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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있으면, 그의 곁에는 항상 보좌관이 있다. 의원의 의정활동 상당 부분에 보좌진의 손길이 미쳐야만 한다. 그러나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가슴팍에 배지를 단 의원뿐이다. 그렇다면, 늘 그림자처럼 뒤를 지키는 보좌진들의 생활은 어떨까. 밤을 새워 일해 국회의원을 빛나게 하지만, 평생 '4년짜리 비정규직'을 벗어날 수 없는 보좌진들의 정치 역정 스토리를 들어보자. [편집자말]
17대 국회부터 19대까지 복지 이슈에 집중했던 박선민 보좌관은 일명 '도가니법'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한 숨은 주역이다.
 17대 국회부터 19대까지 복지 이슈에 집중했던 박선민 보좌관은 일명 '도가니법'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한 숨은 주역이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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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 최장수 보좌관.'

40세를 갓 넘긴 박선민 보좌관(42, 박원석 진보정의당 의원실)에게 따라 붙는 이름표다. 그는 진보정당에서 17, 18, 19대 국회를 쉬지 않고 이어온 유일한 보좌관이다.

박 보좌관은 2004년, 혜성같이 등장했던 10명의 민주노동당 의원과 함께 보좌관으로서 국회에 첫발을 디뎠다. 직전까지 꼬박 8년간 농사를 짓던 농사꾼의 국회 진출이었다.

그로부터 또, 꼬박 8년. 그는 보건복지위 소속인 현애자 의원(17대), 곽정숙 의원(18대)과 함께 복지 이슈에 집중했다. 그 기간 내내 끊임없이 메달렸던 일명 '도가니법'은 18대 국회 말 전격적으로 통과됐다. 정책보좌관으로서 그에게 잊지 못할 순간을 안겨준 사건이다.

진보정당의 국회 진출 후 만 9년, 두 번의 분당이 있었고 박 보좌관은 고스란히 각종 '사태'를 경험해야 했다. 2012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이후, 진보정당이 위기라는 진단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 됐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박 보좌관은 "이제 정치가 필요한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농사꾼에서 정책보좌관으로, 또 다시 '정치가'로 변모하고 있는 박 보좌관을 16일 만났다.

[대학생에서 농사꾼으로] '위장 취업' 대신 귀농..."한국 사회 바닥을 맛보다"

"어머, 농사 잘 짓게 생겼네."

박 보좌관이 대학교 1학년생이던 20여 년 전, 지금 남편을 남자 친구로 선택한 이유다. 그만큼, 그의 인생에 '농사'는 핵심 키워드였다. 서울 깍쟁이로 십 년 남짓을 살던 여중생은 아버지를 따라 시골로 내려가 2년간 흙냄새를 맡고 시골 풍경에 젖어들며 진로를 결정하게 됐다.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며 농촌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이 싹튼 것. 대학 전공도 농업교육과를 택했다. 사계절 내내 농활을 쫓아다니다 보니 졸업이 목전에 다가왔다. 그의 결정은 귀농이었다. 농민 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서다.

남들은 기름때 묻은 장갑을 끼고 공장으로 위장취업을 할 때 그는 '몸빼(일바지)'를 입는 농사를 택했다.

"공장에는 '내가 누군지'를 속이고 들어가야 하는데, 난 얼굴에 표시가 다 나서 들어간 지 3일 만에 뭐 하러 온 건지 들킬 거 같은 거야. '에이, 난 거짓말 못해, 공장은 아냐' 한 거지."

1996년부터 전북 김제로 내려가 농촌생활을 시작했다. 농사와 함께 전력을 기울인 여성농민회 조직 운동은 "언니(여성 농민)들이 자기 인생을 찾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농사짓고 살림하고, 기껏해야 계모임을 하던 여성 농민들이 '이 사회에서 왜 농민이 살기 어려운지'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언니들은 하나둘씩 소식지에 글도 쓰고 농민회 간부도 맡았다. 농산물 수입개방과 한·칠레 FTA 반대 농민 집회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집회도 잔치처럼 즐겼다. 당시만 해도 면 단위까지 모임이 조직되며 농민 운동이 활발히 진행됐다.

