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회의원이 있으면, 그의 곁에는 항상 보좌관이 있다. 의원의 의정활동 상당 부분에 보좌진의 손길이 미쳐야만 한다. 그러나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가슴팍에 배지를 단 의원 뿐이다. 그렇다면, 늘 그림자처럼 뒤를 지키는 보좌진들의 생활은 어떨까. 밤을 새워 일해 국회의원을 빛나게 하지만, 평생 4년짜리 비정규직을 벗어날 수 없는 보좌진들의 정치 역정 스토리를 들어보자. [편집자말]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대표였던 이미경 의원과 함께 여연에서 활동했던 신미숙 보좌관은 15대 국회부터 국회에 발을 디뎠다. 그는 이미경 의원의 15대, 16대 의정활동을 보좌하며 직장 내 성희롱 금지를 명문화하고 '출산 휴가 90일' 쟁취도 적극 도왔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대표였던 이미경 의원과 함께 여연에서 활동했던 신미숙 보좌관은 15대 국회부터 국회에 발을 디뎠다. 그는 이미경 의원의 15대, 16대 의정활동을 보좌하며 직장 내 성희롱 금지를 명문화하고 '출산 휴가 90일' 쟁취도 적극 도왔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1997년, 이미경 민주당 의원이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는 내용을 남녀고용평등법 내에 명문화 하려 하자 동료 남자 의원들은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야 할 것 없었다. "본인이 기분 나쁘면 성희롱이라는데,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냐"며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드높은 반발 여론을 잠재우는 것 뿐 아니라 의원들 한 명 한 명을 설득해 내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방법은 '가가호호 방문' 밖에 없었다. 당시 신미숙 보좌관(48)도  이미경 의원과 함께 의원실 전체를 돌았다.

의원들은 이 의원과 신 보좌관을 붙들고는 "요렇게~ 쳐다보면 성추행인가? 이렇~게~ 쳐다보면 뭔데?"라며 부정적 반응을 내놓기 일쑤였지만 굴하지 않았다. 노동부 공무원들이 의원실을 방문하며 '성희롱 금지 규정 반대'를 설파하고 다니면 이 의원과 신 보좌관은 공무원이 방문한 그 의원실에 곧바로 달려가 '왜 성희롱 금지 규정을 명문화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씨알도 안 먹히"는 성희롱 명문화를 위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반까지 회의만 하며 보내던 시절이다. 너무나 첨예했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렇게 꼬박 1년 반을 보냈다.

노력의 결과는, 결국 꽃을 피웠다.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고, 예방교육을 의무화 하며, 성희롱 피의자에게 불이익을 주면 안 된다는 선언적 규정이 국회를 통과했다. 1999년의 일이다.

"아우, 그땐 이런 맛에 보좌관 하는구나 싶었죠. 진짜 기뻤어요. 여성 사안으로 거의 처음으로 (보수성향인) <조선일보> 1면에 법안 통과 기사가 났다니까."

이 의원과 신 보좌관, 여성 NGO들의 적극적 공조가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의원은 극히 적었고, 여성 보좌관은 더욱 적었다. 그랬기에 더욱 치열했고, 절박하게 매달렸다. 신 보좌관은 "막상 제도화 되고 나니 반대하던 사람들도 마치 인권 시대가 온 것 마냥 다 난리였다"며 웃었다. 15대 국회부터 이어진 신 보좌관의 국회 생활에는 늘 '여성'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나를 낳고도 밭을 맸는데"...'여성'에 대한 갇힌 사고와의 한 판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대표였던 이미경 의원과 함께 여연에서 활동했던 신 보좌관은 이 의원의 국회 입성과 함께 국회에 발을 디뎠다.

그는 이미경 의원의 15대, 16대 의정활동을 보좌하며 '출산 휴가 90일'을 쟁취도 적극 도왔다. '성희롱 금지'를 명문화 하려 할 때만큼 국회 분위기는 싸늘했다. 당시 보수적인 의원이 상임위원회에서 "우리 엄마는 나를 낳고 몇 시간 만에 나가 밭을 맸는데 요즘 여자들은 왜 이렇게 노는 날을 많이 달라고 하냐"며 공개발언을 거리낌 없이 할 정도였다. "헐~"스러운 순간들을 맞이해도 대화로 하나씩 문제를 풀어갔고, 결국 출산휴가 90일을 따냈다. 위안부 결의안에 270명의 의원들 서명을 받아내는 작업을 함께한 것도 신 보좌관 기억 한 켠에 깊이 각인 된 기억이다.

여성 관련 정책을 주로 담당했던 신 보좌관이 지역 조직을 맡게 된 것은 16대 국회 말부터다. 민주당과 새천년민주당을 거쳐 2번의 비례대표 의원을 지낸 이미경 의원이 지역구 조직책에 임명되면서부터다. 그때, 새로운 고난이 시작되리라고는 누구도 몰랐다. 또 다시 '여성'으로서의 벽에 직면한 것이다.

"이미경 의원이 서울 은평구 갑 지역 조직책이 된 후 시구의원을 비롯한 당원들이 '어디서 이름도 못 들어본 여자가 조직책으로 오냐'고 버스를 타고 중앙 당사에 와서 데모를 하고 그랬어요. 우린 무서워서 지구당에도 못 가고 근처 카페에 가서 회의하고 그랬죠. 정말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어요."

