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MBC <무릎팍 도사>가 17일 방송에 이어 '컬투'의 두 번째 이야기를 방송했다. 컬트 삼총사로 시작해 컬투가 되기까지 순탄치 않았던 연예계 생활과 개그에 대한 그들만의 철학을 들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개그 콤비인 컬투를 보노라니 지난 50년 코미디 역사를 수놓은 기라성 같은 개그 콤비들이 불현 듯 떠오른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웃음을 책임졌던 개그 콤비는 어떤 이들이 있을까.

 '만담의 장인' 장소팔-고춘자 콤비

'만담의 장인' 장소팔-고춘자 콤비 ⓒ MBC


1960~70년대 : '장소팔'부터 '서영춘'까지

대한민국 코미디 역사 중 최초의 콤비로는 만담의 거장 '장소팔-고춘자'를 가장 첫 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유명 만담가 오성련에게 일본에서 직접 만담을 배운 장소팔(본명 장세건)과 성악가 이송락의 밑에서 가수를 꿈꾸던 고춘자(본명 고임득)는 1940년대 나란히 연예계에 데뷔하며 극단무대와 라디오에서 인기 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50년대 군 위문 공연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단짝 콤비로 대활약을 펼쳤다.

엉뚱하면서도 서민적 매력이 있었던 장소팔과 특유의 쉰 목소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고춘자의 만담 퍼레이드는 가난과 배고픔에 힘들어 했던 대중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하는 단비와 같았다. 특히 1967년 민요와 속사포 만담으로 꾸민 장소팔-고춘자의 <내 강산 좋을시고>는 그들을 전국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빅 히트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1970년대 본격적인 TV 시대가 도래하면서 장소팔-고춘자의 만담쇼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장소팔은 1996년 만담보존회를 창립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고춘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1994년 작고), 평생을 만담보존에 힘썼던 장소팔 역시 2002년 4월 운명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구봉서-배삼룡 콤비

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구봉서-배삼룡 콤비 ⓒ MBC


장소팔-고춘자 콤비가 라디오 시대의 스타였다면, 구봉서-배삼룡 콤비는 TV 시대가 낳은 빅스타였다. 서영춘과 함께 '개그계 트로이카'로 명성을 떨친 이들은 <웃으면 복이 와요> 등 MBC를 주무대로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특유의 개다리 춤으로 인기를 끌었던 배삼룡과 순박하면서 선한 이미지의 구봉서는 뛰어난 연기력과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TV뿐 아니라 연극, 영화까지 종횡무진 한 콤비기도 했다.

당시 이들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1973년 백주대낮에 벌어진 '배삼룡 납치사건'이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은 배삼룡을 둘러싸고 MBC와 TBC가 벌인 웃지 못 할 촌극으로 각 방송사 임원들이 난투극까지 불사해 화제가 됐다. 당시 TBC는 배삼룡을 빼 오기 위해 파격적으로 백지수표를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삼룡은 MBC 잔류를 결정했다. 이유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요즘에 왜 MBC에서 배삼룡이 안 보이지?"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고. 결국 배삼룡은 백지수표 대신 대통령의 뜻을 받든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접어들며 구봉서-배삼룡 콤비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치명타가 된 것은 신군부의 연예계 정화 사업이었다. 특히 신군부에 의해 저질 연예인으로 지목된 배삼룡은 방송 정지를 비롯해 연예계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이후, 여러 병환으로 고생하다가 2010년 명을 달리했다. 이에 비해 올해 87살의 구봉서는 간간히 TV 예능에 모습을 드러내며 예능계의 대부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구봉서-배삼룡 콤비와 더불어 60~70년대의 전설적 코미디언으로 손꼽히는 '한국의 찰리채플린' 서영춘도 콤비 활동을 한 바 있다. "배워서 남 주나""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등 숱한 유행어를 남긴 그는 능청스런 슬랩스틱 코미디로 폭발적 인기를 구사한 인물이다. 외국곡을 번안해 해학적이고 재미난 가사를 붙인 '시골영감'은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는 히트곡이 됐고, 90년대 후반 <남자셋 여자셋>의 이의정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서영춘의 단짝 콤비는 개그우먼 백금녀로 이들은 <거꾸로 부부>라는 코너에서 능청스런 연기를 펼쳐 큰 사랑을 받았다. 제목 그대로 남자인 서영춘은 요염한 여자로, 여자인 백금녀는 우악스러운 남자로 분한 코너로 뛰어난 구성력과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들 외에도 '왔다리 갔다리' 춤으로 인기를 모은 남철-남성남 콤비, '뚱뚱이와 홀쭉이'로 유명한 양훈-양석천 콤비도 60~70년대를 주름잡은 인기 콤비들 중 하나다.

