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도 약 1분 정도의 시간, 스크린은 시커먼 어둠으로 뒤덮여있다. 긴 정적을 깨트리는 한 남자의 기침소리. 바로 이라크에서 트럭운전수로 일하는 주인공 폴 콘로이(라이언 레이놀즈)다. 깨어나고 머지 않아 그와 관객은 알게 된다. 그 남자, 폴 콘로이는 제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관 속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벌어진 나무 틈 사이로 흙이 쏟아져 들어온다. 매장된 관의 뚜껑은 육중한 무게를 드러내며 꼼짝도 하지 않는다. 소지품인 지포라이터를 발견해 묶인 손과 입의 재갈을 풀고나니 황당함과 막막함이 밀려온다. 그 때 울리는 전화 한 통.

자신의 전화기가 아닌 스마트폰 하나를 발견한 폴은 첫 전화를 받지 못한다. 누구로부터 걸려온 것인지 상상도 못한다. 그저 자신이 숨쉬기 힘든 좁은 공간 안에 갇힌 채로, 배터리가 절반 가량 남은 전화기 하나와 지포 라이터에 의지하여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현실만 간신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90분 내내 관을 벗어나지 않는 카메라, 관객도 함께 갇힌다

 영화 <베리드>의 한 장면. 땅 속의 관 에 갇힌 폴에겐 '스마트폰' 하나가 유일한 외부와의 소통 수단이다.

영화 <베리드>의 한 장면. 땅 속의 관 에 갇힌 폴에겐 '스마트폰' 하나가 유일한 외부와의 소통 수단이다. ⓒ 크리스리픽쳐스인터내셔널


앞서 말한 부분이 영화의 초반부이다. 충격적인 설정이다. 하지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런 설정이 영화가 막을 내릴 때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90분 내내 영화는 단 한 순간도 어두컴컴한 관 바깥을 비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것은 분명 각본의 힘이자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에 출연하는 사람은 단 한 명, 폴 콘로이 역의 라이언 레이놀즈 뿐이다. 상영시간 내내 <베리드>는 2미터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모든 줄거리를 진행시킨다. 하지만 계속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들은 폴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까지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자신의 상황을 인식한 폴은 911 구조대와 자신의 회사, 그리고 국무부에 전화를 건다. 탈출을 위한 마땅한 방안이 보이질 않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에게 연락을 시도한다. 안타깝게도 그가 땅 속에 파묻힌 이라크와 시차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자동응답기만이 공허하게 녹음된 목소리를 흘려보낸다.

구조가 목적이 아니라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가 전화를 걸었던 사람들. 그 중 마침내 전화를 받은 첫 사람은 요양원에서 지내는 나이 든 어머니였다. 치매에 걸려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함에도 폴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울먹인다.

외부와의 단절과 그로 인해 절박해진 소통. 초조하게 흐르는 시간과 배터리 잔여량의 압박에 쫓기는 한 남자. 과연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왜, 무엇 때문에 그를 무덥고도 숨막히는 작은 공간 안에 가둔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관객도 꼼짝없이 그와 함께 관 안에 갇힌 신세가 된다.

그를 강제해고하는 기업과 속수무책인 정부... 개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베리드>의 한 장면. 작은 공간 안에서 영화 전체가 진행되지만, 끝없는 사건들의 진행으로 영화는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영화 <베리드>의 한 장면. 작은 공간 안에서 영화 전체가 진행되지만, 끝없는 사건들의 진행으로 영화는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 크리스리픽쳐스인터내셔널


마침내 폴의 동료들을 살해하고 그를 매장한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인질범은 2시간 내에 500만 달러를 준비한다면 폴을 꺼내어 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테러리스트와 절대 협상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이유로 몸값 입금을 거부하고, 설상가상으로 그가 소속된 회사는 소속 노동자가 사망하거나 다치기 직전에 보험금을 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폴을 강제해고한다. 이 모든 것은 관 안에 갇힌 폴에게 아무런 대화나 동의없이 '통보'될 따름이다. 잔인한 현실에 작은 도움이 필요한 한 남자는 말없이 누구도 보지 못할 눈물을 흘린다.

인질범은 한술 더 떠서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는 인질범의 자기정당화일 뿐인 설득력 없는 말이지만, 실체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이라크를 공격했던 미국의 입장에선 따가운 일침으로 들릴 듯 하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거야... 난 돈을 벌기 위해 여기 온 거야. 그 뿐이라고."
"당신들이 오기 전까진 나도 직업이 있었지. 이제 내 가족에겐 아무것도 없어."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9.11이나 사담도 내 잘못은 아니었지."

어느 나라에 속해있든, 결국 누구도 개인을 지켜주지 못하는 모습. 국가나 회사는 그들이 필요로 할 땐 개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외치지만, 개인이 그들을 필요로 할 때는 묵묵부답인 영화 속의 장면들. 현실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지나친 비약인걸까.

90분의 생매장 지옥, 당신의 마음은 홀가분해질 수 없다

 영화 <베리드>의 포스터.

영화 <베리드>의 포스터. ⓒ 크리스리픽쳐스인터내셔널


90분 동안의 생매장 지옥. 폴과 함께 땅 속의 관 안에 갇힌 관객은 주인공 만큼이나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장면을 절실하게 바라게 된다. 그에게 감정몰입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탈출이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결말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흡족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날 수 있도록, 주인공이 탈출하여 "미국은 끝내 승리한다"는 결말로 마무리를 지으려는 생각은 애초에 감독에게 없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이 무거운 마음을, 쏟아지는 흙으로 점점 차오르는 관 안에 갇힌 심정을 관객이 현실로까지 가져오길 바란 것 같다. 우리가 자랑하던 통신기술이 닿는 곳은 그저 누군가의 자동응답기에 불과한 불통의 현장, 직원의 안전보다 경제적 손실을 더욱 우려한 회사의 강제해고, 국민을 지켜주겠다던 약속이 무색해진 속수무책의 상황에 국가는 그저 "미안해요" 만을 되뇌이는 씁쓸함. 소외된 개인이 혼자서 고스란히 버텨내야 하는 오늘날 현실의 무게감은, 폴이 마주해야 했던 좁은 관 내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폴, 정말 미안해요"라고 한 번 더 나지막하게 말한 뒤 끝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우리의 바람일런지 모르겠다. 현실에서의 국가와 기업은, 요즘 뉴스들로 보아 짐작하건데 한 명의 국민 혹은 노동자를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 진심으로 미안한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2013년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천장이 관 뚜껑으로 변하고 흙이 쏟아질 것만 같다.

베리드 라이언 레이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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