 남의 집 행랑채에 숨어들어 방바닥을 깔았던 돗자리로 문을 가린 채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만일 우리가 서울로 가는 도중에 국방군이나 인민군에게 붙들려 어쩔 수 없이 서로 헤어지게 된다면, …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 다시 만날 약속을 미리 정해둬요."
"어드러케(어떻게)?"

"잠시 전 내가 엎드려 한참동안 생각한 건데, 이 전쟁이 끝난 다음 8월 15일 낮 12시 정각에 서울 덕수궁 정문 대한문 앞에서 준기 동생을 기다리겠어요."
"순희 누이, 우리가 거기서 다시 만나자는 말이야요?"

순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거 참 괜찮은 생각이야요. 8월 15일 낮 12시 정각에 만나자는 말은, 그날이 조국해방기념일로 날짜두 시간두 기억하기도 돟구(좋고). … 기런데, 내레 서울 덕수궁 대한문은 가 본 적이 없는데."

"덕수궁은 서울 한복판 시청 앞에 있어요. 남대문과도 아주 가까워요."
"기래요. 기렇다면, 아, 서울 남대문 앞 김 서방 집두 찾는다는데, 덕수궁 대한문이야 식은 죽 먹기터럼 쉽게 찾을 수 있갓수."

"그럼요. 대한문은 서울역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아요."
"알가시오. 아무튼 이 전쟁이 끝난 뒤 8월 15일 해방기념일 날 정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납세다. 내레 기때두 남북이 38선으로 가로 맥헸으면(막혔으면) 우리 고향 텅턴(청천)강 매생이(쪽배)를 타구서라두 남녘으로 내려와 그날 대한문 앞에 꼭 나타나가시오."

"정말?"
"기럼, 사나이 약속입네다."

"고마워요. 그럼, 우리 이 자리에서 서로 굳게 약속해요."
"알갓시오."

그들은 왼손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강 건너 다부동 뒷산 유학산에서는 잠시 전 포성에 이어 미군 B-29 폭격기들의 비행소리와 함께 염소 똥처럼 내리 쏟아지는 폭탄의 폭발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두 사람은 그 비행소리와 폭음에 질려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다시 눈을 감고 방바닥에 엎드렸다.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 관리청(NARA) 전경.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 관리청(NARA) 전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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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은 워싱턴디시 내셔널 몰에도 있었고, 워싱턴디시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깊은 숲속에도 있었다. 워싱턴디시의 고색창연한 국립문서기록관리청 곧 내셔널아카이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Archive)에는 미국 독립선언서, 헌법, 인권에 관한 문서 등 주로 미국의 오랜 귀중한 역사문서들이 소장돼 있었고,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최신식 6층 건물인 내셔널아카이브에는 세계 각국 근현대사의 각종 비밀문서와 자료들이 매우 다양하고 엄청나게 갈무리돼 있었다. 내가 찾고자 하는 한국전쟁 관련 사진자료는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내셔널아카이브에 갈무리되어 있었다.

2007년 2월 하순, 내가 3차 미국을 방문하여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내셔널아카이브(NARA)에 출근한 지 사흘째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이른 아침 고동우의 승용차를 타고 아카이브로 출근했다. 우리가 아카이브 5층 사진자료실에 막 들어가자 아키비스트(Archivist, 문서관리관)  미스 브라운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경쾌한 목소리로 아침인사를 했다.

"Good morning Mr. Go and Park."
"Good morning Miss Brown."
"Good morning."

우리도 답례를 하고는 지정석에 앉자 그가 전날 신청해둔 문서상자를 담은 카트를 밀고 온 뒤 건넸다.

"Good Luck!"
"Thank You."

고동우가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카트를 인계받았다. 아키비스트 브라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자기 자리로 갔다.

사진 한 장

고동우는 나의 1,2차 아카이브 검색작업 때도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곧장 아카이브에서 나눠준 흰 면장갑을 낀 뒤 매우 숙달된 솜씨로 아카이브 문서상자의 사진을 꺼내 추슬렀다.

그와 나는 지난날 서울의 한 고교에서 영어교사와 국어교사로 10여 년을 함께 근무한 동료였다. 그는 나보다 4년 연상으로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 간 뒤 이즈음은 메릴랜드 주 락 빌에서 꽃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상자 속의 사진을 꺼내 추스르다 문득 그 가운데 한 장을 꺼내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박 선생, 이 사진 좀 봐요."
"네, 고 선생님."