 80년대 코미디 전성시대를 이끈 김미화-김한국 콤비

80년대 코미디 전성시대를 이끈 김미화-김한국 콤비 ⓒ KBS


1980년대 : '김미화'부터 '최양락'까지

1980년대는 '코미디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BC <웃으면 복이와요>, KBS <쇼 비디오 쟈키><유머 1번지><한바탕 웃음으로> 등이 경쟁을 펼치며 양질의 코미디를 끊임없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들 중 '김미화-김한국' 콤비가 선 보인 <쓰리랑 부부>의 인기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음메 기죽어" "음메 기살어!" 라는 유행어로 화제를 일으킨 이 코너는 80년대 여권 신장 붐을 타고 70%를 넘나드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특히 일자 눈썹을 붙이고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순악질 여사' 김미화의 연기는 단연 일품 중 일품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23살에 불과했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이 데리고 나온 강아지 행국이와 고수 역할을 하던 국악인 신영희씨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코너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1987년 <쇼 비디오 쟈키>에서 <시커먼스>로 인기를 모은 '이봉원-장두석' 콤비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망했다~망했어~"라는 유행어를 히트 시킨 이들은 랩을 도용한 음악개그를 펼쳐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88 서울 올림픽을 맞아 인종 차별 논란이 있다는 이유로 폐지되는 비운을 겪었다. 훗날 <개그콘서트>의 이수근-정명훈이 이 코너를 '키컸으면'으로 리메이크 해 인기를 모았다.

1989년 이봉원-장두석 콤비는 시커먼스 2부작 격인 <니캉내캉>으로 다시 한 번 음악개그를 선보였고 어린이 영화 <슈퍼 홍길동><부채도사와 홍길동> 등에 함께 출연하며 끈끈한 의리를 이어갔다. 2007년에는 나란히 <스타 골든벨>에 출연해 시커먼스 꽁트를 즉석에서 선보이며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유머 1번지>에서 '최양락-김학래' 콤비가 펼쳐낸 <괜찮아유> 역시 눈에 띄는 코너다. 사라져 가던 농촌을 배경으로 충청도 특유의 해학과 역설을 소재로 삼은 이 코너는 서로 칭찬을 늘어 놓다 결국에는 비난으로 끝나는 반전개그로 큰 웃음을 줬다. 2009년 <무한도전>에서는 이 코너에서 모티브를 따와 짧은 콩트로 재구성 한 바 있다. 최양락은 이 외에도 <남 그리고 여><고독한 사냥꾼><네로 24시> 등에 출연하며 "난 봉이야""신이시여!" 등의 유행어로 KBS 코미디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혼성 개그콤비, 신동엽-이영자

대한민국 최고의 혼성 개그콤비, 신동엽-이영자 ⓒ SBS


1990년대 : '김국진'부터 '서경석'까지

꽁트 코미디가 쇠퇴하고 버라이어티 쇼의 시대가 도래한 1990년대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 코미디계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김국진-김용만' 콤비다. 1991년 KBS 공채로 발탁 돼 감자골 4인방으로 이름을 알린 이들은 이른바 '항명 파동'으로 선배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90년대 중후반 MBC에 자리를 잡으면서 굳건한 인기를 과시하게 된다.

김국진-김용만 콤비는 당시 MBC 간판이었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시작으로 <테마게임><21세기 위원회><칭찬합시다><전파견문록> 등을 함께 하며 MBC를 대표하는 개그콤비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김국진은 "여보세요?""밤 새지 마란 말이야~""나 소화 다 됐어요" 등의 유행어로 대한민국 역사 상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고, 96년과 98년 두 차례 MBC 연예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상대적으로 김국진에 가려져 있던 김용만 역시 2000년대부터 재능을 펼치기 시작해 2000년과 2002년 MBC 연예대상을 수상했다.