신고식은 이 의원이 본래 지역위원장의 사무실과 직원을 그대로 인수 받기로 한 후에나 끝이 났다. 그래도 여전히, 나이 지긋한 남성만 있는 지구당은 낯설었다. 이때도 믿을 건 두 발 뿐이었다. 은평구 수색동 산꼭대기를 몇 번씩 오가며 지역을 다졌고, 이 의원은 은평구 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명실상부한 여성 3선 의원의 보좌관으로서, 여유롭게 국회 활동을 할 법도 하건만 신 보좌관은 17대 국회가 시작 되자마자 국회를 떠났다. 그는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국회라는 곳이 만만한 동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꼬박 8년을 일했으니 일단 쉬자는 마음이었다"며 "또 여연에 대한 부채감 및 재야에서 제도권으로 들어온 사람으로서의 처신과 활동에 대한 고민이 많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토로했다.

그렇게 국회와 멀어진 지 6년의 기간 동안 그는 참여정부 행정관과 한국여성재단을 거쳤다. 이후 2010년 이 의원이 다시 러브콜을 보내왔고 그는 이미경 의원실로 복귀했다. 이번에도 맡은 건 조직 관리다. 18대 총선을 준비하는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지역구에 올인했다. 신 보좌관은 "행사를 조직하고 민원 해결하고 선거를 준비하며 정말 즐겁게 선거했다"며 "내가 사는 곳 주변에는 아는 사람이 5명 밖에 아는데 이미경 의원 지역구에는 아는 사람이 정말 많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지역구에서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명함을 받으면 만난 날짜와 만난 이유에 대해 기록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신 보좌관. 지역구를 돌면 이미경 의원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기에, 국회 진출 생각이 있는지를 떠보자 그는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보좌관으로서의 책임감도 컸는데 의원이라는 더 큰 책임을 안고 갈 자신이 없다는 그다.

19대 국회 이후의 행보를 묻자 "앞일을 누가 아냐"며 손을 젓는다. 이렇게 정무와 정책을 바삐 오간 신 보좌관은 '왕보좌관'으로 이미경 의원실을 지키고 있다.

마지막 질문은 '의원과 보좌관의 바람직한 관계'였다.

"법안 하나가 통과되면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죠. 그런데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껴요. 보람 있는 일이죠. 의원과 보좌관은 그런 면에서 심정적 특수관계에요, 함께 일하니까. 특히 이 의원은 '신 보좌관은 그냥 보좌관이 아니라 내가 어떤 행보를 하면 좋을지 마음으로 들여다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세요. 초심 잃지 않으시려는 거고, 나를 동지로 봐주시는 거죠. 이렇게 정치와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사명감이 축적되는 관계가 되면 좋겠어요. 이 의원이 국회를 떠나서도 기억되는 의원이길 바라요. 1.5세대 여성운동을 만드신 분들이 박수 받으면서 은퇴할 때까지 함께 기여하고 싶어요."

"정책과 조직을 함께 하는 멀티 플레이어"
이미경 민주통합당 의원이 바라본 신미숙 보좌관

이미경 의원실의 '왕보좌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미숙 보좌관(맨 왼쪽)은 의원과 보좌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의원은 '신 보좌관은 그냥 보좌관이 아니라 내가 어떤 행보를 하면 좋을지 마음으로 들여다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세요. 초심 잃지 않으시려는 거고, 나를 동지로 봐주시는 거죠"
 이미경 의원실의 '왕보좌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미숙 보좌관(맨 왼쪽)은 의원과 보좌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의원은 '신 보좌관은 그냥 보좌관이 아니라 내가 어떤 행보를 하면 좋을지 마음으로 들여다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세요. 초심 잃지 않으시려는 거고, 나를 동지로 봐주시는 거죠"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 신미숙 보좌관과 15대 국회 부터 함께 했다, 인연이 깊은데. 신미숙 보좌관은 어떤 사람인가.

"보좌관은 첫째 능력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의원과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의원의 관심사항이나 지시사항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이해해서 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 보좌관은 둘 다를 가지고 있다. 굉장히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정책과 조직을 함께 하는 멀티 플레이어다. 15대 때는 나도 초선이었고 본인도 국회 경험이 처음이니 정책 일을 하면서 배우는 과정이 있었다. 비서관으로 처음 들어와서 일을 하다가 16대 부터는 선임 보좌관으로 방 전체의 다른 보좌관들을 끌고 나가는 역할을 했다. 상임위원회 질의 방향과 내용을 주도 하고 전체적으로는 정무적인 부분까지도 같이 다뤄서 보좌진들의 선임 보좌관 역할을 잘 끌어나가고 있다. 정치적으로 의원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도 조언한다."

- 신 보좌관이 18대 중반부터 다시 의원실에서 일을 했다고 들었다. 다시 함께 하자고 말한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 
"국회 방도 작지만 하나의 조직이다. 그 식구들을 화합하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그런 보좌관이 필요했다. 그래서 같이 좀 하자고 사정을 했다. 그래서 국회로 다시 들어오게 됐다. 들어온 후 지역일을 맡겼다. 19대 총선 치를 때까지 지역에 붙어서 지역 일을 하고 당선 된 후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 보좌관과 의원의 관계, 어떻게 이뤄져야 바람직하다고 보나.
"의원과 보좌관의 관계를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같은 가치관을 공유한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민생 문제, 인권 문제, 남북 평화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어떤 생각으로 가려고 하는지 신 보좌관이 잘 알고 있으니 내가 길게 설명 안해도 같이 갈 수 있다. 이런 관계가 바람직하다.

하루살이 비정규직처럼, 의원이 싫다고 하면 당장 나가야 하는 상태가 보좌진이 아니냐는 생각들도 있을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뽑을 때도 그런 점을 고려해서 뽑는다. 열성적으로 보좌관이 일한 만큼 보람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



태그:#이미경, #신미숙, #보좌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