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 쟁취를 위한 MBC노조 파업이 100일을 넘긴 가운데 9일 오후 서울 홍대앞 한 클럽에서 파업중인 MBC 아나운서들이 일일 주점 '우리 백일됐어요'를 열었다. 손님 입장을 앞두고 MBC아나운서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해 5월 9일 당시 파업 중이었던 MBC 아나운서들이 오후 서울 홍대앞 한 클럽에서 일일 주점 '우리 백일됐어요'를 열었다. 손님 입장을 앞두고 MBC아나운서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권우성


프리선언을 한 방송인 전현무가 15일 방송을 앞두고 있는 MBC <블라인드 테스트쇼 180도>로 첫 지상파 MC 신고식을 치른다. MBC <엄마가 뭐길래><무릎팍 도사>에 차례로 출연한데이어 고정 MC자리까지 꿰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뒷맛이 씁쓸하다. 전현무 기용의 이면에는 노조 파업과 함께 방송에서 사라진 수많은 아나운서들의 부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라진 MBC의 '스타 아나운서'

과거 MBC는 남부럽지 않게 자사 아나운서들을 잘 활용했던 방송사였다. 김성주를 시작으로 김완태·박경추·김정근·오상진·서현진·손정은·문지애·허일후 등 '스타 아나운서'들이 차례로 배출됐고, 이들 대부분은 시사 교양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예능에 이르기까지 적재적소에 배치돼 전 방위적 활약을 펼쳤다. 웬만한 방송인 못지않은 입담과 센스를 갖췄을 뿐 아니라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들의 가치는 대단했다.

그러나 작년 MBC 노조 파업과 함께 방송에서 그들은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파업 기간 6개월은 물론이고 파업이 잠정 중단된 7월 17일 이후에도 이른바 스타 아나운서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재철 사장의 주도하에 일사분란하게 이뤄진 인사이동과 징계로 인해 방송 출연이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파업에 참여했던 MBC 아나운서들의 현실은 <불만제로> 사건을 통해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작년 8월 20일 김철진 당시 교양제작국장은 파업기간 중단 됐던 <불만제로> 재개를 기획하면서 "문지애·오상진·허일후 기존 MC는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혀 노조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총파업특보에 따르면, 김시리 CP는 한 술 더 떠 "파업에 참여했던 아나운서들은 안 된다는 게 윗선의 방침"이라는 폭탄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실제로 오상진을 비롯한 기존 아나운서들은 <불만제로>에 합류하지 못했다.

이들 뿐 아니라 다른 아나운서들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MBC <뉴스데스크>의 간판으로 불렸던 이정민, 손정은 아나운서는 파업 도중 노조를 공개비판 하며 업무에 복귀한 배현진, 양승은 아나운서에게 자리를 내줬다. 이들은 18대 대선 개표 방송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에 대해 MBC 노조는 "파업에 참여한 이들에 대해 회사는 무더기로 쫓아내고 조직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답을 줬다"며 탄식했다.

이른바 '신천교육대'로 불리는 교육 발령을 받은 아나운서들도 있다. 아나운서 업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요리, 음악 등 교양 수업을 듣는 것이 그들의 하루 일과다. 강재형·김상호·김완태·김경화·최율미·박경추·김정근 등이 이곳을 거쳤다. 오랜 시간 시청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능력을 충분히 검증받은 이들이 교육 발령이라는 미명하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아나운서실에 복귀하지 못하고 한직으로 밀려난 이들도 상당수다. MBC 노조의 파업 종료 직전 신설된 미래전략실이 대표적이다. 정체성이 모호한 이 부서에 김완태, 허일후 등 유명 아나운서들이 가득 포진해 있다. 이외에 박경추(성남용인총국)·김범도(인천총국)·신동진(사회공헌실)·최율미(용인드라미아개발단)·최현정(사회공헌실) 등을 포함한 11명의 인원이 아나운서국 밖에서 근무 중이다.