한 어린 인민군 포로가 포로신문관 앞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1950. 8. 18.).
 한 어린 인민군 포로가 포로신문관 앞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1950. 8. 18.).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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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트북과 스캐너에 전원을 연결하는 걸 멈춘 채 그가 건네준 사진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사진 속의 인민군 포로가 무척 어린데 적이 놀랐다. 나는 그동안 '소년 인민군'이라는 말은 여러 번 들어보았지만 이렇게까지 어릴 줄은 몰랐다. 고 선생도 사진 속의 인민군이 무척이나 어린데 놀라 유독 이 사진을 먼저 뽑아 나에게 건넨 듯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은 15,6세 정도로, 미군 포로 신문관 앞에서 잔뜩 겁을 먹은 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마치 교단 첫 해 중1 신입생을 담임했을 때 학생처럼 무척 어리게 보였다. 그때 중1 교무실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수업시간에 장난치다가 선생님에게 걸린 개구쟁이들이 불려와 주의를 받곤 했다.

나는 다시 사진 속 어린 인민군 포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폈다. 그러자 어린 인민군 사진 위에 개구쟁이 옛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르다가 불현 듯이 김준기 아저씨가 겹쳐졌다. 그 아저씨도 인민군 포로 출신으로, 내 어린 시절 큰고모네 집 앞 구미가축병원 수의사 조수였다. 그는 마음이 무척 좋았는데 유독 우리 악동들이 씨돼지 교미하는 장면만은 못 보게 했다. 그럴 때면 우리 악동들은 그 아저씨에게 "인민군" 또는 "괴뢰군"이라고 소리치며 도망치곤 했다. 그는 그 말을 가장 싫어했다. 아카이브 사진자료실에서 찾은 한 장의 사진은 나를 50년 전 동심의 세계로 빠트렸다.

유년의 기억들

내가 여섯 살 때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3년 남짓 지루하게 끌다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53년 7월 27일에야 정전협정으로 일단 전선에서 총성이 멈췄다. 그 무렵 내 고향 낙동강 인접 구미 일대는 전쟁의 광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탓으로 전란의 상흔들이 마을 곳곳에 마마자국처럼 덕지덕지 남아 있었다.

전쟁이 멈추자 마을에는 피난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이도, 팔다리가 잘린 장애인도 숱하게 많았다. 전란에 부서진 관공서나 학교와 같은 큰 건물은 그대로 방치돼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우선 사는 집만은 임시변통으로 수리하고 살았다. 또 마을에는 전쟁이 끝나도 자기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외지 피난민들이 방천 밑 빈터에다 움집을 짓고 살았다. 그들 대부분은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었다.

그 무렵 산이나 들, 그리고 마을에는 총알껍질인 탄피가 지천으로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 우리 악동들은 그 탄피를 고물장사에게 팔 줄도 몰랐고, 또 고물장사들도 애써 그것을 사지도 않았던 참 어수룩한 시절이었다. 심지어 우리 악동들은 마을 밖 들판에 인민군들이 몰고 와 미군 폭격기의 폭탄 세례를 받아 된통 부서진 소련제 T-34 탱크 부근에는 전쟁이 끝난 지 두어 해가 지나도록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 마을사람들은 그 탱크에 대한 무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어수룩한 시절이다 보니 지천으로 널브러진 탄피는 마땅한 놀이 감이 없었던 악동들에게 아주 좋은 장난감이었다.

한국전쟁 무렵의 시골 아이들(1951. 2. 6.)
 한국전쟁 무렵의 시골 아이들(1951. 2. 6.)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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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금오산이 정면으로 빤히 바라보이는 구미면 원평동 장터마을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이웃에는 또래 사내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거의 날마다 곧장 우리 집에서 오백 미터 정도 떨어진 방천 밑 큰 고모네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사촌 형제뿐만 아니라 또래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동네 빈터에서 주로 탄피 따먹기나 자치기 놀이를 했다. 우리 악동들이 한창 그런 놀이에 빠졌을 때 이따금 암퇘지가 '꽥 꽥' 멱따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야! 돼지 빠꾸리하는 갑다."

