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설의 주먹>에서 남서울고 신재석으로 분한 배우 박두식.

영화 <전설의 주먹>에서 남서울고 신재석으로 분한 배우 박두식. ⓒ 시네마 서비스


남서울고등학교 신재석(박두식 분)이 두드려 맞은 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을 때린 아마추어 복서 임덕규(박정민 분)가 다니는 고등학교를 단기필마로 찾아온다. 교련복을 입고, 벽돌을 양 손에 든 채. 유리창이 깨지고 신재석의 새된 목소리가 교실 복도를 울린다.

"야, 이 새끼들아 다 나와. 내가 남서울고 신재석이다!"

영화가 여기까지 전개됐을 때, 조용히 되감겨있던 머릿속 기억의 필름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나의 고교시절. 강우석의 신작 <전설의 주먹>은 1970년생 혹은, 1971년생들의 과거와 현재를 스크린에 담고 있다. 나와 내 친구들의 90%가 바로 그 나이.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떠도는 '싸움(주먹)의 전설'이란 과장되거나 왜곡되기 일쑤. 서울지역은 그 과장의 정도가 영남지역보다 좀 더 큰 모양. 영화 <비트>에서도 17대 1의 맞짱이 등장하더니, 이 식상한 레토릭은 <전설의 주먹>에서도 반복재생 된다.

현실에서의 고교생 싸움짱과 영화에서의 싸움짱

1988년 경상남도 M시. K라는 거구의 고교생이 있었다. 나는 그가 단신으로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7명을 채 3분도 안 되는 시간에 때려눕히는 걸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 두 방도 필요 없었다. 한 방에 한 명씩. K에 맞서던 일곱 중 몇은 실신했다. C라는 고교생 역시 무시무시했다. 손바닥 길이의 칼 하나로 자기보다 몸무게가 50kg이 더나가는 덩치들 위에 야수처럼 군림했다. 여윈 몸피와 달리 목소리는 굵었고, 행동거지 또한 10대 후반임에도 40대 중년 같았다.

K와 C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주먹(혹은, 싸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감옥을 들락거리고, 구설수에 휘말리더니 결국 둘 모두 서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그 죽음의 과정을 상세히 언급하는 것은 망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니 여기서 그만. 영화 <전설의 주먹>으로 돌아가자.

 영화 <전설의 주먹> 포스터.

영화 <전설의 주먹> 포스터. ⓒ 시네마 서비스


잘나가던 고교생 주먹 임덕규(황정민 분), 이상훈(유준상 분), 신재석이 마흔셋 중년의 아저씨가 됐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고, 빼어나게 공부 잘하지 못한 대부분의 그 또래가 그렇듯 셋의 삶은 신산스럽고, 별 볼일 없다.

아내 죽고 국수집 열어 겨우겨우 학비 대는 딸은 사고나 치고 다니고, 부잣집 친구 밑에 들어가 허울뿐인 부장 명함 받아 충실한 종노릇이나 하고, 후배에게도 무시당하는 삼류 늙다리 건달로 빌빌거리고.

그런 심드렁한 일들만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이들의 피를 다시 끓게 만드는 계기가 생긴다. 한 케이블방송사가 억대의 상금을 걸어놓고, 지난날 다리 떨며 침 깨나 뱉었다는 중년들을 불러 모아 싸움 붙이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연한 수순처럼 그 옛날 역전의 용사(?)들이 그 무대에서 다시 만나는데….

영화 <전설의 주먹>의 연출자인 강우석은 "영화는 다른 어떤 것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사람이다. 이미 그걸 아는 관객들은 강우석의 영화 안에서 묵직한 주제의식과 철학,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재미도 없다. 물론, 앞서 말한 주제의식과 철학, 깊이 있는 탐구도 없다. 그렇다면 <전설의 주먹>은 대체 뭔가?

 <전설의 주먹>의 한 장면. 임덕규로 분한 황정민.

<전설의 주먹>의 한 장면. 임덕규로 분한 황정민. ⓒ 시네마 서비스


메시지도 없고, 재미도 없는 <전설의 주먹>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다. 내놓고 환상주의를 표방한 작품이거나, 아이들을 위한 동화 애니메이션이 아닌 다음에야 핍진성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캐릭터에 현실성이 부여돼야 한다. 그런데, <전설의 주먹>에는 그렇지 못한 인물이 적지 않다.

비열하고, 추악한 졸부의 전형으로 설정된 손진호(정웅인 분). 삼촌뻘의 임원급 회사 간부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두드려 패고, 친구들끼리 싸움을 붙이지 못해 안달을 내고, 룸살롱 여급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깨버리고….

악인 캐릭터의 극단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이건 과하다. 문학계에선 '마분지 소설'(성적인 묘사가 과도한 조잡한 소설)도 이렇게 쓰면 욕을 먹는다. 손진호의 캐릭터는 현실에서의 존재 가능성이 0%에 가깝다. 해서, 관객의 실소를 부른다. 변사가 영화 전체의 대사를 혼자 처리하던 시대의 영화처럼 유치하단 이야기다.

성인 신재석의 캐릭터 역시 현실성 약하기는 마찬가지. 대한민국 어떤 조직폭력배가 옛날 친구에게 2억 원의 돈을 몰아주기 위해 제 몸을 바치겠나. 강우석은 언론에 거의 매일 오르내리는 협박과 갈취, 심지어 신체매매각서 등 '조직폭력배의 각종 악행'을 보고, 읽지도 않는 것인가? 이 역시 관객의 냉소를 부를 일.

캐릭터 구축의 실패만이 아니다. 임덕규의 딸 임수빈으로 분한 지우의 연기는 놀랍다(!). 대사 처리의 부정확성은 물론, 손발이 절로 오그라들게 만드는 서툰 눈물 연기는 보기 측은할 정도.

이요원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쿨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는 밋밋하고, 클라이맥스에서는 오버에 오버를 거듭한다. 1998년 <남자의 향기>로 10대 후반에 데뷔했으니, 경력이 막급 15년인데 어째 연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지. 불가사의하다.

 유준상의 연기는 <전설의 주먹>에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핍진성을 부여한다.

유준상의 연기는 <전설의 주먹>에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핍진성을 부여한다. ⓒ 시네마 서비스


재미있는 영화 만들겠다는 의지, 아직도 여전한지    

연기력 없는 배우들과 허술하게 축조된 캐릭터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건 강우석의 꿈은 될 수 있겠으나, 현실에서의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다. 해서, <전설의 주먹>은 신파에 억지눈물 짜내다가 중간중간 웃고마는 그저그런 영화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관객들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감동하지, 감독이나 배우가 "울어주세요"라고 읍소한다고 울진 않는다. 그건 구걸이다.

현실과 인간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 동화 같은 지루한 추억담.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좀 더 악평을 내놓았다.

"저걸 9천 원이나 내고 시간 들여 보라고(<전설의 주먹>은 상영시간도 2시간 33분으로 긴 편이다) 만든 사람의 용기 하나는 볼셰비키 혁명가급이군."

친구의 견해에 동의하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너무 혹평만 쏟아낸 것 같아, 덕담도 한 마디 덧붙인다. 황정민과 유준상의 연기는 나무랄 곳이 별로 없다. 짧지 않은 상영시간 동안 몰입의 순간은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우석 감독이 '재미있는 영화'를 포기하지 않고 또 만들 계획이라면 다음 번 캐스팅에도 두 사람을 우선 배정해야 할 것 같다고 감히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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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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