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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에 입소한 인민군 포로가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부산, 1950. 12. 1.)
 포로수용소에 입소한 인민군 포로가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부산, 1950. 12. 1.)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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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

김준기와 윤성오는 진부에서 원주의 한 군부대에 마련된 임시 포로수집소로 이송된 뒤 거기서 사흘을 보냈다. 그곳은 강원도와 경기도 동부 일대에서 후퇴 길에 붙잡힌 포로들의 임시수용소였다. 준기가 체포된 전후 닷새 동안 그 일대에서 붙잡힌 인민군 포로가 일백 명이 넘었다.

1950년 10월 25일 원주 임시포로수집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흙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대구로 간 다음, 각 포로수집소에서 온 포로 오백여명이 헌병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한밤중 대구역에서 열차를 탔다.

부산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의무대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1950. 8. 25.)
 부산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의무대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1950. 8. 25.)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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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에 이들은 부산 거제리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도착했다. 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도착하자마자 입고 온 인민군복이나 사제 옷을 모두 벗기고 낡은 미제 군복을 나눠줬다. 그리고 수용소 기간병들은 포로들에게 나눠준 옷을 입게 한 뒤 등이나 바짓가랑이에다가 검은 색, 또는 흰 페인트를 묻힌 붓으로 'PW'라는 영문 글자를 썼다.

그런 뒤 수용소 기간병들은 포로들의 머리를 바리캉으로 박박 밀었다. 이빨 빠진 낡은 바리캉인데다가 기간병들이 성의 없이 마구 미는 바람에 포로들은 눈물을 질금질금 쏟았다. 포로수용소 측에서는 준기와 윤성오 상등병이 한 부대 소속임을 알고는 즉시 다른 막사로 분류 배치하여 떨어뜨렸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 서로 안고 작별인사를 했다.

"김 동무, 꼭 살아돌아가라야."
"알가시오. 윤 동무도 꼭 살아돌아가시라우."
"아마두 우리가 이 수용소 내에서 마음대로 만나기는 힘들거야."
"길쎄요. 아무튼 조심하시라우."

포로들이 세면을 하고 있다(부산, 1950. 9.)
 포로들이 세면을 하고 있다(부산, 1950. 9.)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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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NK112467'

부산포로수용소는 허허벌판이었다. 거기다가 철조망을 치고는 천막으로 임시 막사를 만들어 포로들을 수용했다. 처음 포로수용소 측은 한 천막 막사에 포로 스물네 명씩을 수용했다.

그런 뒤 포로신문관이 포로 한 사람씩 불러내어 인적사항을 물어 기록하며 포로 번호를 부여한 뒤 일일이 사진을 찍었다. 김준기의 포로 번호는 '50NK112467'이었다. 그 시간 이후는 김준기는 이름보다 '50NK112467' 곧 '112467'번으로 통하는, 새로운 세계와 질서 속에 살았다.

부산포로수용소에는 날마다 입소하는 포로가 부쩍부쩍 늘어났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져 다부동전선에서는 인민군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까지도 투항했다. 195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중순 사이에는 하루에 2만여명의 인민군 포로가 입소하기도 했다.

그러자 스물네 명 수용하던 천막 막사에 마흔 명 이상으로 늘어나 포로들은 누울 자리조차도 비좁았다. 그때부터 동료 포로들 간에 한때 전우였다는 연민의 정은커녕 서로 증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산포로수용소는 날이 갈수록 수용인원 초과로 모든 물자가 점차 부족했다. 매끼 일명 '훌라라'라는 질이 나쁜 안남미 밥이 나왔는데 '후' 불면 날아갈 정도로 찰기가 없었다. 그런 밥조차도 끼니마다 식판에 서너 숟갈을 담아주는데, 한 사람이 3~4인 분은 먹어야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포로들은 늘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안에는 포로들 간 밥그릇 싸움이 점차 치열하게 벌어졌다.

사라진 전우애

초기 부산포로수용소 포로들은 눈에 오직 먹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밥을 조금 더 얻어먹고자 동료의 전과를 고자질하거나 군사기밀을 유출하는 밀고자도 속출했다. 포로수용소에는 밥뿐 아니라 물조차도 귀하여 포로들은 밥그릇 씻은 물로 세수까지 했다. 포로들은 영양실조에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상처를 제때 치료 받지 못한 탓으로 하루에도 이삼십 명씩 죽어나갔다.

처음에는 포로수용소 내에서 동료가 죽어나가자 같은 포로로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하지만 겨울로 접어들어 날씨가 추워지자 포로들은 죽은 동료의 옷을 몰래 벗겨 껴입을 정도로 동료의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포로수용소 내 포로들은 그저 하루하루 '죽느냐, 살아남느냐'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포로수용소 초기에는 그 어느 누구도 수용소 측에 동료들이 '왜 죽었는가?' '왜 죽어나가는가?'라고 항의할 줄도 몰랐다. 그때 포로들에게 수용소 생활은 죽음의 행진과 같은 나날이었다.

동료들이 시신을 매장하고자 수용소 밖으로 운구하고 있다(1952. 6. 6.)
▲ 한 포로의 장례행렬 동료들이 시신을 매장하고자 수용소 밖으로 운구하고 있다(1952. 6. 6.)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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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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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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