한 악동이 소리치고 가축병원으로 달려가면 나머지 녀석들도 잽싸게 따라갔다. 악동들이 헐레벌떡 가축병원 돼지우리에 이르면 종돈(種豚, 씨돼지) 바크서가 접붙이고자 찾아온 암퇘지를 구석으로 몬 뒤 한창 어르고 있었다. 씨돼지가 능란한 솜씨로 암퇘지를 어르면 곧 암퇘지의 멱따는 소리가 슬그머니 잦아졌다. 그러면 씨돼지 바크서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암퇘지를 올라타고는 꼬불꼬불한 낭심(수컷 생식기)을 꺼내 암퇘지 밑구멍에 잽싸게 집어넣었다. 그 장면은 마치 할디비(나선형 목공기구)로 널빤지를 뚫는 것과 비슷했다. 우리 악동들은 돼지우리 말뚝에 올망졸망 턱을 괴고는 침을 흘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았다.

"저 바크서 좆 봐라."
"꼬불꼬불 나사처럼 아주 고약하게 생겼다."
"꼭 할디비 같다."
"저래 생겨야 밑구멍에 잘 들어갈 끼다."

곧 씨돼지 바크서는 꼬불꼬불한 낭심을 암퇘지 밑구멍에 다 집어넣고는 입을 헤벌레 벌린 채 씩씩거렸다. 그럴 때면 암퇘지는 다시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저 암퇘지 진짜로 아파서 소릴 지를까, 좋아서 지를까?"
"지(저)보다 몸집이 억시기(억세게) 큰 놈이 마구잡이로 올라타니까 지 힘에 버거워 지르는 소릴 끼다."
"꼬불꼬불한 할디비같은 좆으로 지 밑구멍을 막 후비며 들어오니까 지 밑구멍이 찢어지듯이 디기(몹시) 아파 지르는 소릴 끼다."
"아이다(아니다). 지도 인자(이제) 시집간다고, 양놈 바크서 좆맛이 좋아서 지르는 소리다."

악동들은 죄다 입방아를 찧으며 키득거렸다. 그럴 때면 돼지우리 안에서 접붙이는 일을 돌보던 준기 아저씨는 종돈 바크서 다루던 버드나무 회초리로 아이들을 쫓았다.

"야! 시끄러워. 너덜(너희들)은 보는 게 아냐. 저리 가디(가지)들 못해!"

악동들은 그 말에도 못 들은 척 계속 히죽거리며 계속 입방아를 찧었다.

"그 씨돼지 팔자 한번 좋네. 접붙일 때마다 색시가 바뀐다 아이가."
"저 팔자가 뭐가 좋노. 두고 봐라 지(제) 명대로 몬(못) 살 끼다."

돼지우리 한 모서리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곰배라는 여자아이가 눈을 흘긴 뒤 입을 삐쭉이며 한 마디를 했다. 그 말에 한 악동이 대꾸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저 가시나는 암퇘지를 편든다."

그 말에 돼지우리를 둘러싼 악동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러자 곰배는 눈을 더욱 크게 흘기고 입을 잇달아 삐쭉거리며 돼지우리를 떠났다.

"야, 저리 가디(가지)들 못해!"

그 말에도 악동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가리 피도 마르디 않은 쪼쿠만 아새끼들이 발랑 까뎌(까져) 못하는 말이 없어 야!"

준기 아저씨는 더 이상 참다못해 회초리로 돼지우리 말뚝에 턱을 괸 악동들의 머리나 어깨를 후리쳤다. 그제야 악동들이 회초리를 피하며 후다닥 자리를 떴다. 그 바람에 씨돼지도 놀라 암퇘지 등에서 후딱 내려왔다. 그러자 씨돼지 낭심에서는 허연 뜨물 같은 게 뚝 뚝 떨어졌다.

"아새끼들 등쌀에 돼지가 놀라 덥(접)이 제대로 붙여딘디 모르가서(모르겠어)."

준기 아저씨는 분을 참지 못하고 눈알을 부라린 채 돼지우리 안에서 회초리를 휘두르면서 바크서처럼 씩씩거렸다.

"인민군!"
"괴뢰군!"

악동들은 준기 아저씨를 향해 소리치며 도망갔다. 그들은 신기한 구경꺼리를 다 보지 못하고 쫓겨난 아쉬움과 회초리에 맞은 분풀이로 뱉는 말이었다. 준기 아저씨는 그 말에 약이 바짝 올랐다.

"쌍노무 아새끼들!"

준기 아저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고래고래 소리치며 돼지우리 밖으로 뛰쳐나와 바크서처럼 식식거리며 회초리를 들고 악동들의 뒤를 쫓았다. 

"쌍노무 후레아새끼들! 야, 니들 게 섯디 못해!"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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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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