반면, 농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오이·꽈리고추·감자·상추 등 온갖 작물을 재배했는데도 배를 곯았다. "시골에 내려가서 치킨집만 해도 먹고살 거"라던 패기는 오간데 없었다. 빚으로 시작한 하우스 시설농은 적자에 적자를 거듭했다. 죽자고 일해도 손에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6개월 동안 현금을 한 번도 못 만져본 때도 있었다.

"그때 한국사회의 바닥을 경험했다. 너무너무 가난했다. 첫 애 분유가 떨어졌을 때가 쌀 떨어질 때보다 더 눈물 나더라. 분유가 떨어질 때 되면 묽게 타서 열흘 먹일 걸 15일씩 먹였다. 쌀농사 짓는 집에서 먹을 게 없어, 말이 돼? 이게 21세기에 일어날 일인가 싶더라."

만날 돈을 빌리던 시절을 꼬박 8년을 보내고서, 그는 김제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농사꾼에서 정책 전문 보좌관으로] '반대하는 자'에서 '답하는 자'로

농촌을 등진 건 그에겐 '우리 당'인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10석이나 획득해, 국회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농민 의원인 현애자 의원이 당선돼, 농민 보좌관이 필요해졌고 자연스레 그가 차출됐다. 8년 농사짓던 걸 뒤로한 채 달음쳐 올라왔다. 단 2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겨울 내내 키우던 새끼 같은 애호박은 수확 직전인 채로 하우스에 버려두고 왔다. "당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걸 한다는 게 행복"이던 때다.

17대 현 의원을 거쳐 18대 곽정숙 의원까지,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과 함께 한 그는 '법'과 '정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장애인뿐 아니라 임산부·노인의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매개로 '교통 약자의 이동 편의 증진법'을 만들었다. 어린아이들의 국가 필수 예방접종을 민간 병·의원에서도 무료로 실시하도록 지원하는 내용의 '전염예방법'을 개정하는 데 나섰다. 

곽 의원과 함께할 때는 사회복지 시설에 공익이사를 파견하는 걸 골자로 하는 '사회복지 사업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팔방으로 뛰었다. 복지 시설에서 일상적 인권침해가 발생함은 물론이고 사람이 죽고 성폭행 당해도, 소영주처럼 운영되는 시설의 기득권이 깨지지 않았다. 토론회와 기자회견만 수차례해도 역부족이었다. 대책위를 구성해 농성을 하고 삼보일배를 해도 이슈화 되지 않았다.

그러다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가 개봉됐고, 순식간에 사회적 공분이 치솟았다. 곧장 관련 단체와 협의해 여야는 물론 정부와도 협력해 합의점을 찾아냈다. 곽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불과 한 달 만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17대 때부터 2대에 거쳐 법안을 제출하며 10년 동안 싸운 성과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회복지사업법'은 곽 의원과 함께 하며 발의한 80여 개의 법안 중 박 보좌관의 마음에 가장 남는 법안이다.

농사꾼이었던 그는 정책보좌관으로 변모해 '법'과 '정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박선민 보좌관은 '반대하는 자'에서 '대안을 말해야 하는 자'로 바뀐 자신의 위치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농사꾼이었던 그는 정책보좌관으로 변모해 '법'과 '정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박선민 보좌관은 '반대하는 자'에서 '대안을 말해야 하는 자'로 바뀐 자신의 위치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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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빼고 다들 가족인 거 같은" 엄마, 박선민
박선민 보좌관은 아이 셋의 엄마이기도 하다. 17살, 14살, 8살..올해 초·중·고에 나란히 입학시켰다. 막내 딸의 초등학교 예비소집일을 몰라 입학 못 시킬 뻔하기도 한 '좌충우돌' 엄마 곁에서 아이들은 저절로 컸다. 혼자 병원도 가고 준비물도 혼자 챙겼다.

"우리 큰 애가 지가 혼자 큰 거에 대해서 마음에 생각하는 것들이 있었나봐.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큰애가 4학년이었는데 둘째 담임이 큰 애가 쉬는 시간마다 1학년 반에 온다는 거야. 10분 동안 창밖에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가는 걸 한 달을 했대. 둘째가 말이 없고 소심해서 학교생활을 제대로 할지, 다른 얘들한테 맞지는 않을지 걱정돼서 한 달을 그랬다는 거야. 나중에 담임선생님한테 들었어. 나 빼고 다들 가족인 거 같아."

