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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총구 앞에 짐승처럼 기고 있는 어느 인민군 포로(1951. 9. 20.).
 유엔군의 총구 앞에 짐승처럼 기고 있는 어느 인민군 포로(1951. 9. 2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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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쭉술

용문옥 특실은 오래된 한옥 안방에 들어온 듯, 실내 장식도 한국의 야생 열매인 붉은 망개나 꽈리, 그리고 억새 같은 것으로 꾸며져 있었다. 특실 가운데는 교자상이 놓여 있었다.

"두 분 식성을 잘 몰라 우리 집 주 메뉴인 냉멘(냉면)과 불고기, 그리고 특벨히(특별히) 백두산 들쭉술로 준비했습네다."
"좋습니다. 그런데 웬 백두산 들쭉술을?"
"여기선 북녘 특산물이나 멩품도 다 구할 수 이시오(있어요)."

식사가 시작되자 구운 불고기와 여러 가지 전이 조금씩 계속 밥상에 올라왔다. 그런데 용문옥 냉면 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유난히 깨끔한 냉면으로 한 젓가락을 입안에 넣자 면발이 졸깃하면서도 입안이 상큼했다.

"육수 맛이 시원하면서도 아주 구수합니다."
"기게 우리 집 냉멘 맛의 특색이야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옵니까?"
"기건 우리 집만의 영업 비밀이야요. 하디만 조금 알쾌 드리믄 냉멘은 육수 맛이디요. 우리 집 육수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같은 비율로 넣어 만듭네다. 내레 어렸을 때 우리 오마니가 만들어주신 그 냉멘 맛을 그대로 살레보았디요(살려보았지요)."
"재미동포 가운데 용문옥 냉면을 한번 먹어본 사람은 이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지요."

고동우가 냉면을 맛있게 들며 단골이 된 까닭을 말했다.

"모든 음식이 한국에서 먹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나도 소감을 한 마디 했다.

"기게 우리 집 특색이디요. 간장, 된장, 고추장과 각종 양넘(양념)은 한국에서 바로 공수 해다 쓰디요. 북녘산은 주로 중국을 통해 수입하고요. 같은 고춧가루라 하더라도 한국산이냐, 중국산이냐에 따라 거 맛이 조금씩 다르디요. 우리 집 단골손님들은 아주 그 맛을 족집게처럼 알더만요."

성공의 비결

"용문옥 성공의 비결이 거기에 있었군요."
"기렇디요. 음식은 좋은 재료와 손맛, 그리고 나머디는 만드는 이의 정성이야요."
"아, 네."
"박 선생은 한국전쟁 사진을 찾을라구 미국에 오셋다디요(오셨다지요)?"
"네, 그렀습니다. 한국전쟁 사진은 한국보다 정작 미국에 더 많아요."
"기건 기럴 거야요. 기때 한국에는 신문사도 멫 곳 되디 않았고, 카메라도 아주 귀해 일반 사람은 감히 가질 엄두도 낼 수 없었디요."
"엊그제 아카이브 조사실에서 어린 인민군 사진을 보자 불쑥 준기 아저씨가 생각이 나더군요."

"날 생각해줘 고마워요."
"아저씨, 구미에서 고생 많이 하셨지요?"
"기때는 너나없이 다덜 고생 많았디."
"가축병원 가죽공장의 약품 냄새가 참 고약했지요."
"기럼, 디금도 기때 생각이 떠오르면 구역질이 나디."
"죄송해요. 음식을 앞에 두고…."
"일없어요. 기게 내 디난(지난) 인생인데."

점심식사가 끝나자 종업원이 차를 준비하고자 교자상을 비웠다. 나는 빈 교자상 위에다 노트북을 펼쳤다.

"그동안 제가 아카이브에서 수집하여 여기다 저장해둔 한국전쟁 사진을 아저씨한테 보여 드리고자 오늘 일부러 가지고 왔습니다."

포로수용소 기간병이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부산, 1951. 1. 22.).
 포로수용소 기간병이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부산, 1951. 1. 22.).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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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사진들

나는 노트북을 켜고 바탕화면에서 한국전쟁 파일을 찾아 슬라이드 쇼를 클릭했다. 그러자 그동안 수집하여 저장한 사진들이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야, 이런 사진이 다 있다니…. 아주 기가 맥히고 한펜(한편) 무섭구만. 덩말 이 세상에서 거딧말하군 못살겠어야."

준기는 노트북 화면을 줄곧 뚫어지게 살폈다.

"맞아, 맞아. 기랬디, 기래서."

준기는 화면의 사진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눈을 감기도 했다.

"이 사진을 보니까 기때 일들이 바로 어제 같구먼. 유엔군 포로감시병들이 포로들에게 디디티 뿌리는 것 좀 봐, 기래서. 기때 포로들은 니(이)가 엄청 많았디. 겨울에는 날마다 낮시간은 니 잡는 게 일과였다니까. 내복을 벗어 난로 위에 털면 '찌찌직' 니들이 타는 고약한 비린내가 진동할 정도였으니끼니. 오죽하면 포로들은 디디티주머니를 만들어 사타구니와 겨드랑에 차고 다녔을까. 요기 사진들을 보니까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구만."
"이 사진은 '1951년 9월 21일에 찍은 사진으로, 수풀에서 기어 나와 투항하는 인민군 병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데래서(저랬어). 총 앞에서는 데렇게(저렇게) 짐승처럼 기어 나올 수밖에 없었디. 기래서 기때 포로는 사람이 아니었디."  

그 사진으로 김준기의 포로수용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시냇물처럼 이어졌다.

포로들이 식사를 하고자 집합하고 있다(1950. 10. 19.).
 포로들이 식사를 하고자 집합하고 있다(1950. 10. 19.).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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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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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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