90년대 MBC에 김국진-김용만이 있었다면, SBS에는 '신동엽-이영자' 콤비가 있었다. 이들은 장소팔-고춘자 이후, 40년만에 탄생한 대한민국 최고의 혼성콤비로 손꼽힌다. 서울예대(당시 서울예전) 선후배로 돈독한 우정을 쌓은 신동엽-이영자는 91년 개국한 신생방송사 SBS에서 <기쁜 우리 토요일><기쁜 우리 젊은 날><기분 좋은 밤>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며 폭발적 인기를 구가했다.

신동엽 특유의 깐족개그와 이영자의 파워풀한 진행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이를 통해 그들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1999년 신동엽이 대마초 사건으로 잠정적 휴식기를 가지면서 각자의 길을 걸었으나, 2010년 <안녕하세요>를 통해 11년 만에 재회해 변함없는 찰떡궁합 호흡을 자랑하고 있다. <안녕하세요>의 인기를 바탕으로 신동엽은 2012년 KBS 연예대상을 수상했고, 이영자 역시 2년 연속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93년 MBC 개그 콘테스트에서 나란히 금상과 은상을 수상한 '서경석-이윤석' 콤비도 있다. 우정 반지를 나눠낄 정도로 절친으로 알려진 두 사람은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아니, 그렇게 깊은 뜻이~" "그렇게 심한 말을" 등의 유행어를 히트시키며 프로그램의 인기를 견인한 명콤비다.

특유의 지적인 개그와 말장난은 이들 콤비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훗날 서울대와 연세대라는 학력이 밝혀져 주목을 받기도 했다. 특히 서경석은 90년대 중후반에 <울엄마>의 조혜련, <섹션 TV 연예통신>의 배우 김현주와 호흡을 맞추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1999년 MBC 연예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0년대가 낳은 전설적인 개그 콤비, 유재석-강호동

2000년대가 낳은 전설적인 개그 콤비, 유재석-강호동 ⓒ SBS


2000년대 : '유재석' 그리고 '강호동'

개그콤비가 넘쳐 났던 60~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예능계에서 콤비 플레이는 보기 드문 현상이 됐다. 방송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예능인들이 여러 방송사를 옮겨가며 활동하는 일이 당연시 되면서 '전속'의 개념으로 묶여있던 콤비 체제가 만들어지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가 낳은 전설적 콤비가 딱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유재석-강호동' 콤비다. <공포의 쿵쿵따>와 <X맨>을 통해 막강한 흥행 파워를 과시한 '유-강' 콤비는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최고의 조합 중 하나로 손꼽힌다. 촐싹 맞고 얄미운 유재석과 무식하고 호탕한 강호동의 캐릭터는 극과 극의 매력을 발산하며 시청자들을 끌어당겼고, 이는 훗날 유-강이 당대의 MC로 성장하는 근간이 됐다.

<X맨>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된 이들은 2005년 '리얼 버라이어티 붐'을 주도하며 예능 트렌드의 최전선을 이끌었고, 강력한 양강 구도를 구축해 예능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치열한 라이벌 전을 펼치고 있다. 아쉽게도 같이하기에는 너무 커 버린 유재석과 강호동이 언젠가 한 프로그램에서 웃고 떠들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대한민국을 웃긴 '자랑스런' 개그맨들

이처럼 한국 코미디는 장소팔-고춘자를 시작으로 유재석-강호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콤비를 탄생시켰다. 만담과 슬랩스틱으로 배고픔을 잊게 했던 60~70년대, 해학과 풍자로 가려운 곳을 긁어준 80년대, 근본적인 장르의 변화를 꾀한 90년대, 그리고 다양한 시도와 장르의 결합이 돋보이는 2000년대까지 코미디는 항상 대중 곁에 머무른 친숙한 '베스트 프렌드'였다.

웃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은 시대를 관통했고, 코미디는 그 욕망에 누구보다 충실했다. 걸출한 개그맨들과 콤비를 끊임없이 배출함으로써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발전한 역사는 한국 대중문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과 함께 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할 개그맨들이 자긍심을 갖고 자신들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길 바란다. 대한민국 코미디는 그들과 함께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유재석 강호동 신동엽 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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