작년 12월 7일 <2012 한국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 '장기범상' 수상자로 나섰던 김완태 아나운서는 현 상황에 대해 "MBC 아나운서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 아나운서의 본업이 방송인데 방송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조차도 오늘 올해 들어 처음 마이크 앞에 섰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세상에는 영향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다. 영향을 행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난 1년간 방송을 하지 못했다. 가까운 시일 내 방송으로 복귀해 방송에 영향을 행사하려는 사람이 아닌 영향을 주는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의지를 밝힌바 있다.

 최근 MBC에서 각각 새로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방송인 김성주(왼쪽)와 전현무

최근 MBC에서 각각 새로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방송인 김성주(왼쪽)와 전현무 ⓒ MBC, CJ E&M


전현무는 있고, 오상진은 없는 '이상한 MBC'

그러나 김완태의 바람과 달리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MBC 아나운서들의 빈자리를 외부 인력들이 속속 채우고 있는 모양새다. MBC 아나운서에서 프리랜서로 전향한 방송인 김성주가 대표적이다. 2007년 프리 선언 이 후, MBC와 껄끄러운 관계를 맺어왔던 김성주는 역설적으로 노조 파업을 계기로 친정 복귀에 성공할 수 있었다.

파업 참여 아나운서들을 대신해 런던 올림픽 중계단을 이끌며 오랜만에 '스포츠 캐스터'로 활약했던 그는 최근 <일밤-아빠 어디가>를 통해 주말 예능에 복귀하며 MBC 예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김성주가 MBC 예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9년 <명랑 히어로> 이 후, 무려 4년여만의 일이다.

KBS에서 프리선언을 하고 방송계에 뛰어든 전현무도 MBC를 통해 가장 먼저 지상파 복귀 소식을 알렸다. 시트콤 <엄마가 뭐길래> 카메오 출연, <무릎팍 도사> 게스트 출연에 이어 이번에는 <블라인드 테스트쇼 180도>의 고정 MC로 발탁됐다. MBC 역사 상 타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이 이렇게 빠른 시기에 메인 MC로 기용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전현무에 앞서 박지윤 전 KBS 아나운서도 MBC 예능의 심장부 <일밤-매직콘서트>에 자리를 잡았다. 매끄러운 진행 실력과 세련된 말솜씨로 KBS 시절부터 인기를 끌었던 박지윤은 <일밤>에서도 탁월한 재능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다. 박명수, 정준하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며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이다.

이처럼 MBC는 자사 아나운서들 대신에 프리로 전향한 아나운서들을 대거 기용해 프로그램을 꾸려나가고 있다. 물론 프리랜서 방송인들의 출연이 잘못 됐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저렴한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자사 아나운서들은 철저히 배제한 채 값비싼 외부 인력에 몰두하는 MBC의 태도가 이해가지 않을 뿐이다. 전현무를 대신해 오상진이, 박지윤을 대신해 문지애가 출연해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왜 굳이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일각에서 '파업에 대한 보복' 때문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MBC 노조에 따르면, 이런 논란에 대해 최재혁 아나운서 국장은 "파업 참여 아나운서들을 방송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사실 무근"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파업에 참여했던 모든 아나운서들을 제자리에 복귀 시키고, 방송 활동의 길을 틔워주는 성의가 필요하다. 능력 있는 아나운서들이 언론인으로서, 방송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MBC는 전현무는 있는데, 오상진은 없다. 박지윤은 있는데, 문지애는 없다. MBC 노조의 말마따나 "얼굴이 사라진 유령 방송"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과연 언제쯤 진짜 MBC의 웃는 얼굴들을 만날 수 있을까. 파업에 참여하면 '밥줄을 내놔야' 하는 시대, 우린 참 이렇게 재미없이 일그러진 시대에 살고 있다.


전현무 김성주 박지윤 오상진 김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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