챙겨주지 못하는 엄마는 미안한 마음에 더 독립을 강조했다. 초등학생한테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의 성적이 썩 좋지 않은데, 본인 탓인가 싶어 가끔씩 마음이 짠하다.

"옆에서 잘 살펴줬으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기회를 박탈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멋쩍은지 또 한바탕 웃는다. 아이들은 엄마의 직업 '보좌관'을 이해할까? 어느 날 막내 딸이 "엄마는 왜 국회의원 안 해?"라 묻더란다.

"엄마는 직접 정치는 별로 관심 없고, 참모 스타일이야. 엄마가 요리할 때 네가 도와주지? 그런 게 참모야. 엄마 주중에 못 보잖아. 의원 되면 한 달에 한 번 본다? 좋아?"

아이는 금세 도리질 쳤고, 박 보좌관은 "그러니까 보좌관만 하자~"라며 아이를 설득했단다. 그렇게 아이들이 소리 없이 커가고 있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내리 8년은 "작은 법 하나, 정책 하나, 예산 하나가 국민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 끼치는 걸 여실히 느꼈던" 기간이다. 더불어 "비정규직 악법, 언론악법, 한미 FTA 등 상황이 나빠질 걸 뻔히 아는 데도 본회의 통과를 막지 못했던" 좌절을 경험한 시기이기도하다. 

정신없이 지내며 그는 농사꾼에서 정책보좌관으로 차츰차츰 변해갔다. 가장 힘들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반대하는 자'에서 '대안을 말해야 하는 자'로 바뀐 자신의 위치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농민 운동은 국가 정책에 반대만 하면 됐지만, 국회 와서는 해결책에 대한 답변을 줘야 했다. 보편적 복지에 대해서도 반대 진영보다 더 논리를 탄탄하게 만들어야 하는, 그런 게 어렵더라."

그러던 그가 2010년 돌연, 스웨덴을 향했다. 10일 동안 스웨덴을 돌아보며 복지국가의 속살을 보려 한 것. '모두의 평등'이라는 가치와 '사회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둔 나라에서 진보정당의 길을 찾고자 함이었다.

"보건복지 정책 전문가도 아닌데 보복위에서 6년 동안 일하다 보니, 진보의 비전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현실 대응에만 급급해 하고 있더라.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현실화하고 싶은 나라는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본질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갔다 와보니 길을 알겠냐는 질문에 그는 "무상교육·무상보육, 우리가 하면 현실화 할 수 있을 거 같았다"며 "진보정당을 힘 있는 정치세력으로 키워주기만 하면 스웨덴 만들어 주겠다"고 큰소리다.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와, 본인의 바람이 담뿍 담긴 호언장담이다. 10일의 기록을 빼곡히 정리한 그는 복지국가 여행기라는 부제의 책, <스웨덴을 가다>를 뚝딱 만들어내기도 했다.

[정책 전문 보좌관에서 정치가로] "우리는 정치가 아닌 운동을 했다"

정책을 전혀 모르고, 정치는 더더욱 몰랐던 그는 이제 진보정의당 최장수 보좌관이 됐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보좌관으로 있었던 이는 그가 유일했다. 진보당이 가장 잘나갔던 2004년부터 두 번의 분당을 고스란히 겪어냈다. 진보정당의 10년 역사와 함께한 그에게, 물었다. '진보정당의 위기는 왜 닥쳤을까'?

"우리가 몰락하게 된 과정을 보면 외부 조건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스스로가 강해지고 내용을 갖췄어야 했는데 거기에 소홀했다. 일단 정치를 잘 몰랐다. 링컨처럼 정치를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가 아닌 운동을 했다.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옳은 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타협할 줄 몰랐고, 그래서 물러나지 못했다. 조금씩 세상을 바꿔도 됐을 터인데 일거에 바꾸려 했다. 현실의 벽은 높았고 10석의 민주노동당은 생각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만 9년이 지난 지금, 그가 몸담고 있는 진보정의당의 의원은 5명이다. 강동원 의원의 탈당으로 원내 제4당으로 밀렸다. 그는 이제 정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보정당이 힘 있는 세력이 돼야 정치가 바로 선다. 그런데 지금 이 당이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른다. 진보진영의 구심이 돼서 도약할 수 있을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얘기도 하는 거다.

진보정당 1세대가 조직 운동에 기반해서 이뤄졌다면 이제 그 수명은 다했다. 이제 정말로 협의의 정치를 해야 하는 시기인 거 같다. 새로운 리더가 등장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실패한 게 아니라, 성공을 유보한 거라고 생각한다. 내실을 다지기 위한 시간을 가지면서, 지금은 대안을 찾고 공부하면서 앞으로를 준비하는 시기인 것 같다."

결국, 답은 공부다. 요즘 그는 시민정치학교, 정치발전소 소모임, 복지국가와 대안사회 연구모임의 사민주의학교 등을 오가며 민주주의, 정당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이처럼 매순간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만 하고, 만들어 내야 하는 작업을 9년 동안 이어온 그다. '보좌관'은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직업일까?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박 보좌관은 "아무한테나 권하고 싶은 직업은 아닌데, 사회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며 "사회 운동과 정치가 서로 교류하게 되면 진보정당의 힘이 막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좋은 정책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좋은 정치에 대한 고민을 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그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책 쓸 거야. 르포 형태로, 진보정당이 한 의미 있는 일들의 방식을 하나하나 기록해보려고.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걸 남기고 싶어. 안에서 담지 못한 바깥의 목소리를 어떻게 정책화 했는지 기록하려고. 진보정당 10년의 기록. 크하하하."

농촌 운동가에서 정책 보좌관으로 모습을 바꾼 그는 이제는 '정치'를 시행하는 주체인 정치가로서 변모해 가고 있다.

박원석 의원 "진보정당의 길을 함께 가는 동지"

박원석 진보정의당 의원에게 물었다. 박 의원에게 박선민 보좌관은 "같은 길을 가는 동지적 관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박원석 진보정의당 의원에게 물었다. 박 의원에게 박선민 보좌관은 "같은 길을 가는 동지적 관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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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민 보좌관과 어떻게 연이 닿았으며, 왜 같이 일하려고 했나.

"2011년 <진보의 합창> 책 만들 때부터 알았고, 박 보좌관이 내 책 출판 실무를 거의 담당했다. 원고 늦게 준다고 핀잔 주고, 내용 마음에 안 든다고 뭐라 하고. 그런 걸 다 챙겨줬다.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을 받으면서 같이 일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무엇보다 꼼꼼하게 챙길 사람이 필요했고, 보좌관 8년 차로 경험도 많아 함께 일하고 싶었다. 우리 방 보좌관 중 제일 먼저 확정됐다. 박 보좌관이 복지위에서 8년 하다가 나와 함께 하며 기재위 일을 하게 됐는데, 기재위가 워낙 큰 이슈를 다루고 전문성을 요하다 보니 어려움이 있을 거다. 그런 부분은 다른 보좌진들과의 협업으로 커버하고 있다."

- 박 보좌관은 정책, 상임위 쪽 보다는 정치 쪽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정무 분야 반, 정책 분야 반을 맡고 있다. 최근 들어서 내 대외 활동 중 교육과 강연 등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있다. 정책 쪽으로 복지 의제를 여전히 가져가야 하니 관련된 단체와의 네트워크 및 이슈 현안 대응도 함께 한다.

진보정당이 작년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국민들에게 냉정하게 버림받는 상황에서 박 보좌관 개인도 힘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고민도 있을 거다. 의원실 보좌관이니 의원을 통해서 이것저것을 구현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내 정치 행보에 대한 제안이 많다. 나는 1년 차밖에 안 된 초선 의원이라서 상임위 활동에 집중해야 하는 지점이 있어 박 보좌관과 이견이 있을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 방 보좌관들 특징이 한 번 제안해서 안 돼도 며칠 있다가 또 가져오는 것이다.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 교환을 하는 편이다."

- 보좌관의 의원의 관계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좌관의 세계와 의원의 활동이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긴 하지만, 진보정당은 같은 길을 가는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한다. 진보정당이라는 고된 정치운동을 함께 하는 동료로서, 모두가 책임 의식을 갖고 있다. 우리 방 보좌관들도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에 갈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진보정당의 길을 가기 위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이미 단순한 보좌 역량을 넘어선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태그:#나는 보좌관이다, #박선민, #박원석 의원, #진보정의당,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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